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 쓸어내는 잠롱시장
  • 박순철 편집부국장 ()
  • 승인 1990.08.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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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 특파원 방콕 현지 취재 / 취임 후 ‘흙탕 市政’ 눈에 띄게 맑아져

8월의 방콕은 우기이다. 하루 한두차례 시원스럽게 소나기가 쏟아진다. 소나기는 1백만대의 차량에서 나온 매연으로 혼탁해진 공기를 가라앉힌다. 그러나 하루 한두차례의 소나기만으로는 6백만명의 상주인구와 2백만쯤 되는 뜨내기인구가 몰려사는 이대도시가 깨끗하게 씻겨지지는 않는다.

 휴무일인 토요일 오전 8시쯤 청소원 프라싯(37)씨는 수쿰빗 거리의 보도를 쓸고 있었다. 지나간 20년의 세월 동안 이 일을 해온 그는 1월의 방콕시장선거에서 현직시장인 잠롱씨를 다시 찍었다. 그는 잠롱 시장이 청소년들을 가끔 찾아와 격려해주며 없는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해주는 ‘친구같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시장님은 좋은 분이지만 규율은 엄격합니다. 건성으로 청소를 하지 말고 정성을 다해 깨끗한 거리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합니다”라고 말했다.

 

최고위직 부정공무원 엄단

 잠롱 스리무앙 시장. 그는 지난 85년 태국에서 처음 실시된 지방자치제선거에서 투표의 50% 가까이를 차지, 최초의 민선시장으로 당선되었다. 태국정부는 재정자립도를 감안하여 방콕과 휴양도시 파타야 등 두곳만 우선 지방자치제를 실시했다. 그후 잠롱 시장은 ‘나이사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깨끗한 남자’(Mr Clean)라는 뜻의 이 별명과 함께 그는 흔희 빗자루를 든 청소원의 모습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는 아침 출근 길에 쌀, 비누 등 생필품을 차에 싣고 가다가 만나는 청소원들에게 나누어주곤 한다. 방콕 시내를 쓸고 있는 5천명이상의 청소원들은 그가 자신들을 위해 보험기금을 만들어주고 사고를 당해 죽는 사람이 생기면 장례식에 찾아오는 ‘친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잠롱 시장은 방콕을 물리적으로만 깨끗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도시에 만연돼온 더러운 부패도 큰 빗자루로 썩썩 쓸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인기는 첫번째 임기 4년 동안에 더욱 치솟았다. 올해 1월 16명의 입후보자가 난립한 선거에서 그는 권력과 금력의 집중타를 받으면서도 투표의 62%를 얻어 압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겸손했다. “부정부패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부정을 좀 더 줄이는가이다”라고 밝혔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방콕시의 부정은 크게 줄어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처음 그가 시장에 취임했을 때는 조그만 민원사무 하나 처리하는 데도 뇌물이 오가지 않으면 일이 안됐다.  부정이 밝혀진 최고위직 시청 직업공무원을 단호히 징계위원회에 회부하는 등 부정부패에 대한 엄단을 내리면서 부패는 점차 사그러들었다.

 부패척결이 가능했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잠롱 시장이 청백리의 모범을 앞장서 보인데 있었다. 부인 시리락 여사는 이런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다. 85년 시장에 처음 취임하고 얼마 뒤였다. 방콕시는 거대한 예산을 움직이므로 은행들의 예금유치경쟁이 치열했다. 드디어 예금을 받게 된 어느 은행은 일종의 사례금 1천5백만바트라는 거액을 내놓았다.(1바트는 약 30원에 해당된다). 시예산은 어차피 어느 은행에 예금될 것이므로 반대급부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지만 잠롱 시장은 더러운 돈에 손대지 않았다.

 잠롱 시장은 부정한 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자기의 봉급마저도 모두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내놓고 있다는 것을 방콕시민들은 알고 있다. 그는 시장월급 2만4천바트와 수당 2만바트에 손도대지 않으며 이 돈은 시청경리직원에 의해 매달 자동적으로 자선단체에 보내진다(시리락 여사는 인터뷰에서 옛날 월급이 1만3천바트였다는 것만 알고 있다고 그뒤에 인상된 금액은 모르고 있었다).

 작고 마른 체구에 짧게 깎은 머리. 검푸른 농민복을 늘 걸치고 있는 잠롱 시장은 세상에 아무 근심걱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행복한 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는 자기 집이 없어 뜨내기처럼 이사를 다니며 지난 1월 이후에는 친구가 무료로 빌려준 집에서 살고 있다. 방콕시내의 다소 외곽에 치우친 파혼요틴 거리의 골목길에 그가 사는 집이 있다. 정원도 널찍한 양옥 2층의 큰 집이다. 여기에 사는 ‘식구’는 잠롱 부부를 포함해 모두 19명이나 된다. 잠롱 시장이 오래 전부터 관여해온 채식주의자 식당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12명이 이곳에서 식당음식을 준비하며 같이 살고 있다. 예비역 장성인 잠롱 시장이 받는 연금 월1만3천바트는 모두 이들의 생활비로 쓰이고 있다.

