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대사관 레이더 ‘정동파티'
  • 이흥환 기자 ()
  • 승인 1991.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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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인사 초청, 워싱턴 ‘입김' 전달… '공작'에서'분석'으로 변신

 서울 정동의 미대사관저에서는 이른바‘대사관 파티'라는 것이 수시로 열린다. 독립기념일 등 미 국경일이나 미국의 주요 인사가 한국에 왔을 때 그레그 주한 미대사가 국내 주요 인사들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마련되는 것이 '정동 파티'라고도 불리는 마대사관 파티이다. 국내의 행정부 고위관료, 원로 정치인, 여야 국회의원, 기업인, 교수, 경제계 인사 등 사회 저명인사가 초청 대상이고 초청받은 인사는 다른 약속을 깨더라도 이 파티에만은 꼭 참석한다.

 한달에 두번꼴로 이 파티에 참석한다는 민자당의 한 의원은“개방적인 식사 자리이긴 하지만 꽤 깊이 있는 얘기가 오간다"고 말한다. 파티는 사안에 따라 3~4시간 정도 진행되는 것이 관례다. 식사 전에 칵테일을 마시면서 30분 정도 여단을 주고받으며, 1시간 가량의 식사를 마치고나면 참석자끼리 한두 시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작은 정부'라고 일컬어지는 주한 미대사관이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고 24시간 움직인다는 현실을 감안할 때 이 파티에서 오가는 대화의 소재가 어떤 것인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서울 입장 워싱턴에 보고하는 ‘중재자'
 91년 말 한국은 정권교체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국내 정세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미국의 시각은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계파 갈등이나 민주당의 수권 여부 못지않은 관심거리다. 주한  미대사관을 통한 미국의 영향력은 관찰과 분석의 단계를 넘어‘입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과거 정권교체기 때마다 미국이 자의든 타의든 직간접으로 관련되었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서울 종로구 세종로의 미대사관은 비자를 발급해주는 곳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대사관은 아직도 국내정치를‘조정??이나??공작??의 대상으로 보는가. 89년 9월 미 중앙정보부(CIA) 출신 정보통인 그레그씨가 주한 미대사로 부임할 때 일부에서는 대뜸 이 문제를 거론했다. 지난 2년 동안 그레그 대사를 비롯해 미대사관 인사들과 자주 접촉해온 우리 정치인들은 미대사나 대사관의 역할이 과거와 견주어볼 때 많이 변했다고 지적한다. 특히 정치분야에서의 변화를 강조한다. 민자당 김영산 대표최고위원의 측근으로 미대사관 인사들과의 비교적 잦은 접촉을 하는 황병태 의원도 이 변화의  기류를 지적한다.??과거의 미대사는 국내정치를 공작 차원에서 파악한 면이 없지 않았다. 자기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방법에서 탈피해 대사관이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황의원이 말하는 메신저 역할이란 주한 미대사관이 나름대로 수집·분석한‘서울의 입장??을 워싱턴에 보고하는 이른바??중계자??로서의 기능이다. 미국의 국익에 관계되는 최종적인 판단은 워싱턴에 맡기는 형식이다. 미대사관이 직접 정세 판단을 하고 이해관계를 따져 독자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방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사의 역할도 집행자가 아닌 협조자로 바뀌게 마련이다. 대사는 업무의 특성에 따라‘직업대사??와??정치대사??로 구분된다. 과거 분단 독일의 주독일 미대사나 주한 미대사 등 미국의 이해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나라에 주재하는 미대사가 대표적인 정치대사라 할 수 있다. 정치대사는 미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으며 대부분이 미중앙정보국 출신이다. 드레그 주한 미대사나 전임자였던 릴리 주중국 미대사가 가장 상징적인 인물인데 이들이 전형적인??부시맨??으로 분류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YS든 DJ든 상관없다??
 그레그 대사와 접촉하고 있는 여야 정치인들은 그가 과도기의 대사 임무를 무리없이 수행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즉 과거의 주한미대사는 정치공작의‘장본인??으로 인식되었는데 이제는 그런 시각이 교정되어야 할 만큼 미대사의 역할이 바뀌어가고 있으며, 그러한 전환기의 대사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는 평이다.

