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벽 깨야 여성 해방”
  • 여운연 기획특집부 차장 ()
  • 승인 1991.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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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성단체연합 李?再 회장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이란 주제로 이달 18일부터 23일까지 서울서 열리게 될 세미나는 분단 이후 남북 여성대표들의 첫 만남의 자리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남북 여성들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날이야말로 통일의 첫 걸음이 될 것이란 주변의 기대도 적지 않다.

李?再(66) 한국여성단체연합(약칭‘여연??) 회장은 이번 세미나에 呂燕九 북한최고인민회의부의장 등 북측 여성대표를 초청한 우리측 여성대표 중의 한 사람이다. 작년초 이화여대 정년퇴임 이후 한국여성단체연합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이미 70년대부터 “분단문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우리 여성의 진정한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해온 한국 여성운동의 제1세대 이론가다.

 때문에 통일 분단 민주화 등 제반 사회문제와 여성운동을 연결시켜온 그가 이번 남북 여성교류의 주역을 맡게 된 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로 비쳐지고 있다.

지난 5월 도쿄에서 일본측 초청으로 남북 여성대표들이 한 차례 만난적이 있지만 이번 서울에서의 만남은 더욱 뜻깊다고 생각합니다. 정작 양측이 만나게 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고, 아직까지도 과연 성사될 수 있을는지 안심할 수 없는 상태인 것 같은데요.
만나는 절차가 워낙 복잡해 오히려 이제부터 아흔아홉 아리랑고개를 넘어야겠구나 싶군요. 우선 이번 서울세미나를 우리가 주최하게 된 배경부터 설명돼야겠지요. 이러한 만남이 왜 처음부터 범여성적으로 되지 않고 李愚貞(민주당 최고의원) 尹貞玉(정신대 문제 대책협의회장) 선생과 저 세 사람만 참여하게 됐나 하는 질문도 받았었구요. 지난 5월 일본의 여성단체들이 주최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세미나에 남북 여성들이 초청돼 거기서 만나게 됐습니다. 아시아의 평화가 한반도의 평화통일 없이는 이룩될 수 없고, 우리의 분단이 일본의 식민지 연장으로 지속됐다는 일본측의 사죄가 있었고, 결국 이러한 국제적 모임을 한 번으로 끝낼 수 없으며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하기까지는 국제적 관심과 연대가 필요하고, 여성의 만남을 서울과 평양에서 오가며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일본에서 같이 의논하고 계획한 것이지요. 돌아와 정부측과 협의한 결과 민간교류를 적극 지원한다는 입장에서 허락을 받았기 때문에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민간 차원의 접촉은 제3국을 통해야 한다고 해서 일본을 통해 초청하고 회답을 받는 데까지 한달보름이나 걸렸습니다. 물론 일본대표도 공식초청케 되고, 지난번 세미나에 참석했던 민단과 조총련계 재일교포들도 오게 될 것 같아요. 그러나 워낙 준비기간이 짧아 세미나 자체에 큰 기대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의미를 생각한다면 분단 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남북 여성들이 만나는 기회이고, 앞으로 교류할 수 있는 첫 계기이기 때문에 북쪽 분들이 와 ??만나서 반갑구나?? 
‘동족의 자매구나??하는 것을 진정 마음으로 느끼고 ??다시 보고 싶다????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끔 해주는 데 우리의 정성과 모든 뜻이 쏠려야 된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많은 민간료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여성들이 만나 얘기를 나눈다면 통일의 장애물을 훨씬 빨리 걷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지난번 도쿄에서 바로 그것을 우리가 체험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계획하고 같이 앉아 스케줄을 짰어요. 그때 서로가 “남북회담을 우리가 하자. 그러면 당장 통일을 이룩할텐데 왜 저렇게 복잡한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만난 김에 서울세미나를 계획하자고 했는데 그렇게 쉽게 되더군요. 우리쪽 세 사람과 북쪽의 여연구 선생과는 같은 세대예요. 옛날 동창들이 만난 입장이어서 더 친밀감을 가졌는데, 분단세대인 북쪽의 나머지 두 사람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측 명단을 보니 미국 유학을 한 대학교수 출신들이라 자기들은 남쪽의 넉넉한 계급의 딸로 어떤 선입감을 가졌다는 거죠. 그런데 만나 함께 지내고 보니 선배 같고 선생님 같고 민족적으로 마음이 통할 수 있어 좋다고 하더군요. 결국은 자꾸 만나야 한다 싶어요.

여연구씨는 윤정옥씨와 함께 이화여대 동기 아닙니까?
우리 셋이 해방 후 이화여대 문과 1회 입학생입니다. 그때 여연구씨가 우리 과에 입학했다는 건 알았어요. 윤정옥씨와는 그때부터 친했는데, 여연구 선생은 당시 좌익학생운동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던 것 같았어요. 우리는 공부나 하고 정치는 모른다는 입장이었으니까 별로 가까이 지낼 처지는 못됐습니다.

