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루즈는 아직도 ‘검은 구름'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1.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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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필드' 장본인 폴 포트, 최고민족평의회 참여…시아누크 앞날 불투명

 지난 11월4일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항에는 중국 국기인 오성홍기가 선연히 세겨진 보잉여객기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에어차이나 707기 내에는 21년 동안의 망명생활을 끝낸 시아누크공이 부인 모니크 여사와 함께 타고 있었다. 트랩을 내려 공손히 두손을 모은 시아누크공은 애써 눈물을 참은 채“고국에 돌아와서 기쁨을 감출 수 없다??며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고 외신은 전한다. 지난 79년 베트남군이 크리스마스를 기해 전격적으로 캄보디아를 침공하기 수일 전 서둘러 중국행 망명길에 올랐던 시아누크공으로서는 13년만의 환국이었다.

 한때 10대의 어린 국왕이 되어 캄보디아를 통치하던 그는 미국이 지원한 론 놀 장군의 쿠데타로 축출됐고, 1백만명 이상의 양민을 학살한 크메르 루주의 학정 아래에서 3년간 연금생활을 하는 등 고난을 겪었다. 이제 백발이 성성한 68세의 노인이 돼 고국에 돌아온 그는 소원대로 여생을 고국의 평화와 국민화합을 위해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시아누크공의 비극은 캄보디아를 식민 지배한 프랑스가 1941년 당시 18세인 그를 캄보디아의 군주로 추대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담당 총독 장 드쿠 원수는 캄보디아 왕실의 여러 후보 중에 정치보다는 말타기와 영화구경을 좋아하던 시아누크를 선택했다. 당시 파리 유학중인 그는 이미지가 신선한 것 외에 무엇보다 프랑스 정부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판단은 시아누크공이 1953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함으로써 완전히 빗나갔다.

 2차대전이 종반에 접어들던 1945년 3월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전역의 식민통치에 종지부를 찍자 이 틈을 타 시아누크공은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 대한 프랑스의 위임통치가 2차대전 종전 후에도 계속되자 시아누크공은 끈질긴 독립운동을 주도해 마침내 53년 11월9일 독립을 쟁취해냈다. 독립국 캄보디아는 1954년 제네바회담에서 베트남 라오스와 함께 중립국으로 선포됐다. 시아누크공은 이듬해 3월 왕위를 포기하고 세속적인 지도자로 변신해 정치일선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오랜 왕정으로 입헌군주국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시아누크공의 治世는 불안정했는데, 65년 미국이 자신을 권좌에서 몰아내려는‘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한 그가 對美관게를 단절함으로써 정국은 악화일로를 거듭했다. 미국과 관계를 단절한 시아누크공은 중국과 월맹쪽으로 급속히 기울었고 급기야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캄보디아 영토안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같은 일련의 사태는 우파, 특히 군부를 자극해 훗날 친미파 론 놀 장군에 의한 쿠데타의 원인을 제공했다. 특히 시아누크공은 베트남 전쟁 때 중립국인 캄보디아가 미국과 베트남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도록 애썼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같은 줄타기 외교가 워싱턴과 북경에 있는 시아누크 지지자들로 하여금 서로 등을 돌리게 만들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보고 있다.

 70년 3월 기어이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3개월의 요양차 70년 1월 파리로 출발했던 시아누크공은 론 놀 장군이 이끄는 일단의 우파에 의해 정권이 전복됐다는 소식을 모스크바에서 들었다.

 이후 시아누크공은 북경에 망명정부를 설립하고 캄보디아 내에‘캄보디아 민족 연합전선??을 구성해 본격적인 게릴라 투쟁을 벌였다. 그가 일시나마 악명 높은 크메르 루주에 가담한 것도 바로 이때다.

