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10월이 마지막 기회”
  • 남문희 기자 (sisa@sisapress.com)
  • 승인 1994.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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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국 발빠른 실리 외교로 정세 변화 급박…정부 현실적 대응 절실

한국 외교에 비상구는 있는가. 공안 정국의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몰아닥친 주변 국가들의 ‘총공세’를 놓고 외교가에 이를 우려하는 소리가 커지고 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최근의 여러 상황이, 앞으로 몇 달 동안 전개될 대변혁의 전주곡 같다는 냉철한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위기를 극복할 기회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나, 한국 외교는 지난 두 달 동안 그 실체를 분명히 드러낸 공안세력, 언론 · 여당내 우익의 벽 앞에서 어떻게 입지를 찾을 것인가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

 한 외교 전문가는 “우리 외교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고만 말할 뿐 지금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라고 통렬히 지적했다. 경수로 문제에서 우리는 한국형이 되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해왔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실질적인 노력이 없는 상태에서 경수로 문제를 다루는 미· 북한 전문가 회담 장소가 갑자기 베를린으로 결정됐다. 왜 베를린인가. 이미 독일형 경수로가 채택될 가능성에 대한 지적이 나오기는 했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날 갑자기 독일이 납북한 사이에 등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독일은 이미 옛 동독 시절부터 북한과 끈끈한 유대가 있었고, 통독 이후에도 경제관계 확대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 왔다. 독일형 경수로 제작 업체인 지멘스는 바로 고속 전철을 둘러싸고 프랑스의 테제베(TGV)와 경합했던 회사다. 독일이 경수로 지원금을 떠맡게 될 경우,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재정 지원 몫을 통해 러시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도 가능해진다. 즉 미국 · 북한 · 러시아 등 그동안 직접 간접으로 관련돼 있던 국가들이 이해관계 정리가 가능해지고, 이럴 경우 한국이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중국의 움직임 심상치 않다”

 경수로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중국의 움직임이다. 중국은 북한 외교부 부부장의 방중 요청을 받고 군사정전위 철수라는 중대한 결정을 한국 정부에 일언반구 통고도 없이 강행해 버렸다. 또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 등 한국의 정상이 두 차례나 중국을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붕 총리의 방한 정도로 대응하려 하고 있다. 반면 현재 외교가에는 강택민 중국 주석이 북한 김정일의 권력승계식에 맞춰 평양을 방문할지 모른다는 소식이 조심스럽게 떠돌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통해 중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지나친 대미 편중 외교에 대해 경고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영향력이 북한에까지 확대되는 것에 대응해 한국 정부에 대해 정치 · 외교 영향력을 행사할 의사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은 그럴 만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외교 전문가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 지렛대는 한국 경제의 중국 시장 의존도가 심해졌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92년 한 · 중 수교를 기점으로 한국의 10대 무역국가 중 미국 · 일본 · 유럽연합 비중은 크게 감소하거나 아예 탈락해 버린데 비해 중국 · 대만 · 홍콩을 비롯한 중화 경제권 국가들은 급격히 떠오르고 있는 데서 보듯, 한국 경제의 중국 의존도는 가파르게 높아지고 있다. ‘탈냉전 시대엔 원자탄보다 무서운 것이 시장’이라는 말처럼, 중국이 현재 육체(경제)와 정신(정치·외교)이 분리된 한국 외교에 대해 시정을 요구해올 경우 우리는 속수무책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 북방 문제 전문가는 “미국 중심 외교에서 중국 중심 외교로 고통스런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점차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북한에 접근하는 속도, 그리고 이에 뒤따르는 한 · 미 관계의 재조정은 이러한 결단의 속도를 더욱 앞당기게 할지도 모른다. 현재 정가 주변에는 이홍구 부총일 겸 통일원장관이 김영삼 대통령을 독대하는 자리에서, 그동안 전개된 대북 강경책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주미대사를 지낸 ㄱ씨를 중용하라고 건의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잇다. 또한 지난 5일 한승주 외무부 장관의 갑작스런 방미는 김대통령의 지시에 따랐기보다는 미 · 북한 관계 급진전에 위기의식을 느낀 한장관이 주도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냐 하는 분석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현재의 상황을, 정부 내에서 대북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작아지고 이장관이나 한장관 같은 온건 합리주의자들이 재등장해 미 · 북한 관계와 남북 관계의 속도를 조정하기 위해 부심하는 국면이기는 하나, 이 역시 역부족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한다.