 이와는 다른 의견도 있다. 미대사관 인사들과 자주 접촉하는 민주당의 한 인사는“미대사관이 6공화국 이전에는 국내정치에 직접 관여하였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대사관의 활동 방법이 바뀌었을 뿐 동북아 정세 변화와 남북 관계의 진전 등으로 미대사관이 과거보다 더 활발히 움직인다고 봐야 한다. 겉보기로는 조용하게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이전보다 훨씬 더 밀착해서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한다.

 미대사관은‘정치과??라는 부서를 가동시키고 있다. 정치참사관인 E.M.헨드릭슨 정치과 책임자이고 그 밑으로 E.클로스 등 1등?2등 서기관 3명이 일반 외교관과 직원을 지휘해 여당 야당 재야 노동계 종교계 등 각 분야별 동향을 늘 관찰하고 분석한다. 정치과 직원들이 항상 정계나 재계 언론계 재야 등의 국내 주요 인사들과 접촉함은 물론이다. 정치과야말로 경제 과학 문화 등 비정치적인 분야를 제외하고는 한국 내의 모든 문제를 총괄하는 셈이다. 최근에는 시장개방 등 경제 문제가 정치성을 띠게 됨으로써 정치과 직원들의 활동 범위가 더욱 넓어졌다.

 민자당에서는 당 차원의 공식 창구 외에 언론계 출신인 민정계의 남재희 의원과 미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인 민주계의 황병태 의원, 이종찬 의원 등리 미대사관 관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비공식 창구이다.

 여권 인사 중에는 이들 외에 김경원 전 주미대사도 미대사관저를 수시로 드나드는 손꼽히는 인물이며, 정와대에서는 김종휘 와교안보담당 보좌관이 주된 창구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시 미 버클리대 정치학 박사인 한승주 교수(고려대·정치외교학과)도 한·미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야당인 민주당도 미대사관측과 수시로 접촉한다. 미국 미시간데에서 저이학 박사 학위를 받고 미주리주립대 교수를 지낸 총일국제위원회 위원장 소순승 의원, 김대중 대표의 국제담당 특별보좌관인 최운상 박사, 김대표 비서실의 김대성 차장 등이 공식·비공식적인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조순승 의원은“대사관은 자국 이익의 대변자이다. 주한 미대사관이 한국 내의 정치 동향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민주당도 늘 미대사관과 접촉해 서로의 입장을 전달하고 파악한다. 야당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외당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민주당과 미대사관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실무자끼리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만나는 월례 모임의 자리를 가졌다. 대사관쪽에서는 공사와 정치찬사관, 과장급인 1등 서기관 등이 참석하고 민주당에서는 조의원 등 국제문제 관계자와 정책위원 등이 자리를 같이하곤 했다. 미대사관 정치과 일부 직원의 자리 이동으로 이 정기모임은 현재 중단상태이며, 별 다른 문제가 없는 한 곧 재개되리라는 것이 관계자들의 말이다.

정치과 직원들, 한국말 유창
 미대사관과 자주 접촉하는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볼 때 차기 대통령선거를 내다보는 미대사관측의 시각은 한마디로“어느 누가 되어도 좋다??는 태도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YS든 DJ든 상관없다??는 것이며??지금까지 대통령후보감으로 거론되는 사람들 개개인이 모두 장단점은 있지만 민주화로 가는 전반적인 방향은 꽤 낙관적??이라는 것이 미대사관의 대략적인 정치분석이다.