 이집 2층에 잠롱 시장 부부의 침실 겸 서재가 있다. 반들반들 윤이 나는 계단을 올라가 방에 들어서니 구석에 베니어로 만든 낡고 조잡한 옷장이 두개 놓여 있었다. 20년 이상 사용해온 것이라 했다. 잠롱 시장이 옷을 3벌밖에 안가지고 있다는 국내신문의 보도가 있었으므로 시리락 부인에게 옷장을 열어 보여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옷장 속에는 의외로 10여벌의 옷이 걸려 있었다. 얼마 전 잠롱 시장이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게 되자 사람들이 특별히 옷을 마련해 보내주었다는 설명이었다. 또 한쪽 구석에는 시장과 부인의 책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부인의 나무책상은 너무 작고 초라해 얼마나 오래됐느냐고 물었더니 중학생 때부터 사용해온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의 생활수준이 방콕시민 가운데 어느정도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시리락여사는 “중류 이하 또는 하류”라고 대답했다.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거리에는 벤츠를 비롯한 고급차가 꼬리를 물고, 수많은 백화점에 외제사치품이 그득한 방콕의 ‘과소비’는 서울을 능가한다. 그러나 이 대도시의 행정을 맡은 시장은 20여년 전의 가난한 삶을 그대로 살고 있었다.

 

절반은 스님. 계율 철저히 지켜

 잠롱은 어린 시절 혹독한 가난을 경험했다. 그가 한살 때 중국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행상과 하녀 등 온갖 험한 일을 했다. 어머니는 재혼했지만 형편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다. 잠롱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신발을 살 돈이 없어 맨발로 학교에 다녔다. 그의 집안사정을 몰랐던 선생들은 맨발로 다닌다고 그를 때렸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간 그는 적은 생도월급을 아껴 집에 송금했다. 그는 육사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순조롭게 승진가도를 달렸다. 79년에는 육군대령으로 신임 프렘 수상의 비서실장에 임명됐다. 당시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 심취, 독실한 신자가 됐다. 1년 뒤 신앙에 입각해 당시 추진되던 낙태법에 반대, 비서실장직을 사퇴했다. 85년 방콕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그는 육군소장으로 전역했다.

 그는 언젠가 태국여성법률가협회의 초청연설에서 자신의 정신적 변화과정을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초급장교였을 때 나는 매우 인색했고 재산이나 집에 대한 소유욕도 강했다. 나는 내집이 완벽하게 보이기를 원했다. 잔디도 완벽하게 깎아야 했다. 도둑이 스테레오 전축을 훔쳐갈까봐 걱정이 돼 집안에 도둑이 들어오면 발이 걸리게 전선을 쳐놓았다. 어느날 도둑이 몰래 들어왔다가 전선에 걸려 경보가 울리자 도망쳤다. 그후 몇주일 동안 도둑이 또 들까봐 아무도 마음놓고 잠들 수가 없었다. 한심한 생활이었다.” 잠롱은 불경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너무 많이 소유하고 재산에 욕심을 내는 것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큰 집을 팔고 잔디밭이 없는 훨씬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뒤로 잔디를 깎느라고 몇시간씩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다. 또 훔쳐갈 물건이 없어보여 두둑이 들지도 않았다.”

 11년 전부터 그는 8가지의 엄격한 계율을 지켜오고 있다. ‘절반은 스님’이라고 할 정도이다.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지키는 8戒를 이렇게 소개했다. 그것은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음행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술 마시지 말라, 하루 한끼만 식사하라, 향료는 쓰지 말라, 푹신한 곳에서 자지말라 등 8가지이다. 음행하지 말라는 계율에는 부부관계도 포함되며, 향료를 쓰지 말라에는 비누나 화장품을 사용하지 말것은 물론 춤과 노래를 즐기지 말라는 뜻도 포함돼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잠롱부부는 이를 그대로 지켜 지난 11년간 잠자리를 따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외국에 공식 여행할 때에도 침대를 사용하지 않고 방바닥에서 자는 것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또 그는 석가모니처럼 하루 한끼만 식사를 한다. 지난 5월말 방콕의 호화로운 두시타니 호텔에서 ‘한국의 밤’행사가 열렸다. 1천여명의 하객을 위해 산해진미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주빈으로 참석한 잠롱 시장은 물한모금 제대로 안마셨다. 동석했던 鄭炷年태국주재대사는 잠롱 시장이 “현실사회의 기준에서 볼 때 이상주의로 보이는 불교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특이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잠롱 시장은 소극적인 청백리로만 남아 있지는 않는다. 그는 창의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며 일을 조직하고 추진하는 힘이 있다. 그의 정직성과 능력에 대한 사람들의 깊은 신뢰로 그가 추진하는 일마다 성공이 보장되었다. 방콕시내에서 돈무앙 국제공항을 향해 북쪽으로 달리다보면 짜뚜짝 공원을 만나게 된다. 그 옆의 넓은  공터에 주말마다 시장이 열린다. 지난 87년 잠롱 시장은 이 주말시장의 한쪽 구석에 ‘틍’이라는 묘한 이름의 자선가게를 내었다. 태국어로 ‘깜짝 놀라운’이라는 의미를 갖는 이 가게 이름은 이곳에서 파는 물건이 깜짝 놀랄 정도로 싸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사람들에게서 안 입는 옷가지 등을 기부받아 이를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파는 것이다.

