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민족대회 남한측 영접대표 金希宣씨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08.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성은 통일의 어머니”

하얀 모시한복 차림의 여인이 운다. 터져나오는 울음을 가누지 못하다 아스팔트 바닥 위에 주저 앉는다. 역시 한복 차림의 남자 둘이서 부축하지만 그녀는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런 장면을 텔레비젼 카메라가 쫓는다. 지난달 26일, 판문점의 남북통로에서 빚어진 이 한낮의 통곡장면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범민족대회 제2차예비회담의 남한측 영접대표로 출영했던 金希宣(47세)씨. 수더분한 ‘이웃집 아줌마’의 얼굴로 ‘어느 여름 갑자기’ 전국적 인물이 된 그녀는 누구인가. 분단 45년의 아픔이 유달리 되씹히는 올 8·15를 목전에 두고 그녀를 만나러 과천의 남태령 전원마을을 찾았다. 동네일을 도맡아 처리하던 ‘오지랍 넓지만’ 평범했던 한 가정주부가 ‘여성현실’에 눈뜬 데 이어 마침내는 ‘통일문제’에까지 끼어들게 된 과정을 들어보기 위해서다.

 

● 북측대표를 영접하러 나간 그날 왜 그리 서럽게 울었습니까.

 새벽에 판문점으로 출발해 8시간이나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긴 진통이 있었지만 3시10분경 우리 추진본부측이 정부안에 동의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성사될 줄 알았지요. 그런데 통일원 관계자가 와서 하는 말이 “이젠 지엽적인 문제가 하나 걸린다”며 “북한측은 안내차량에 영접대표들이 꼭 타야 한다고 하는데 당국으로선 허락할 수 없다”는 거예요. 한 문제 풀리면 또 한 문제 나타나고…, 이젠 틀렸구나 싶데요. 바로 벽 하나만 넘으면 북한대표들이 와 있는데 얼굴도 못 보고 돌아가야 하는 안타까움에 저절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7천만 국민들이 우리를 다 지켜보고 그렇듯 기대를 걸었는데, 46년만의 첫 민간교류를 기대하는 이산가족들의 얼굴을 어찌 봐야 하나… 가슴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어요. 당국이 내주는 차를  거부하고 초소까지 3백m 길을 마냥 울며 걸었어요. 초소에 이르자 20여명의 군인들이 여기부터는 민간인들이 걸어내려 갈 수 없다며 가로막더군요.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그냥 주저앉아 노상예배를 보며 버티었어요. 결국은 강제로 차에 실리다시피 해서 회담장소인 아카데미 하우스로 돌아오니 새벽 2시40분… 어찌나 시달렸는지 한복이 다 엉망으로 구겨지고…

● 도라지꽃을 수놓은 그 모시한복이 참 곱던데. 평소 털털한 옷차림인 걸로 알고 있는데, 판문점행을 위해 부러 마련하신 건가요?

 그게 사연이 있는 옷이예요. 주위에서들 영접단장인 한복을 입는 게 좋겠다고 하는데 제가 어디 나들이 한복 한벌 변변히 있나요. 하는 수 없이 25일 새벽에야 전민련 사무실 근처 한복집을 찾아가 급행료를 드릴 터이니 하룻만에 지어달라고 부탁했지요. 다음날 옷을 찾으러 갔더니 한복점 주인이 그 전날 텔레비전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이북대표들 맞으러 나갈 한복인 걸 알았다며 5명이 달라들어 한복을 지었다는 거예요. 어려운 수까지 놓고, 부탁도 안 드린 속옷에 노리개까지 일습으로 딱 갖춰놓고 절대로 돈을 안받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대신 그동안의 한이나 풀게 일을 잘 성사시키라고 신신당부하더군요.

