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시민사회 첫 단계 진입"
  • 편집국 ()
  • 승인 1991.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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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역사학자 포즈냐코프 박사 방한 대담/역사적 전환기 소련 ‘중간평가'

 소련의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전환기에서 진통을 겪고 있는 소련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세계경제와 국제관계연구소'(IMEMO) 책임연구원으로 있는 엘구이즈 포즈냐코프 박사로부터 들어본다. 포즈냐코프 박사는 지난달 한국사회주의체제 연구협의회(회장 鄭鍾旭)가 주최한 "탈냉전시대 사회주의권의 변화와 한반도"를 토의하기 위해 내한했다. 이번 대담은 鄭漢九 박사(세종연구소 연구위원)가 진행을 맡았다. <편집자>

소련 사회가 지금 무정부상태로 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렇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무정부 상태란 고전적 개념이 아니라 현재 소련 내 질서의 부재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쿠데타를 계기로 전환점이 있었다는 것인데 무엇보다 15개 공화국이 중앙정부로부터 떨어져나가길 원했고 결과적으로 주권을 선포해버렸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현재의 상황은 ‘합법적 무정부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소련에 시민사회 출현이 가능하다고 보는가?
 지금 우리는 시민사회의 첫 단계에 진입했을 따름이다. 서구의 경우 시민사회는 다원주의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하나 우리는 아직 그런 전통이 없다. 또한 시민사회의 개혁은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시작돼야 하는 법이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만 진정한 시민사회의 출범이 가능하다. 어찌보면 소련 내 모든 개혁은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반혁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민주화와 시장경제에 대한 국민의 열망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닌 위로부터의 희망적 생각에 바탕한 것이기 때문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은 국민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개혁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보니 진정한 시민사회를 건설하는 게 힘든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개혁운동은 지식인층과 국민일반의 의식을 일깨웠다. 그러나 지식인층은 일반 사회계층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런 점에서 사회적 공감대가 부족했다.

옐친과 고르바초프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얘기가 있다. 앞으로 양자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될 것으로 보는가?
 물론 고르비가 옐친을 더 필요로 한다. 옐친이 직선대통령인 데 비해 고르비는 자신의 권력기반을 통해 대통령에 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대통령직에 대한 법적 토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옐친과 그의 측근들은 고르바초프를 최소한 단합의 상징으로서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만일 단합이 실패할 경우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소련 내에 전개될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현재의 단합은 매우 취약하긴 하나 그래도 오래 갈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주권연방이나 경제주권연합의 장래가 어둡다는 얘긴가?
그렇다. 연방정부는 각 공화국의 주권선포를 우려하고 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이는 고르바초프 자신이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었기 때문에 개별공화국도 주권을 선포하는 선까지 온 것이다. 더욱이 우크라이나와 카자흐 공화국은 자국의 군대 창설은 물론 예산도 독립적으로 짜 자기 살림을 하겠다는 실정 아닌가.

옐친이 앞으로 러시아 공화국의 경제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다고 보는가?
 러시아는 소련 내 최대 공화국이다. 그러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나 공업시설이 있는 카자흐 공화국 등 인접공화국과의 경제교류가 빠진 순수한 러시아 자체는 대단히 빈약한 공화국이다. 자체적으로 공장도 별로 없고 게다가 가혹한 기후대안에 있다. 인접한 공화국과 협력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또한 러시아 공화국에는 다른 공화국과 달리 여러 민족이 살고 있다는 점도 골치거리이다. 시베리아 등 극동지역에 분리주의 움직임이 일고 있는데 이는 러시아의 장래에 매우 위험한 요소다. 특히 소수민족이 각기 영토를 주장하는 것은 민족주의보다 더 위험한 발상으로 향후 러시아 기반 자체를 뒤흔들 염려가 있다. 이같은 분리주의는 중앙의 권력에 공백이 생기고 누구나 자기의 이해에 매달릴 때 생기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걸림돌 중 하나로 러시아인의 보수성이 지적되고 있다.
 만일 러시아인의 오래된 문화나 문명, 전통을 두고 얘기한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보수성은 러시아인의 독특한 전통이다. 이는 아시아 여러 국민의 공통된 특징이기도 하다. 서구의 시장경제는 개인의 이익과 기업에 입각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부르주아 감정 같은 것이 없다. 대신 강력한 공동체정신이 있다. 얼마전 연방정부가 기업의 사유화니 토지의 사유화 조처니 하는 것을 발표하긴 했지만 러시아인은 토지가 어느 개인의 소유로 되는 것을 별로 탐탁치 않게 여긴다.

향후 옐친과 고르바초프가 어떤 식으로 소련을 이끌어갈 것으로 보는가?
 소련의 공화국들이 설령 경제연합에 대한 조약에 조인한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본다. 설령 조인한다 해도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누구도 이를 준수하려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있는 게 작금의 상황이다. 따라서 옐친과 고르바초프는 함께 살 수 있는 공통의 분모를 찾지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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