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검찰수사는 멈추지 않는다”
  • 진주ㆍ허광준 기자 ()
  • 승인 1994.09.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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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 교재’영장 기각 후에도 기소 원칙 여전…담당 판사 “아직은 법원에 남고 싶다”

이 적성 교재를 엮어 학생들을 교육했다는 혐의로 공안 당국이 경상대 교수들을 조사하기 시작한지 한달째인 8월31일, 창원지방법원 최인석 판사(37ㆍ사시26회)가 검찰의 구속영장을 기각함에 따라 경상대 사태는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최인석 판사는 영장 신청을 기각한 이유를 자세히 적은 첨부서류에서, ‘강의 교재에 급진 좌경적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사상적 건강 상태가 그 정도 내용을 소화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 ‘학문의 자유 또한 법이 보호해야 할 국민의 기본권이며, 대학 강의와 관련한 것은 국가 공권력이 개입하기보다 대학의 자율적 조정 기능에 맡기는 것이 낫다’고 밝혔다.

  당연히 영장이 발부될 것으로 믿고, 수사 결과와 혐의, 사건의 위험성 등을 알리려는 보도자료까지 준비해 두었던 창원지방검찰청은 영장 기각에 당혹해하고 있다. 이 사건을 담당한 특수부 박 만 부장검사는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지만, 법원 결정이므로 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법원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으므로 따로 할 말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각 결정에 대해 검찰 내부에서는 불만이 꽤 높다. 박부장검사는 최판사의 기각 이유서를 놓고 하나하나 밑줄을 쳐가며, “이 문서에서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 표현은 ‘강의가 폐강된 것’과 ‘교수들이 자진해 구인에 응하거나 출석한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그 나머지는 모두 판사의 개인적인 판단이라는 것이다.

  법원 주변에서도 최판사의 기각 결정에 대해 엇갈리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창원지법의 한 판사는 “이번 결정은 교수들의 혐의가 무죄라거나 하는 실체 판단이 아니라, 단지 구속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다름 아닌 실사구시파”
  검찰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한 최인석 판사는 인터뷰를 마다며 “나는 아직은 법원에 남고 싶다”라고 말했다. 다른 판사에 따르면, 기각 결정을 내린 후 격려 전화도 많았지만, 항의 전화도 쇄도했다고 한다. 그는 기각 결정 탓에 이래저래 시달리는 것처럼 보였다.

  교수들에 대한 조사는 경남경찰청 보안분실에서 8월30일 밤 10시까지 진행됐다. 경찰은 교수들을 조사하면서 이들의 사상이 주사파나 마르크스ㆍ레닌주의가 아닌가, 또 이들이 학생들에게 ‘혁명’을 부추긴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알려졌다. 장상환 교수는 “경찰이 이미 정해진 구도 속에 잡아넣으려는 식으로 수사한다는 인상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교수들의 사상적 소속이 'NL'이냐 ‘PD'이냐 하는 것을 추궁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교수는 “우리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속한다면 학문의 기본적 역할인 ’실사구시파‘에 속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전했다.

  그는 불합리한 방식으로 무리하게 조사하는 경찰의 모습이 안쓰럽고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수업을 들은 학생의 의견을 듣고 이를 수사 과정에서 교수에게 확인하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렇다면 주사파 학생의 발언을 교수가 하나하나 기록해 뒀다가 고발해야 하느냐. 이것은 사제간의 기본 윤리마저 무너뜨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경상대 교수가 안기부장 앞으로 보낸 편지를 검찰이 서둘러 공개한 것도 악수를 둔 것으로 분석된다. 이 편지에는〈한국사회의 이해〉저자들의 사상을 ‘고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편지의 내용을 공개함으로써 검찰이 해당 교수들을 사상적으로 문제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며 수사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영장 청구에 실패했지만, 검찰의 수사 의지는 여전히 강경하다. 검찰은 정ㆍ장 두 교수에 대한 기소 원칙은 여전하며, 다른 교수들은 일단 입건하여 수사한 후 ‘죄질’에 따라 기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구속영장 재청구 여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으나, 법조계 주변에서는 이미 한번 기각됐으므로 다시 신청하기는 어려우리라고 본다.

  이번 영장 기각 결정은 경상대 사건을 바라보는 사법부 일각의 시각을 보여준 것이지만,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되면 어떤 식으로든 재판 과정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일단 기소가 되면 교수들은 국립대 소속으로 공무원 신분이기 때문에 직위 해제 같은 신분상의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검찰은 두 교수를 인신 구속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불구속으로 기소할 방침을 밝힘으로써, 재판절차마다 길고도 지루한 ‘이적성 논쟁’은 계속될 것 같다.
진주ㆍ許匡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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