 또 집권여당의 계파간 갈등 등으로 국내정치가 골치 아픈 것은 사실이지만 결토 비관할 만한 사안이 아니라는 것도 미대사관에서 바라다보는 한국 정치의 현주소이다. 즉 과거 독재정권 아래에서는 대통령 개인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던 탓에 예측이 가능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앞날을 내다 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미국의‘전초기지??역할을 하는 주한 미대사관이 한국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는 점도 지적된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대사관의 정치과 직원들 대부분이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한다는 점이다. 5공화국 때만 해도 기껏해야 한 사람 정도가 한국말을 할 정도였는데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두 번째 변하는 미중앙정보국 한국지부나 미8군 정보기관에 두어졌던 미대사관 할동의 중신축이 대사관으로 이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내의 언론 보도가 미대사관 정치과 직원들의 가장 중요한 자료이자 정보원이 된 사실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변화 중의 하나다. 민자당의 한 의원은“정치과 직원들이 우리 정치인보다 신문을 많이 보는 것 같다. 보도 기사를 1차 정보로 삼는 것이다. 각 언론사별로 논설에서 가십기사까지 철저하게 분석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정치과 직원들은 외교관이기에 앞서 학자나 기자의 일을 하고 있는 셈이며, 정치과 직원들의 활동 폭이 넓어질수록 우리 정치인들도 과거처럼‘허튼 소리??를 할 수 없게 되었다. 미외교관들이 한국이라는 국가와 정부를 분리해서 보던 이중적 시각이 깨졌다는 점도 괄목할 만한 변화로 지적된다. 국가 안보 측면에서는 대한민국을 지지하되, 인권이나 민주화 문제에서는 비판하고 견제하던 이원적 사고방식이 이제는 일원화되었다는 것이다.

“주한 미대사는 동북아의 해결사??
 드레그 대사응 지난해 11월 미국의‘아시아 소사이어티??회의에 초대된 자리에서 경제 문제에 관련해 우리 정부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내용의 연설을 한 적이 있다. 언제부터 일본과 손을 잡고 미국에 등을 돌렸느냐고 청와대에 간접적으로 불만섞인 메시지를 전달했던 것이다. 지난 9월 말 노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서로 감정을 풀기는 했지만 그레그 대사의 이 연설은 한때 미대사관과 우리 정부 사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레그 대사는 치밀한 외교관으로서의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정보통으로 평가된다. 국내 인사들과의 교류 폭도 넓어 한국내에‘그레그 인맥??을 형성해놓았을 만큼 대인 관계에서도 1급 외교관다운 면모를 발휘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3당 합당 때는 환영한다는 입장을 표했고, 한 사석에서는 노대통령을 가리켜??한국 민주화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적격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주한 외교가에서는 미대사관이 한국의 미묘한 정치현실을 감안해 여야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민주당의 마포 당사 현판식 때 그레그 대사가 모습을 나타낸 것도 그러한 배려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민주당 관계자의 말대로“당 현판식이 그레그 대사가 직접 올 만큼 비중있는 행사는 아니었는 데도??그는 행사장에 나타나 김대중 대표와 악수를 나누었다. 시기적으로 김영삼 대표와 부시 미대통령이 만난 뒤였기 때문에 공정한??배려??를 의식한 그레그 대사의 정치적 나들이였다는 뒷말이 나돌만 했다.

 미대사관이 한국의 국내 정치현안만 분석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의 동북아시아정책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전략적 위치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졌다. 주한 미대사를 가리켜‘한국에서 일본과 중국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사람????동북아시아의 해결사??라고 지칭하는 것도 한국의 중요성을 대변하는 말이다.

 정권교체기를 앞둔 한국과 주한 미대사관. 주한 미대사관이 정권교체와 관련해 어느 정도영향력을 행사하리라고 보느냐는 물음에 민주당 김대중 대표의 한 측근 ㅎ씨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과거 집권당이 내정간섭을 자초하는 것은 아닌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집권여당이 선거에서 미국의 도움을 받으려는 발상부터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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