● 그런 국민들의 기대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추진본부측이 지엽적인 문제에 연연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예비회담 전날 통일원 방문 때까지만 해도 관계자들은 정부는 회담을 허락하고 지지하는 선에 그칠 것이며, 요청이 있는 경우에 한해 행정·재정지원을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놓고 다음날 아침 회담장소 변경 등 중요한 문제를 일방적으로 결정해버린 겁니다. 저희들은 어쨌든 회담을 성사키려는 마음에서 정부안을 수용한다고 결정했어요. 그러나 이번엔 또 안내문제가 남았다고 하더군요. 두루마기 벗으라니 두루마기를 벗고, 웃옷을 벗으라니 또 웃옷을 벗으면 다시 속옷까지 벗으라는 거예요. 사실 저희 추진본부측은 회담을 실현시켜야 한다는 초조함 때문에 지나치게 원칙을 못 지켰다 할 정도로 굴욕적인 양보를 했습니다.

● 아무리 민간교류라고 해도 정부의 주도하에 이뤄져야 한다는 게 당국 입장인데요.

 저희들도 남북교류의 창구단일화를 부인하는 건 아닙니다. 범민족대회도 당국의 허가와 도움이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46년간 남북한 당국의 손에만 맡겨놓은 결과가 어땠습니까. 남북한 당국이 정권안보를 위해 오히려 분단 상황을 이용해온 측면이 많았고, 통일을 향한 실질적인 진전도 보지 못했잖아요. 그래서 남북한 민중들이 우선 만나기라도 해서 물꼬를 트자고 나선 게 범민족대회입니다. 동서독도 20여년간의 민간교류 끝에 결국 통일을 이뤘어요. 하지만 당국이 민간끼리의 교류에 “여기서 밥먹어라, 저기 가서 누구 안내 받아라”는 간섭까지 하진 않았잖습니까. 주최측이 누구인지 모를 정도의 지나친 간섭은 창구단일화를 넘어서 민간교류의 의의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지요. (지난호《시사저널》 인터뷰에서 金學俊대통령보좌역이 창구단일화의 근거로 동서독의 예를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김대표가 민간교류의 독자성을 인정해야 하는 근거로 동서독의 예를 들고 있다.)

● 재야측이 지나치게 환상적인 교류·통일론을 가진 건 아닌지요. 예를 들어 어떤 형태의 통일이건 善이라는 식의….

 우리도 남북교류와 통일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리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군축문제, 남북한 경제구조의 차이, 이산가족이 다시 만날 경우 그 결합방식, 오랜 분단의 세월 동안 이질화된 문제 등 해결이 어려운 많은 문제들이 있다는 데 공감합니다. 그러나 이 많은 문제들을 풀기 위해선 우선 만나는 게 시작이 아닙니까. 군축문제 등만 하더라도 민간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양쪽 당국에 압력을 가할 수도 있지요.

● 2차예비회담이 무산된 책임은 그날 아침 8개항에 합의해놓고 돌연 태도를 바꾼 북한측에도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 추진본부측은 왜 남한당국만 비난하고 있습니까?

 판문점 ‘영접의 집’에 꼼짝없이 갇혀 있던 영접단과 임진각에서 대기하던 예비회담 실무자들 어느 누구도 북한측 대표들과 직접 접촉하지 못한 채, 모든 일을 남북한 담당관의 간접연락에 의존했어요. 북측 대표들이 8개항에 과연 합의를 한 것인지, 철수하기 전에 우리가 장소문제를 양보한 사실을 정확히 통보받았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당국이 우리에게 판단의 자료를 제시해주었더라면, 우리도 정확히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겠지요.

● 이번 회담을 주관하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이 친북성향을 가진 단체라는 주장과 함께 그 ‘대표성’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는데요.

 전민련은 이 나라 민족민주운동을 위해 싸워온 단체입니다. 전민련이 친북단체라면 당국이 애초에 회담 허가를 했겠습니까. 또 언론들이 남한측 추진본부를 자꾸 전민련으로 쓰는데 이게 문제입니다. 남한측 추진본부에는 전민련 외에도 홍사단, 대승불교회, 언노련 등 다양한 성격의 단체가 함께 참여하고 있어요. 저는 친북성향 운운하는 분들께 이렇게 반문하고 싶습니다. 이런 단체들이 과연 친북단체인가 하고요.