 미 · 북한 관계의 속도를 암시하는 한 움직임이 주한 미국대사관에 나타나고 있다. 미대사관 외교관 중 평양 근무 예정자가 이미 내정돼 있다는 것은 외교가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데 두달 전부터 외교관 2명이 이 평양 근무를 위해 카운트 다운에  들어갔고 가족은 이미 도쿄로 이사했다는 것이다. 북한 전문가인 김남식씨는 “현재의 미 · 북한 회담의 큰 방향은 지난 88년 말부터 북경에서 시작된 참사관 접촉 30여 차례와 92년 1월의 김용순 · 캔터 고위급회담에서부터 이미 결정되었다고 봐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미 · 북한 막후합의설인데, 김씨는 특히 경수로 지원 문제에서도 양국 간에 깊숙한 막후 거래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즉 32억달러라는 막대한 규모의 지원을 미국이 아무런 대가 없이 북한에 제공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데 북학은 그 대가로 ‘21세기 아시아의 암스테르담’이라는 나진항 · 선봉항의 개발권과 사용권을 미국에 제공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탈냉전 시대에서 북한의 지정학적 가치를 미국도 잘 알고 있다. 또한 김정일 시대에 북한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친미 노선을 걷게 될 것이다”라고 김남식씨는 내다봤다.

“대통령이 현명한 판단하도록 힘 실어줘야”

 미 · 북한 간의 급속한 관계 진전에는 결국 한 · 미 관계 재조정이 따르게 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초미의 관심사는 95년부터 예정돼있는 주한 미 지상군의 단계적 철수 문제다. 지난 90년 부시 정권 당시 ‘90년대 미국의 동북아 전략 구상’의 일환으로 결정된 이 문제는, 그동안 북한 핵 문제로 인해 동결 상태에 있었는데, 앞으로 핵문제가 해결될 경우 원래대로 추진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최근 유사시 미7함대의 한 · 미연합사 전환 배치 결정이 보도됐는데, 이는 앞의 문제와 깊이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지상군을 해 · 공군력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결국 남북한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양 강국과 맺어온 수직 관계를 수평 관계로 전환하는 과정에 놓인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뜻은 한반도가 또다시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고, 그만큼 분단 구조가 심해진다는 것이다.

 김일성 사망 직후 남북 관계를 급진전시킬 호기를 놓쳐버리고, 오히려 반목 심화라는 불행한 상태에 처한 현재로서는 앞으로 주어질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는 길밖에 없다. 청와대의 대북 실무자들이나 관계 전문가들이 앞으로 거의 유일한 기회로 여기는 시기는 바로 10월 말~11월 초다. 9월23일 미 · 북한 3단계 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미국측이 과거 핵문제 해결이나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서라도 남북 대화에 응하도록 북한을 설득할 것이고, 또 10월16일께로 예상되는 김정일의 주석직의 승계가 마무리되면 북한은 한국 자본의 북한 진추를 촉발하기 위해서라도 대화에 응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또 11월 초로 예정된 미국 중간선거도 중요한 변수이다. 청와대의 대북 실무자는 “10월이 지나버리면 상황이 매우 어렵다”라고 말했다.

 바람직한 것은 남북 간의 직접 교섭에 의한 대화 재개이겠지만, 현재같이 남북한이 마치 아시아의 이스라엘 · 팔레스타인처럼 ‘종교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중동문제의 해법이 그러했듯이 미국 중재하에 클린턴 · 김영삼 · 김정일의 워싱턴 3자 회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외교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은 김대중 아 · 태재단 이사장의 9월17일 미국 방문, 그리고 카터 전 대통령의 재방북 움직임 등으로 현실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남북 정상회담이 북한에 대한 국가 승인으로 이어질 경우 지난 40여 년간 유지해온 기득권을 상실할 것으로 두려워하는 세력이 반격할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지금은 정부의 외교 고립을 질타하고 있는 언론도 이때쯤 되면 자존심 문제 등을 제기하며 김영삼 대통령의 운신 폭을 죌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김대통령이 반발 세력의 압력에 또다시 주춤하게 될 경우 당분간 한국 외교는 국제 무대에서 로빈슨 크루소 같은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한 전문가는 “이제야말로 양식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더 이상 극우와 극좌 몽상가들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겨두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 대통령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南文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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