 

남을 돕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선의 믿어

 이곳에서 주말마다 자원봉사자로 일한다는 플랭시(56)여사의 말에 의하면 지난 3년 동안의 이익금은 모두 4백74만바트로 불구자나 빈민, 병원 등에 기증됐다고 했다.

 ‘틍’가게의 성공에 힘을 얻어 최근 잠롱 시장은 그와 유사한 목적을 지닌 새로운 사업에 착수하려 하고 있다. 자선가게에서는 사람들에게서 기증받은 물건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매우 싸게 파는데 비해 이번에는 생필품을 대량으로 구입해 원가로 파는 회사를 설립한다는 것이다. 이 회사의 이름은 ‘보리삿 타오툰’으로 본전에 파는 회사라는 뜻이다. 수익이 전혀 없는 이 회사가 제대로 운영될지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잠롱 시장은 남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선의를 믿고 있다.

 이 사업이 가동되면 주말마다 몇대의 트럭에 쌀 식용유 설탕 비누 교복 등을 싣고 주로 빈민가에 찾아가 원가에 판다는 계획이다. 잠롱 시장은 처음에는 직접 주말 운전사로 봉사할 생각이다.

 이처럼 유례없이 청렴하고 시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그가 폭넓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프라카 농지구의 골목길에 있는 어느 알루미늄공장은 휴일인데도 일하는 직공들로 분주했다. 그 가운데 한사람 자트리(20)씨는 자기 어머니와 부미볼 국왕 다음에 잠롱 시장을 존경한다고 했다. 그는 잠롱 시장이 “친근감을 주어 좋다”고 말했다. 직공들에게 다음번 시장선거에서 누구를 찍겠느냐고 ‘가상투표’를 해보았더니 싱글벙글 웃으면서 한결같이 ‘잠롱’이라고 대답했다.

 

“태국의 호메이니”라는 비난도

 언론인의 반응도 대체로 비슷했다. 방콕의 대표적인 영자일간지 <방콕포스트>를 찾았을 때 편집국 간부 한사람은 잠롱 시장이 언론인 가운데서 매우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이 여성간부는 <방콕포스트>의 기자 가운데 적어도 95%는 잠롱의 지지자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잠롱 시장에 대한 비판도 없지는 않다. 특히 잠롱 때문에 정치적 또는 경제적 이익을 위협받는 기득권층이 주로 그를 싫어하는 것 같다. 비판자들은 그를 종교적 광신과 정치를 혼합하고 있는 ‘태국의 아야톨라 호메이니’라고 공격한다. 또 군출신인 그가 권위주의적이고 비판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비난도 있다. 잠롱이 점차 현실정치안을 닮아 간다는 지적도 있다. 태국의 양대 영자지 가운데 하나인 <네이션>지는 지난 5월 잠롱이 시정자문위원을 대거 임명한 사실을 두고 “잠롱이 방콕시장 이상의 정치적 지위로 올라가려고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잠롱이 가까운 장래에 태국수상이 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그가 88년 7월총선을 앞두고 창당했던 팔랑탐(진리의 힘)당은 선거에서 방콕의 10석을 포함 불과 14석을 얻었다. 특히 금력이 위력을 떨치는 농촌지역에서 그의 당은 맥을 못췄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공직자의 부패가 한나라의 발전과 사회적 정의를 얼마나 크게 저해하는가를 생각해보면 당장 빛을 잃는다. 잠롱 시장은 자신의 지난날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수상의 비서실장으로 임명되기 전에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정부에 머리좋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서실장이 된 후 나는 정부에 유능한 사람들이 부족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정부에 부족한 것은 사회전체의 복지를 위해 희생할 용의가 있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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