● 2차예비회담의 걸림돌이 장소·절차문제였다면, 3차에선 58개 사회단체의 참여가 걸림돌이 됐습니다. 진정한 범민족대회라면 참가를 원하는 모든 단체를 망라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범민족대회는 지난 2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고, 감옥에 가고, 온갖 고초를 겪은 끝에 겨우 차리게 된 밥상입니다. 이 과정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밥상에 앉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러나 이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 최소한의 태도표명은 필요한 게 아닐까요. 저희들이 요구하는 건 7·4공동성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소위 58개 단체의 존재를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회담참가를 결정한 회의록을 첨부해달라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에 상응하는 대답은 안하고 무조건 남한측 회담대표 6명 중 4명의 자리를 내놓으라는 건 상식선을 벗어난 태도입니다.

● 지리멸렬한 예비회담 과정이 ‘혹시나 했더니 역시‘식으로, 결국 국민의 좌절감만 불러일으킨 건 아닐까요?

 그건 당국과 언론이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다루어 국민의 좌절감을 부채질했기 때문입니다. 범민족대회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이번 일을 계기로 그동안 용공·좌경으로 매도되어온 재야운동권이 얼마나 민족문제에 건강한 관심을 가져왔는가가 인식됐다고 봅니다. 게다가 20~30년씩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던 분들이 해외대표단으로 고국땅을 밟고 남한국민의 뜨거운 통일열망을 확인하게 된 것도 큰 성과라고 봅니다.

● 개인적인 문제로 화제를 바꾸지요. 여성운동가로 알려져 있는데 통일과 여성문제는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흔히 여성문제는 가부장적 의식구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들 하지요. 그러나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분단모순에서 기인한 것처럼 여성문제도 분단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자연히 여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궁극적으로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또 여성들은 근본적으로 평화지향적이고 모든 갈등을 수용할 줄 아는 포용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북한 여성들이 ‘민족의 어머니’라는 입장으로 만나 통일문제를 푸는 데 참여해야 하는 이유가 이렇게 많아요(웃음).

● 30대 초반까지 ‘순수한’ 가정주부였던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사회운동에 뛰어들게 되셨나요?

 살림만 할 때에도 주위사람들이 오지랍이 넓다고들 했지요(웃음). 67년에 한국전력에 다니는 남편과 결혼해 시부모님 모시고 주변환경이 엉망인 미아리 산동네에 꽤 오랫동안 살았더랬어요. 마침 아버님이 5통 통장님이셨는데 제 성격도 그래서 동네에 애로사항이 있거나 궂은 일만 있으면 ‘통장집 며느리’를 찾아요. 그래서 동네 두통거리였던 쓰레기 수거, 분뇨수거 문제 등을 주민들과 힘을 합쳐 해결하곤 했는데, 당시는 못 깨달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지역사회운동 한 셈이지요. 그때에도 나 혼자만을 위한 삶이 아닌 무언가 보람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막연한 인식은 있었어요. 그 의식을 확실히 일깨워준 게 바로 76년 크리스챤 아카데미의 ‘여성중간집단교육’이었어요. 여성이 왜 이렇게 사는가,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이 무엇인가를 교육받고 마지막날 ‘아, 여성들의 문제를 같이 해결해나가는 데 평생을 바치리라’ 결심했어요. 물론 그때만 해도 민주화운동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지요.

● 좀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고졸의 가정주부 출신이란 점 때문에 엘리트들이 많은 여성운동계에서 한계를 느끼진 않았는지요?