북한의 최고위직 여성인 여연구씨는 夢陽 呂運亨의 딸로 남한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만나보니 그의 인상이 어떻습니까?
아버님을 닮아 훤출한 키에 용모도 훤하고, 지도급 인사로서 위엄도 있고 그야말로 멋있는 여성이더군요. 이번에 경력을 보니까 45년 9월에 이화여대에 들어갔다가 46년 월북해 김일성대학을 다니다가 49년에 영동생과 함께 모스크바 유학을 간 걸로 돼 있어요. 듣기로는 그 여동생이 지금 문교차관급 지위에 있다 하고 인물이 더 좋다고 하던데요.

선생님께서는 70년대부터 끊임없이 통일문제를 제시해오셨는데. 특히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있어 우리나라는 통일을 빼놓고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선생님의 입장에선 이번 만남이 새삼스러운 게 아니라 ‘염원??을 이루게 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셈이지요. 우리 여성들은 민족의 수난사 속에서 몇중의 희생을 강요당하면서 삶을 이어왔습니다. 크게는 국가의 경제생산, 노동력 기여에서부터 어머니ㆍ아내로서 가정을 돌보고, 민족의 다음 세대를 낳아 기르는 역할을 해온 게 우리 여성들이지요. 그런데 이 시대에 와서 남녀평등이라든지 여성의 인간화를 추구하는 입장에서 여성이 주체적 삶을 산다는 것이 무엇이냐, 결국은 우리의 현실구조를 파악해보면 단순한 가부장제에서 오는 성차별의 뿌리깊은 문화전통이 분단시대에 와서 민주화라는 시대적 요청에도 불구하고 더 심화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를 분단구조 유지와 관련해 이해할 때 결국 이런 보수적인 이데올로기와 사회풍토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에서도 차별당하는 조건이 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경제성장을 했다면 특히 민중 여성들의 삶은 그에 따른 복지혜택을 고루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 아닙니까. 왜 국가가 복지정책을 과감하게 펴서 여성들의 삶을 더 안정되게 해줄 수 없느냐, 바로 분단구조 유지를 위한 군사적 대결을 위해 국방에 비용이 쏠리는 데서 여성들의 희생이 계속 강요당하고 있는 거지요. 우리와 비슷한 자본주의 제3세계국가의 국방비와 복지예산을 비교해보면 우리와 엄청나게 차이가 납니다. 교육ㆍ복지 예산은 우리보다 몇배가 높습니다. 이런 게 바로 분단구조와 여성의 희생적 삶이 연결됐다는 구체적 현상이지요.

남한여성들이 북한여성에 비해 사회적 지위, 정치참여 등 뒤떨어진 부문이 많은 것으로 지적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용평등법 가족법 개정이 최근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북한은 이미 46년에 남녀평등법이 제정되면서 가족의 가부장제 청산, 정치ㆍ경제 측면에서의 평등은 이미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또 사회주의 국가로서 여성의 경제적 활동을 뒷받침하는 탁아 모자보건 교육 등을 자기들이 이념적으로 주장하는 평등과 연결시켜 정책을 일관되게 펴나간 것 같아요. 그러나 사회주의 국가의 현실을 보고 알듯이 북한도 기본적으로 경제적 생산수준이 낮고 소비경제 생활수준이 훨씬 낮기 때문에 실생활에서 가사 노동의 해방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북한 여성들과 만나 얘기해보면 제도적으로는 자랑을 많이 해요.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그들을 만났을 때 또다른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하나하나 싸워 얻어냈다, 입법 후 정책적으로 실현시키고 복지제도까지도 싸우면서 쟁취하고 있다는데 의미를 느끼는 거지요. 우리는 시장경제를 통해서 가사부담을 덜어주는 생활도구가 많이 공급돼 경제적으로 많은 혜택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번 일본서 만난 정명순씨가 그러더군요. “우리는 부러울 것이 없다고 자부하지만 그것은 미국이나 일본 등 바깥 자본주의 사회를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까지나 자립경제로 6ㆍ25 이후 폐허 속에서 이 정도라도 기본생활을 이룩한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설명하더군요. 어렵더라도 자기네들이 나누어 먹고 산다, 여기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은 강단에 있을 때도 학문과 현실을 접목시키는 활동을 계속해 오셨는데 어떻게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식민지시대부터 우리 집안은 가정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어요. 아버님이 목사였는데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해 집안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신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집안에서 아버님은 민족문제에 대해서 노상 기도를 하셨어요. 그러다보니 어려서부터 은연중에 공부를 많이해 민족을 깨우치는 일을 해야겠다는 단순한 마음이 박히게 됐지요. 해방 후 기회가 닿아 미국유학을 갔는데 거기서도 온 민족의 명예를 내 등에 진 것처럼 심각한 학생으로 지냈지요. 그러다 6ㆍ25가 터져 전쟁의 처참한 모습을 미국에서 보면서 민족문제가 떠나지 않더군요. 57년 돌아오는 배에서 이제 조국에 돌아가면 어떤 상황에 처하든 일체 불평하지 않으리라 각오했습니다. 그러다 58년 3월에 고황경 선생님과 함께 이화여대에서 사회학과를 시작했어요. 한국사회 연구를 하면서 여성의 삶과 연관된 가족연구를 하게 됐지요. 60년대 들어 경제성장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나가는 과정에서 여성단체나 학생들에게 지역사회를 위해 새로운 사회참여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별로 반응이 없었습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여성의 해??니 여성운동이 세계적으로 번져나가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동일방직사건 등이 터져 여성 노동문제가 심각하게 대두됐어요. 그때부터 내 이론이 너무 단순했다는 자책과 함께 민주화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중산층 여성들의 지역사회 역할보다 훨씬 처절한 여성 노동문제에 눈을 돌리게 됐습니다. 70년대 후반에 <분단시대의 사회학>이란 논문을 쓰기도 하고 ??분단구조와 여성??이란 데 관심을 갖고 학생들의 의식을 깨우치려고 했는데 그때에도 별로 호응이 없었어요. 그러다 80년대 들어 모든 게 달라졌지요.

