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미쳐 전국 세 번 누볐다”
  • 전주ㆍ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11.14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북 무형문화재 ‘이강주??제조기능 보유자 趙鼎衡씨

 전북 무형문화재 6호이며 전주 梨薑酒 제조장 대표 趙鼎衡씨(50) 가 최근 우리나라 향토주의 유래와 분포, 만드는 법 그리고 그 특징 등을 집대성한 책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을 도서출판 서해문집에서 펴냈다.

 이 책의 출간은 87년 무형문화재가 된 이래 오랜 숙원이었던 ‘이강주 전국 시판??이 지난 7월 허용된 것과 이어져 조씨로 하여금 남다른 감회에 젖게 한다. 우리나라 3대명주의 하나로 손꼽히던 전주 이강주 제조기능보유자로서 무형문화재가 되기까지, 그리고 그의 오랜 숙원이던 이 책이 햇빛을 보기까지, 거개의 무형문화재가 그러하듯 그가 남몰래 쏟은 땀과 눈물이 새삼 물밀어오기 때문이다.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이 단지 지은이에게만 의미가 있을 수만은 없다. 공장에서 쏟아져나오는 서양식 술과, 수입자유화의 물결을 타고 들이닥치는 외국산 술이 넘쳐나는 이즈음에 나온 이 책은 “술마시는 데 있어서는 세계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한국인들에게 우리 술문화의 정체성과 다양성, 그리고 그 우수성을 확인시키면서 우리 술의 내일을 내다보게 한다는 점에서 또 다른 뜻을 가진다.

 “85년 도데다 무형문화재를 신청했는데 당시 심사위원중에 아버님(趙炳喜ㆍ81ㆍ서예가ㆍ시인)이 있었다. 그런데 ‘술이 무슨 문화재냐????집안 망신이다??며 아버님께서 반대하시는 바람에 탈락하고 말았다.” 이강주가 빚어지는 전주시 다가동 107번지, 조정형씨가 태어났고 지금 그의 부친이 기거하고 있는 2백년된 기와집에서 털어놓는 “술에 미친 사람의 지난 이야기”는 길어지고 있었다.

6대조 때부터 대물림된 ‘이강주??
 조정형씨는 전북대 농화학과를 나왔다. 대학에서 발효학을 전공했는데 졸업하자마자 지금은 없어진 목포 삼학소주에 스카우트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술인생??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술에 대한 감수성은 이미 유년시절부터 몸에 스며들었다. 6대조 때부터 이강주가 집안의 술로 대물림되어온 것이어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李宗八ㆍ80)잔등 너머로 이강주 향기를 맡으며 자랐다. 부친이 이강주를 특히 즐겼을 뿐 아니라 이 술맛을 잊지 못하는 문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단골 술손님 중에 한분이 그의 외숙인 가람 李秉岐 시인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나이에 공장장 역할을 맡은 그는 술 연구에 많은 열정을 기울였다. 그는 주조사 기술 1급 면허를 갖고 있다. 주류회사 연구실에서 좋은 소주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전통 술에 관한 자료를 뒤져보았더니 그 속에 원리가 다 들어 있었다. “향토주에 좋은 술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판단했다. “아무리 외국술을 모방하려고 해봤자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그는 “우리의 뿌리를 알지 못하는 한 우리 술의 발전은 불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소주회사에 몸담고 있던 78년부터 본격적인 향토주 답사에 나섰다. “어디에 향토주가 있다”는 소리만 들으면 일요일을 이용해 달려갔다. 회사일로 출장을 갈 때도 꼭 짬을 내 인근의 향토주를 찾아나서는 바람에 시말서도 몇 번 썼다. “회사에서 북극(개발주)으로 가라는데 나는 남극(향토주)으로 달려간 셈”이라며 그는 웃었다. 그 시절은 향토주나 민속주라는 말조차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밀주 금지시대??였다. 어렵사리 술예기를 주고받다가도 밀주단속요원이나 간첩으로 오인되기 일쑤였다.

 현지 주민들의 냉대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가족들의 몰이해였다. 그의 부친은 물론 부인(권희자씨ㆍ47)의 반대도 심했다. 틈만 나면 술을 찾아 집을 나서는가 하면 집에 들어올 때도 빈손으로 들어오는 법이 없었다. 소주고리 호로병 옛술잔 등 술과 관련된 골동품을 하나라도 사들고 왔다. 보너스는 모두 술 연구와 술과 관련된 골동품에 들어갔고 생활비도 제대로 집에 가져가지 못했으니 갖고 있던 집도 얼마 안가 팔아야 했다. “지금은 이렇게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한때 연탄을 피워놓고 자살을 기도할 만큼 어려움이 많았다”고 조씨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전주 다가동 이강주 제조장 한 켠 창고에는 그가 지난 십수년 동안 전국을 헤매며 빚은 향토주 2백여 가지와 술과 관련된 골동품 70여 가지가 보관돼 있다. 각각의 술병에는 산지와 제조법 특징 등이 꼼꼼하게 기록돼 있다. 이 술과 골동품들은 옛 문헌과 현지 취재와 더불어 이번에 펴낸 책《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의 중요한 기초 자료가 되었는데, 앞으로 일반에 공개할 참이다. 이 술과 골동품들은 그가 평생의 꿈으로 품고 있는 ‘주류전시관??에 들어갈 예정이다. “지금 외국 술 수입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라”고 따갑게 꼬집는 그는 “우리나라의 내노라 하는 주류회사들이 향토주와 관련된 연구서적이나 주류박물관에 대한 투자는 왜 안하는지 모르겠다”고 반문한다.

