전통에서 길어올린 ‘창조’의 소리
  • 이건용(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
  • 승인 1994.09.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윤이상 음악’의 뿌리와 깊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독일 작곡가들은 현대 음악이 나아갈 방향을 새로이 모색하는 일로 분주했다. 나치 독일 민족 우월주의에 맞는 음악, 예컨대 베토벤ㆍ브람스ㆍ바흐ㆍ바그너ㆍ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을 선호하고 현대 음악은 탄압하였다. 따라서 독일 현대 음악의 주요 작곡가들은 대부분 미국 등지로 망명해 버렸고 33~45년은 현대 음악의 불모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독일이라는 나라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대 이래 음악의 선진국이었고, 또 나치 독일에 의한 전쟁의 참화는 도일에 국환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현대 음악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은 비단 독일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어쨌든 33년 이래 끊어진 현대 음악의 흐름을 잇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는 가운데 독일의 다름슈타트라는 작은 도시가 주요한 무대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곳에서 현대 음악 작곡가들은 회합을 갖기도 하고 또 현대음악제를 개최하여 현대 음악의 다양한 관심들을 묶어 새로운 쟁점으로 만들어 냄으로써 현대 음악의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로 말해서 2차대전 전 작곡가로서는 쇤베르크를 비롯하여 바르토크ㆍ힌데미트ㆍ스트라빈스키가 계승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쇤베르크와 그의 두 제자인 일반 베르크, 안톤 베베른의 작품이 전후 작곡가들에 의해 연구되었다. 이렇게 해서 쇤베르크의 음열주의를 계승한 전음열주의가 하나의 흐름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새로운 음향 매체에 영향 받은 구체 음악과 전자 음악이 등장했다. 또한 모든 음의 출현을 미리 결정한 전음열주의와 대립되지만 어느 한편으로는 닮은 바도 있는 우연 음악, 음 높이와 선율에 대한 기존 음악의 주된 관심을 과감히 음색과 ‘소리의 띠’로 옮겨간 음색 음악이 뒤이어 등장했다. 이렇게 해서 대략 60년까지 메시앙ㆍ리게티ㆍ불레즈ㆍ펜데레츠키ㆍ슈톡하우젠ㆍ케이지 등이 나타나 현대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했다. 여기서 윤이상이 등장하여 이들과 나란히 어깨를 겨루면서 자신의 고유한 음악 세계를 펼쳤다.

현대 음악 어법에 ‘우리 개념’ 접목
  윤이상의 음악 언어는 물론 독일에서 익힌 독일 현대 음악 어법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는 쇤베르크와 그의 후계자들의 음악 어법을 일단 소화하였다. 하기는 그것이 다름슈타트의 주된 흐름이기도 했다. 그러나 윤이상 음악의 독특함은 거기서 오는 것은 아니다. 그의 음악을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의 음악과 구별짓게 하는 것은, 그가 40년대의 초창기 가곡에서도 관심을 나타낸 적이 있는 한국 전통 음악에서 가져온 개념들이다. 쉽게 재료의 차원에서 예를 들자면, 중심음ㆍ미분음(微分音)ㆍ헤테로포니 같은 개념이 그것이다.

  중심음이란 서양 조성의 으뜸음 같은 것인데, 무조성적 현대 음악에서는 이미 사용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산조 음악에서는 서양의 으뜸음과는 다른 개념의 중심을 찾아볼 수 있다. 윤이상은 이것을 서양의 현대 기법에 맞게끔 고쳐 사용한 것이다.

  미분음의 여러 가지 현상은 우리나라 음악에서 두루 쓰이는 것이다. 여러 가지 떨림ㆍ꺾음ㆍ흔듦은 판소리나 민요나 기악 음악에 참으로 다종 다양하게 사용되어, 이것이 없이는 우리 음악은 맛 자체가 없어진다고 말할 정도이다. 그러나 서양 음악에서는 하나의 음을 낼 때 그 음높이를 일정하게 하지 그것을 흔들거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떨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윤이상은 이러한 여러 가지 떨림ㆍ흔듦 같은 미분음을 자기 음악의 재료로 삼음으로써 다른 작곡가에게서 들을 수 없는 소리의 세계를 창조했다.

  헤테로포니란 여러 가지 이질적인 악기들이 특유한 가락을 제멋대로 연주하게 하되 이를 한데 묶어 소리를 연출하는 방식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시나위 같은 것이 전형적이나 궁중음악ㆍ정악 등에서도 여러 가지 독특한 방식이 나타난다. 이것을 윤이상은 중심음 둘레를 끊임없이 이탈하였다가 회귀하는 장식음군의 헤테로포니로 바꾸어 그의 독특한 음악 어휘로 만들었다.

  물론 윤이상은 한국 전통 음악의 재료만을 그의 음악에 빌려 쓴 것은 아니다. 그가 스스로 말했듯이 그의 음악은 한국 전통 음악의 사상과 동양 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 적지 않아 보인다. 과연 어떤 음악의 어떤 부분이 어떻게 동양 사상을 나타내고 있는지 설명하기란 어렵다. 필자로서는 예컨대〈주역〉에서 설명하는 음양의 대비와 조화라는 개념을 가지고 윤이상의 음악에 나타나는 靜 ― 動 ― 靜의 흐름을 이해할 때가 있다. 음양이 조화된 하나의 상태가 있다고 하자. 이 상태에서 양의 기운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점차로 조화가 깨지고 긴장이 높아진다. 음의 기운은 한껏 축소되지만 (〈주역〉식의 사고가 그러하듯) 역설적으로 음의 도래는 점점 더 필연적으로 되어간다. 긴장의 끄트머리에서 양의 기운은 파국을 맞이하고 이제는 그 반작용으로 음의 기운 쪽으로 흐름이 바뀌면서 긴장이 해소되고 새로운 조화의 상태가 조성된다. 그리고 다시 靜 ― 動 ― 靜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이것은 주역의 설명 방식이지만 윤이상의 음악이 구성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구성 원리가 작은 부분에서부터 큰 부분에 이르기까지 적용되는 것이다.

정치적인 음악조차 음악적 원리로 구성
  이러한 윤이상의 음악 어법은 그의 음악에 다른 서양 현대 작곡가들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소리의 개념들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특하게 견고한 구성 원리, 특이한 서정성, 현대 작품에서는 드물게 발견되는 선율적 매력을 부여하였다.

  그는 동베를린 사건 이래 한국 정부와 불편한 관계가 되어 있지만, 그것이 원인이었든 결과였든 간에 평범한 음악가들과는 달리 높은 정치ㆍ사회적인 의식을 담은 진지한 작품들을 적지 않게 썼다. 이 역시 윤이상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그는 음악을 정치ㆍ사회적 의식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장 정치적인 음악조차 그는 매우 음악적인 원리로 구성해 낸다. 따라서 그는 정치적 내용을 가진 음악이 별로 없고, 대체로 순수한 예술 음악이 지배하는 서양의 현대 음악계에서 다시 한번 독특한 작곡가라는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앞서 말했거니와 윤이상은 80년대에도 작품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에 관한 글들을 보면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작품들이 쏟아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그의 작품을 접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 점은 아직도 크게 변함이 없다. 작품의양으로 보나 작가 세계의 폭으로 보나 윤이상은 몇몇 사람에 의한 간헐적 연구로 파악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작품 전반에 걸쳐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한 음악가이다. 그리고 그러한 연구는 틀림없이 우리나라 음악계와 작곡계에 좋은 자양을 제공해 줄 것이다.

이건용(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