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쇄 회로' 속의 국사 교과서 개편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10.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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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진 안밝히고 일정 짧아 밀실담합.졸속 우려

새국사 교과서는 누가 어떻게 만들고 있는가. 오는 96년부터 5년간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사용할 국사교과서에는 지금까지 나온 어떤 국사 교과서보다 뜨거운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정 교과서로는 처음으로 현대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를 영입하여 집필의 표준이 되는 준거안(시안)을 마련하고자 했으나 학계에 미처 제출되기도 전에 토론 자료가 언론을 통해 공개되면서 우리 사회에 이념 논쟁의 불을 당긴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월중으로 예정된 교육부 준거안 최종 심의와 국사편찬위원회의 집필을 앞두고 교과서 개정 작업의 집필진 등 관계자가 비공개적으로 선정되었을 뿐 아니라 집필 절차와 일정이 불투명해 교과서 개정 작업이 밀실화하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난 3월 이후 국사 교과서 개정 문제가 이념 논쟁으로 비화함으로써 소모전이 빚어지는 바람에 교육부의 준거안 확정 일정과 심의 일정이 예정 기간을 훨씬 넘겨버려, 이번 교과서는 오히려 이전 교과서보다 졸속 제작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주진오 교수(상명여대.역사학)는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준거안을 보면 애초에 준거안연구위원회를 구성한 이유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없다. 급진사관을 배격하는 것은 좋으나 논의 과정조차 폐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학계는 교육부가 준거안 집필진과 심의진, 그리고 교과서 집필진과 교과서 초안을 공개해서 학계의 의견을 수렴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러나 준거안을 확정하고 심사는 교육부와 집필을 맡은 국사편찬위원회는 공개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 당초 조성되었던 국사 교과서 제작 공개화 여론에 역행한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심의진 명단 첫 입수 … 현대사 전공 1명뿐 
 교육부 辛永範 교육연구관은 “교과서를 집필하기 전에 학계의 권위자들로 연구위를 구성하여 교과서 개편 방향을 제시하려 한 것은 건국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교육부측으로서도 현행 교과서가 국가 이데올로기 기술서에 불과하다는 비난을 일소하려는 의욕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논의의 장이 마련되기도 전에 이념 논쟁으로 비화하고 말았다. 앞으로 남은 교과서 개정 작업이 장애에 부딪치지 않기 위해서 비밀리에 추진할 수 밖에 없다??고 응답하고 있다.

  그러나 〈시서저널〉이 입수한 심의위원 명단에 따르면, 위원 31명 중 현대사 전공자는 단 1명일 뿐 아니라 그나마 역사학 전공자가 아니라 정치학 전공자를 배치하고 있어, 구성의 객관성과 균형상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93쪽 표 참조).

  신연구관은 이 점에 대해 “근.현대쪽 안배에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번 국사 교과서 작업에 참여 하기를 꺼려 안배는커녕 진행하기조차 힘들다??라고 털어놓았다.

  지난 3월의 준거안 파동 이후 교육부의 최근 교육부 준거안을 확정해, 지난 9월2일 준거안심의위원회의 심의를 마쳤다. 당초 예정을 5개월이나 넘긴 셈이다. 교육부는 오는 10월 초 두 차례 더 심의를 거친 후 이 준거안을 국사편찬위원회에 보낸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준거안에 기초하여 새로 연구진과 집필진을 구성해 연말에는 교과서 초안이 완성된다. 이 일정대로라면 국사 교과서는 단 두달 만에 집필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주진오 교수는 “국정제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국사 교과서는 국민에게 역사를 인식시키는 유일무이한 교재이다. 그런 것을 이처럼 짧은 기간에 만들어낸다는 것은 무리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교육부가 최근 발표한 준거안은 당초 연구위원회의 근.현대사 부문 연구를 거의 백지화함으로써 ‘민족사를 주체적으로 통합하는 새 교과서??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준 셈이다. 학계에서 교과서 개편 작업을 공개하여 학계의 협조와 감시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대사 단원. ??질??뿐만 아니라 ??양??도 문제??
  그러나 학자들은 현행 국사 교과서의 문제가 근.현대사 서술에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가 하는 점뿐 아니라 ‘어느 만큼 정확하고 풍부한가 하는데 있다??고 입을 모은다(94쪽 상자 기사 참조).

  한영우 교수(서울대.역사학)는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처럼 내용.질.분량이 빈약한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전제하며, 대학생들 대부분이 “중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이 모두 엉터리일 뿐 아니라 ??속았다는 느낌까지 든다??는 불만을 갖고 있다??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근.현대사의 경우 역사를 다양하게 해석하고 기술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설뿐 아니라 이설까지 과감하게 수렴하고 소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현대사 단원의 분량이 너무 적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한영우 교수는 “3백년 역사밖에 안되는 미국도 국사 교과서가 ??목침덩이리??만한데 5천년 역사인 우리나라 국사책이 만화책 분량이라니 어처구니없다. 그만한 분량으로는 정치 줄거리 잡기에도 급급할 수 밖에 없다??라고 말한다.

  서중석 교수도 “다음 세대가 자기 사회를 폭넓게 성찰하고 통일이 방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교과서에 왜곡 기술된 내용을 바로 잡아야 할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지금 수준보다 크게 늘려야 한다??라고 강조한다.

  그는 준거안 파동 당시 일부 학자나 언론에 의해 현대사 용어 표기 문제가 지나치게 부각되어 정작 논의되어야 할 역사 교육 문제에는 근접도 하지 못한 점이 안타깝다고 말한다.

  일선 교사들 역시 “학교 교육에서 현대사교육은 공백 상태??라고 입을 모은다 아무도 가르치지 않고 아무도 배우지 않는 것이 근.현대사라는 것이다. 경동고 최병도 교사(국사 교과서 집필위원)는 ??교사들 자신부터 현대사 단락을 읽어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한다. ??광복 이후??는 대학 입시 문제로 출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과서 관련자들은 현행 국정제를 폐지하고 검정제로 전화하고자 주장한다.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 국사 교과서를 국정 교과서를 국정으로 못박아 두고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는 점도 검정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경쟁.통제 가능한 검인정제로 바꾸자??
  즉 교육부의 표준 시안은 두되 각 개인이나 연구단체가 집필한 교과서 가운데 5권 정도를 검인정으로 통과시켜 학교 재량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명우 교수는 지금처럼 국사편찬위원회가 진두 지휘하여 집필이 이루어지는 한 “국사 교과서는 변두리 학자들의 작품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르고 지적하며, 영어.수학 등 다른 2종 교과서처럼 경쟁과 통제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중석 교수는 “제7차 개정 교과서가 나오려면 또 5년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이라도 검인정으로 전환한다면 1~2년 내에 새로운 국사 교과서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현장 교육자는 물론 강단 사학자들은 지금 만들어지는 국사 교과서가 보다 투명한 제작 과정과 논의를 통해 ‘최선의 교과서??가 되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더 큰 희망은 이번 교과서가 ??마지막 국정 교과서??가 되는 것이다.

 金賢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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