 그러나 75년 친미파 론 놀 정권을 무너뜨리고 집권한 크메르 루주의 폴포트 정권에게 시아누크공은 자신의 이름을 빌려줌으로써 이미지에 결정적 흠집을 냈다.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쇼비니스트인 폴 포트는 일단 시아누크를 명목상의 국가원수로 삼아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한 다음 무려 1백만명 이상의 양민을 학살함으로써 캄보디아를‘킬링 필드??로 만들었다. 바로 이 학살정권시대에 시아누크공은 잠시나마 하수인 노릇을 한 셈이다.

 그러나 폴 포트는 자신의 하수인역을 하던 시아누크공과 부인 모니크 여사를 3년 동안이나 가택연금하는 등 탄압을 가했다. 결국 베트남군이 79년 12월25일 캄보디아를 침공하기 수일 전에야 중국측의 주선으로 풀려났지만 시아누크공은 폴 포트 정권하에서 벌어진 끔직한‘피의 학살??에 대해 도의적 책임 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평화협정 체결의 최대 공로자는 시아누크
 79년 12월3일 동안의 억류생활에서 풀려난 시아누크공은 북경과 평양에 망명터를 정한 후 국제무대에서 캄보디아의 평화정착을 위해 끈질긴 외교노력을 펴왔다. 외교전문가들은 지난 수십년 간의 내전으로 반목이 극에 달한 캄보디아 4개 게릴라 피벌간에 평화협정이 이루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불퇴전의 용기와 카리스마적 이미지 덕분이라고 평하고 있다. 한 고위 서방외교관은“결국 오늘의 평화협정을 이룬 데는 시아누크공의 공이 크며 협상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은 단연 돋보였다??고 평가한다.

 시아누크공은 1922년 10월31일 노로돔 수라마리트 왕과 코사마크 네아리라트 왕비 사이에 태어난 호지명시(옛 사이공시)에서 교육을 받았고 한때 파리에서 유학생활도 했다. 이같은 교육 덕택에 시아누크공은 모국어인 크메르어(캄보디아어)는 몰론 영어와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다. 젊은 시절 스스로 바람둥이임을 털어놓기도 한 시아누크공이 현재 살고 있는 모니크 여사는 5번째 부인이다. 에나 지금이나 그는 스포츠카와 맛있는 포도주를 좋아하며 노래도 수준급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제 영욕의 창장년 시절을 뒤로 하고 백발의 노인으로 돌아온 시아누크공의 앞날은 결코 장미빛만은 아니다. 캄보디아 4개 정파와 미국 등 19개국이 지난 10월23일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맺긴 했어도 과연 이 협정만으로 진정한 평화가 정착될지는 누구도 점칠 수 없다. 특히 4개 정파 중‘킬링 필드??의 장본인인 폴 포트가 이끄는 코메르 루주도 최고민족평의회(SNC)에 참여한다는 점은 캄보디아의 앞날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베트남은 호랑이, 크메르 루주는 악어??
 폴 포트 정권에 의해 자신의 가족 12명을 잃은 시아누크공은 크메르 루주를“세계 역사상 가장 잔인하며 비인간적 학살집단??이라고 극언을 퍼부었으나, 정작 지난 82년 크메르 루주와 손잡고 망명연정의 구성에 합의했다. 폴 포트가 밉지만 베트남의 꼭두각시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현실적으로 최대 게릴라조직인 크메르 루주의 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젠가 시아누크공은 한 인터뷰에서 베트남을 악어로, 크메르 루주를 호랑이로 비유하고??악어와 호랑이의 싸움이 벌어진다면 나는 호랑이편을 들겠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대답이 걸작인 게??물론 호랑이도 사람을 잡아먹지만  그래도 그것은 캄보디아산이 아니냐??라는 것이다.

 전 왕들과 달리 일관성이 없고 신중치 못하다는 평가 때문에“데려온 公子??라는 오명을 얻었지만 그는 13년 간의 내전으로 황폐화된 캄보디아를 재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카리스마적 이미지만으로 13년 동안의 내전으로 피폐할대로 피폐한 캄보디아를 재건할 수 있을지 아직은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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