일제가 ‘우리의 술??맥 끊어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은 조정형씨의 그와 같은 십수년 세월이 담겨 있는 책이다. 흔히 ‘발로 쓴 책??이란 말이 있거니와, 이 책은 지은이의 지식이라기보다는 지은이의 열정을 담아낸 것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뉘는데 1부에서는 우리나라 및 동서양 술의 유래를 개괄하고 2부에서는 중부 호남 영남 제주 지방의 향토주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70쪽 보조기사 참조). 각각의 술에 얽힌 문헌 자료와 민담, 술 지도를 소개하고 만드는 법과 특징 등을 일일이 달아놓았다. 이 부문이 ??다시 찾아야 할 우리의 술??인 것이다. 3부는 실용적으로 꾸몄다. “흔히 비싼 재료에 담근 술이 좋은 술이라는 인식은 잘못된 것”이라는 조씨는 집에서 누구나 담글 수 있는 술 1백가지를 일러주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 옛 술이 매우 우수했다”고 말한다. 중국의 명부 마오타이나 죽엽청주 등은 현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우리 술을 따라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중국은 송대 이후 나라에서 술제조를 관리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고려 때부터 개인이 술을 만들어 팔 수 있었기 때문에 지방마다 집집마다 술 제조기법이 달라 다양했고 자연스런 경쟁이 일어나 양조술이 발전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우리 술을 중국이 인정한 것은 우리의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해석사》와 《지봉유설》에는 당나라의 시인 옥계생이 “한잔 신라주의 기운이 새벽 바람에 쉽게 사라질까 두렵구나”라고 읊었다. 당나라 문인들이 우리 술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죽력고ㆍ호산춘과 함께 3대 명주
 삼한시대 때부터 누룩을 빚어 술을 만들어 왔던 우리 선조들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우리 술을 발전시켜왔다. 서양술이 향기를 강조한 데 비해 우리 술은 “마신 뒤의 뒤끝”으로 좋은 술을 가렸다. 지역별로는 북쪽으로 갈수록 수수 조 따위로 빚는 도수 높은 소주를 만들었고 남쪽에서는 도수가 낮은 약주를 많이 담갔다. 그러나 일제가 총독부령으로 주세법을 공포하면서 우리 술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16년부터는 주류 단속이 강화돼 모든 술이 일본식 분류법인 약주 탁주 소주로 단순, 획일화되고 말았다. “해방과 더불어 우리 술은 기지개를 켜려고 했지만 전문지식인의 부재와 일제의 제도와 기술을 답습한 결과, 우리 술은 80년대까지 묻혀 있어야 했다”고 조씨는 말한다.

 그가 만들고 있는 이강주는 육당 최남선의 《조선문답》에 죽력고 호산춘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명주로 소개되어 있고, 이조 말 고종때 한미통상조약을 맺는 자리에서 이 술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술로 제공돼 참석자들을 매혹시켰다는 기록이 전해질 만큼 뛰어난 술이다.

 황해도와 전주 지역에서 빚어졌는데 누룩과 백미를 원료로 해서 약주를 만든 뒤 이 술로 토종 소주를 내리고 여기에 배 생강 울금 계피 침출액을 넣고 꿀을 가미, 두 번 걸러서 맑게 내린다. 생강과 계피는 건위 효과를 내며, 배는 청량한 맛과 마신 뒤의 갈증을 없애주는 한편 한약재인 울금은 몸의 기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조씨는 “이강주의 묘미는 옛날 진상품이던 울금에 있다”고 밝힌다.

미국에서 수입 요청 들어와
 지난 7월부터 일반에 선보였는데 현재는 하루에 750㎖들이 90병밖에 생산하지 못하고 있지만 내년 구정 안으로 공장을 확보, 하루 4백병을 만들어낼 예정이다. 미국 수출길도 곧 열릴 것 같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주문이 들어와 있고 현재 미국 당국(FDA)의 허가 절차를 밟고 있다. 그러나 그는 “기업에의 욕심은 없다. 다만 수출이 된다면 전력을 기울여 세계적인 술로 만들어나가겠다”고 말했다.

 그는 “술빚기는 예술”이라고 말한다. “남들은 괴롭고 착잡할 때 교회를 찾거나 술을 마시며 풀지만 나는 술을 빚는다. 술을 빚으면 정신이 맑아진다”는 ‘술에 미친 사람??조정형씨는 지난 시절의 한과 설움에서 이젠 어느만큼 벗어나 있다. 그토록 반대하던 부친, 아들로부터 “노래하고 춤추고 시쓰는 사람들만 문화재고 조상의 얼과 정성이 깃든 술을 빚는 것은 왜 문화재가 아닙니까”라는 ??항의??를 받던 조병희씨가 손수 이강주를 담는 백자술병에 글씨를 써주었다. 아들을 인정한 것이리라. 집안도 안정을 되찾았다.

 지난 10월3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리고 있는 농수산가공식품 전시회인 ‘제2녹색시대??(농수산부ㆍ한국방송공사 주최) 전라북도관에서 조씨와 부인 권희자씨가 만났다. 행사기간(10.24~11.2) 동안 이강주가 전시, 판매되고 있어서 권씨는 서울에 올라와 있었는데 마침 이날 한국식품과학회 주최로 전주 이강주에 대한 강연이 있어 전주에 있던 조씨가 상경한 것이다. 권씨는 “직장 생활을 잘 했으면 편했을 텐데 사서 고생을 하니까 반대했던 것”이라며 웃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