 처음엔 주변의 시선도 있었지만, 제 자신 스스로 제약조건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실제 사회운동을 하다 보니 그게 결코 제약조건이 될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대학을 안 나와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들더군요. 어떤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천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추진하는 데에는 사회적 경험과 대중감각이 훨씬 필요하다는 걸 실감했지요. 예를 들어 여성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론이나 연구도 중요하지만, 우선 가부장적 사회풍토와 가족구조 속에서 부당하게 매맞고 고통받는 여성들의 고충을 듣고 도와주는 일부터 하자고 궁리해낸 게 ‘여성의 전화’였어요. 모든 사회운동은 근본적으로 사랑 없이는 안되는 일이거든요. 각박한 상황에 대처하다 보니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닌가’하는 자괴감이 들 때는 있지만, 학력이 부족해 문제를 느끼진 않습니다. (83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교육동기생들을 규합해 ‘여성의 전화’를 개설한 뒤 초대원장을 지냈다. 실제로 주위에서는 KBS시청료 납부 거부운동, 톰보이 불매운동, 25세 여성정년제 철폐운동 등 80년대 주요한 여성운동에서 그녀의 탁월한 대중적감각과 추진력이 문제접근·문제해결에 상당히 기여했다고들 한다.)

● 사랑이 운동의 바탕이라는 말씀인데요. 우리 민중민주운동권은 지나치게 ‘민중’만 편애하고 다른 계층은 미워하는 것 아닙니까?

 (웃음). 그런 오해를 자주 받지요. 우리 사회는 지금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여러 계층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다원화되어가는 추세인 것도 사실이예요. 운동권의 인식이나 운동방식도 이런 다양한 관계를 반영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하고, 또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부의 분배나 사회참여 과정에서 가장 억압받고 소외받는 계층이 있는 건 사실 아닙니까. 상대적이라곤 하지만 심각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우선 그쪽을 대변하고 관심을 갖게 되는 거지요. 다른 계층을 미워하는 건 결코 아닙니다.

● 현재 직함도 서울민주운동협의회 의장, 전민련 상임집행 위원 등 여러 가지입니다. 바깥 활동에 전념하다 보면 정작 집안에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지금은 세상을 떠나셨지만 18년간 모시던 시어머님이 워낙 사회활동의 열렬한 후원자여서 별 문제는 없었어요. 다만 남편은 제가 여성으로서 감당할 만한 조촐한 복지·봉사활동이나 하는 선까지만 기대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급기야 감옥까지 갔을 땐 “다신 면회를 안 온다”며 은근히 화를 내기도 하고 서로 갈등도 있었지요. 지금도 아내가 해주는 따뜻한 밥을 기대하는 소망을 완전히 버린 건 아니지만 “당신이 중요한 일을 하니까 그 상황에 맞춰 대처하겠다”고 하지요. 아이들(대학 다니는 딸과 아들이 있다)은 제가 워낙 학교공부만 하라고 들들 볶는 엄마가 못되어서 좋은 대학은 못갔지만 둘 다 굉장히 진취적이고 제 앞가림을 알아서 해요. 제 자녀교육이 과연 옳은 것인가 회의에 빠지다가도 “엄마, 우리들은 참 잘 자란 거예요”하고 말해줄 땐 마음이 놓여요. (그는 86년 수배중이던 장기표씨 은닉혐의로 구속돼 5개월간, 87년에는 구로구청 공정선거감시단으로 구로구청에서 농성하다 구속돼 6개월간 징역살이를 했다.)

 

 그는 요즈음 여성들이, ‘오지랍이 넓어’ 이웃의 아이들과 이웃일까지 제일처럼 여기던 전통적 품성을 잃어버린 채, 자기 가정·자기 자식만 이기적으로 사랑하는 걸 무엇보다도 안타깝게 여긴다. “제집 담을 아무리 높게 쌓아도 담 밖에 흘러넘치는 똥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순 없기에” 제자식을 위해서라도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그녀가 작게는 참교육운동에 참여하는 것에서부터 더 크게는 통일문제에 관심을 쏟는 일까지 모두 여성들의 일이라고 여기는 건 바로 그런 연유에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