신념이 너무 뚜렷해서인지 때때로 급진적 학자로 비쳐지기도 하지 않았습니까?
가끔 급진적이라느니 위험하다느니 얘기를 하는가 봐요. 저는 정통 마르크시스트도 아니고, 공산주의자도 아니고 단순히 내 소신에서 하는 거니까 개의치 않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윤정옥 선생이나 박순경 선생 등 세 사람이 이화여대 동기로서 독신자예요. 국문과 이남덕 선생과 함께 주말에 산에 잘 갔는데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우리는 언제나 ‘평화통일??을 외쳤어요. 자식이 있거나 가정이 있는 게 아니니 만나면 노상 나라걱정을 했습니다. 통일신학을 연구하는 박순경 선생은 현재 구속된 상태고, 80년대부터 윤선생은 정신대문제를 연구하다보니 자연히 우리가 민족운동에 마음이 가게 된 거지요.

해방 이후 생겨난 많은 여성단체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지금까지 여성계의 주류를 이루어왔습니다. 뒤늦게 태어난 진보적 여성단체들의 연합체인 ‘여연??이 구심점이 돼 뜻을 펼치기에는 재정적으로나 인력면에서 어렵지 않습니까?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이미 여성단체들은 좌우익으로 나뉘어졌고, 6ㆍ25 후 자연 우익단체만 남아 60~70년대를 통해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고 재정지원을 받아왔지요. 그러다 70년대부터 여대생들의 학생운동이 시작되고 여성 노동문제가 첨예해졌지요. 여성단체 주류쪽에서는 범여성적으로 가족법개정운동을 펼치긴 했으나 70년대 후반에 오면서 젊은층들로부터 왜 더 적극적으로 여성의 입장을 대변해 관철시키지 못하는가 비판받기 시작했습니다. 정부와 협조하고 타협하는 소위 비주체적 입장이다 보니까 가족법개정운동도 과감하게 밀고나가지 못했던 거지요. 70년대 후반 이화여대 학생운동 출신들이 지금‘여연??의 주요 멤버들이 돼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사실 젊은 여성들 사이에 여성문제에 대한 의식이 이만큼이라도 고조된 것은 ??여성학??이 상당한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여성학을 한 젊은 세대는 여성 노동문제라든지 여성지위를 향상시키는 제도개혁에 기성단체들이 좀더 철저하게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고 이끌어나가지 못한다고 본 거지요. 중산층 여성 중심으로 너무 안일하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데 우리 사회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노동운동 자체를 급진적으로 보지 않습니까. 70~80년대만 해도 불순세력이다, 급진적이다 했지만 따지고 보면 이게 바로 자유민주사회 아닙니까.

실제로 많은 여성들은 여성운동가들의 움직임과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을텐데 선구적 여성운동가의 한 사람으로서 이를 어떻게 설명해주시겠습니까?
민주화운동과 함께 일선에서 여성운동이 적극적으로 변혁을 요구하는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일반 여성들이 ‘위험하다, 급진적이다, 사회주의 혁명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하고 오해해서 그런데 사실 그렇지 않거든요. 노동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다보니 자녀교육ㆍ소비자ㆍ부부문제 등이 주요 관심사인 일반여성들이 괴리감을 가졌을 것이라고 봅니다. 앞으로의 여성운동은 선도적인 활동가 중심의 여성운동이 돼서는 안되고, 결국은 각 계층 여성들이 각자 처한 입장에서 일상생활을 통해 변화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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