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勢’ 뒤바뀐 <태백산맥>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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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임권택식 해석’ 따라 원작과 큰 차이 ‘인간’ 중심 앵글에 “반공 영화”지적도

 김범우(안성기) : 당신들은 실패했소. 철저히 말이요.
염상진(김명곤) : 난 마르크스를 처음 읽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네. 더 이상 계급과 착취가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평등 속에서 인간적 삶을 누리면서 사는 세상 … 그 세상을 만들겠다고 맹세했었지. 그런데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할 수 만 있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네.
 영화 <태백산맥>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대화이다. 50년 9월 남로당 전남도당이 각 군당으로 하여금 당조직을 지하 조직으로 개편하고 조직적으로 후퇴하도록 지시한 직후 김범우가 염상진을 찾아와 추궁하는 장면이다. 조정래의 원작 소설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장면에서 매우 당황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면은 조정래의 원작 소설에 없을 뿐더러 두 주인공의 신념 체계를 완전히 변질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신념 체계 변색
 소설 <태백산맥>에서 염상진은 마지막까지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을 구현하려다 죽는다. <태백산맥>의 1만9천장 원고 위에서 염상진이 자기 신념에 의문을 품거나 회의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작가가 역사의 만원경과 현미경을 동시에 대고 관찰한 인물 가운데 염상진만큼 일관된 신념 체계를 보이는 인물은 드물다. 의사인 전명환이나 민족주의자요 지식인인 김범우가 때로 회색지대의 인물처럼 그려지는 반면 염상진은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고전성을 끝까지 지켜낸다. 김범우 역시 염상진을 실패자라고 단정하기는커녕 “모택동보다 더 견고한 신념과 확고한 자신감을 가진 인물이며 스스로의 행복을 넘어서 행복을 생산하는 영웅”이라 부른다. 김범우가 소설 대미에서 염상진이 실천하다 죽은 과학적 사회주의에 동행하는 것은 이러한 장치 위에서 가능하다.

 이밖에도 소설 독자를 의아하게 만드는 장면은 여러 군데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영화 속의 김범우는 벌교의 좌익 성향을 ‘땅에서 시작되고 땅으로 귀결된다’고 파악한다. 그는 “그들이 주장하는 무상 몰수 무상 분배는 자기 땅을 갖고 싶어하는 소작들의 열망의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영화에서 사회 개혁의 생각은 소작인인 문서방과의대화를 통해 ‘매우 신경질적’으로 표출된다.

문서방 : 좌익덜이 지주덕 전답얼 싹 뺏어 갖고 작인덜한테 골고루 갈라주었다는 것인디 그게 참말일께라?
김범우 : 문서방 생각으론 참말 같소?
문서방 : 금메 말이요. 고로케만 됨사 싫어 할 사람이 한나도 없을 것이제만서도 시상에
고로케 기막힌 인심이 워디 있으라디야 허는 생각도 들고.
김 : 문서방도 땅을 갖고 싶지요?
문 : 하먼이라. 살아 생전 안되면 저승 가서 라도 풀고 잡은 소원인디요.
김 : 그 소원이 풀려 열마지기쯤 논이 생겨 농사를 지었다 해요. 그런데 쌀을 나라에다 내놓고 매달 배급을 타먹으면 어떻겠소?
문 : 미쳤간디요? 지가 진 농사 지손으로 간수하는 맛이 살제 무신 초친 맛이라고 배급을 타다 묵어라?
김 : 그럼 이건 어떻소?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정해진 배급을 타 먹는 것말이오.
문 : 아 니것도 내것도 아닌 논에 그놈의 농사 잘 되야묵것네요. 아 내 터밭고추가 주인밭 배추보다 속살이 더 여무는 이치가 뭔디.
김 : 좌익이 논을 분배한다는 것이 바로 그 방법이요.

‘개작 한계’ 논란의 단서 될지도

 결국 영화 <태백산맥>과 소설 <태백산맥>의 두 주인공은 동명 이인일 뿐 아니라, 작가 조정래가 독자에게 말하려 했던 사실과 임권택이 그의 관객에게 말하려 했던 진실은 매우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권택 감독 역시 영화 <태백산맥>이 원작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는 “원작을 그대로 하려면 영화 창작자는 뭐하러 존재하는가”라고 말하면서 “그 시대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에서 원작자와는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입장을 확고히 한다. 그는 또한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임권택의 <태백산맥>, 우리가 그 두 가지 <태백산맥>을 가져도 좋은 게 아니겠는가”라고 되묻고 있다. 임권택 감독이 보기에 소설 <태백산맥>은 이념 갈등에 치중한 작품이다. 조정래씨가 자기 작품을 가리켜 “해방 공간의 역사 진실을 복원한 작품”이라고 말했을 때의 이념 갈등은 좌익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환경이지만, 임권택 감독이 시나리오 작업을 할 때의 그것은 “낡은 것에 매달리는 일”리 되고 만다. 임권택 감독이 ‘이념 갈등’을 버리고 ‘인간’을 택했을 때 그 마음은 ‘이데올로기가 사람들 이렇게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데 그는 이것을 인본주의라고 이름 붙인다.

 이념이 인간을 파괴한다는 임권택 감독의 신념은, 그가 지난 유신시대에 양산한 일련의 반공 영화들을 다른 반공 영화들과 구별짓게 하는 힘을 지닌다. 그의 말대로 “지금은 그때와 달리 우익도 잘못했다는 부분에 카메라를 들이댈 수 있다”는 사실과, 제작비를 충분히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조건을 감안한다면, <태백산맥>은 그가 지금까지 만든 반공 영화 중 가장 빼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게 될지 모른다.

 그는 왜 <태백산맥>을 택해 영화화했을까. “빨치산의 아들로서 해방 공간이야말로 꼭 다뤄보고 싶었던 소재였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같은 세계관에 부응하는 원작을 택하거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것이 옳지 않았을까.

 이에 대해 <태백산맥>의 시나리오 작업을 맡았던 송능한씨는 “다 알다시피 <태백산맥>은 3백만부가 팔려나간 당대 최고의 인기 소설이다. 다른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든다면 제작비를 댈 사람이 있겠느냐”라고 반문한다. <태백산맥>이 ‘베스트 셀러에 기댄 반공 영화’라는 비난이다. ‘우익 테러가 아니라 좌익 테러가 나올 판’이라는 우스갯소리는 앞으로 원작 소설의 영화화와 개작의 한계를 논의할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

 한 영화 평론가는 영화가 자본주의의 꽃이 라고 전제하면서 “임권택 감독이 자본주의의 손을 들어준 것은 <태백산맥>의 숙명”이라고 말한다. 최근 공연윤리위원회가 <태백산맥>의 무수정 개봉을 확정한 후 우익 단체의 협박은 자취를 감추었다. 제작이 끝난 이후 끊임없이 보도되었던 우익 단체의 테러위협설은 결국 영화 <태백산맥>의 충실한 홍보역이 되어준 셈이다.
金賢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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