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이 무거운 ‘정치 행운아’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0.09.0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기택총재. 통합 이루면 양金 그늘 벗고 ‘지도자’ 될 수도

 누구나 그렇듯이 정치인도 나름대로의 독특한 버릇이 있다. 민주당 이기택 총재의 버릇은 고민에 빠질 때면 발위에 수북이 쌓일 때까지 커다란 신문지 한장을 잘디잘게 찢는 것이다.

 통합을 둘러싸고 당내 반발에 부딪혀 머뭇거리던 이총재가 마침내 신문을 다 찢은 모양이다. 그는 23일 긴급기자간담회를 통해 “정무회의의 상임고문안은 당론이 아니라 협상안”이라고 말함으로써 지도체제 문제에 관한 한 융통성있게 대처할 의사를 간접적으로 비쳤다. 이총재의 한 측근인사는 “이총재가 다시 통합 적극추진쪽으로 마음을 굳히는 듯하다. 당대당 통합의 모양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분문제에 관한 김대중총재의 양보만 얻어낼 수 있다면 머잖아 적극적인 태도표명을 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다

 야권통합이 시대적 과제로 떠오른 시기에 소수야당의 총재로 야권통합의 열쇠 하나를 쥐고 있는 그를 두고 ‘정치적 행운아’라는 시각이 따른다. 그의 정치행로는 6선 관록을 지닌 정통야당의 중진의원으로 야당가에서는 항상 가장 가능성있는 차세대 지도자로 손꼽혀 오면서도, 양김씨의 견제와 그늘 속에 정치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復線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야권통합의 빗장을 벗기는데 성공한다면 그는 지역정당의 지도자를 벗어나 일약 전국적인 지도자로 떠오를 기회를 맞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당면의 야권통합은 그에겐 기회요 도전이다.

 야권통합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겐 ‘짐’이기도 하다. 광범위한 국민적 지지도나 당내 지도력을 가지지 못한 그로서는 평민당과의 통합에 강한 거부감을 가진 영남의 지역정서를 설득하고 당내 이견을 수렴해야 하는 일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가 야권통합을 둘러싸고 내보인 두 번의 ‘선회’도 알고보면 야권통합에 대해 그가 갖는 이런 이중적 속성 때문이다.

 이총재는 3당야합으로 탄생한 민자당행을 거부하고 민주당을 창당, 총재로 선출된 이후 사퇴정국이 빚어질 때까지만 해도 야권통합에 오히려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총재는 민주당 세 의원의 사퇴서 제출 이후, 구체적으로 지난달 18일 김총재와의 회동 이후부터 야권통합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쪽으로 급선회했다.

 민주당내 통합반대론자들은 이런 급격한 태도선회에 대해 “이총재가 김총재와의 회동에서 무언가를 보장받은 듯하다”는 밀약설을 은근히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총재의 한 측근은 “밀약은 없다. 다만 둘이 한번 힘을 합쳐 대작을 만들어 보자, 내가 살면 얼마나 오래 살겠느냐는 김총재의 이야기에 나름대로의 교감을 느낀 것 같다. 그게 밀약이라면 밀약일 뿐이다”라고 구체적인 밀약설을 강력히 부인한다. 사실상 야권지도자 자리를 둘러싼 밀약이 없었다 치더라도 이총재의 태도 변화를 낳을 만한 이유는 충분히 있다. 국민적 인기에도 불구하고 민자당과 평민당의 대립구도 속에 위상을 찾을 수 없는 소수야당의 비애, 통합야당에서의 자신의 위상, 8명의 의원 중 세 의원이 먼저 사퇴서를 낸 마당에 당내 지도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라도 강력하게 명분을 구사해야 하는 강박감 등이 그것이다. 한 소장파 의원은 “이총재는 원래 명분을 강하게 내세우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명분을 구사하다 보니 현실적인 문제를 간과하고 말았다‘고 말한다.

 이총재의 두 번째 선회는 결국 그가 간과했던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취해진다. 우선 당내에서 그의 가장 강력한 조직기반인 원외 지구당 위원장들이 통합에 반발하고 나섰다. 통합파 소장의원들조차 “지역간 정서를 묶는 명실상부한 통합을 위해선 지도체제 문제와 지분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쐐기를 박고 나섰다.

 평민당과의 밀약설과 맞물려 ‘묘한 시기’에 흘러나온 김대중총재의 ‘부통령제 개헌제의’또한 이총재에게 큰 부담이 됐다. 이총재의 측근은 “신문에 가십 한 줄만 나와도 그날은 사람들 보기 창피하다고 목욕탕에 가지 않는 것이 그의 성격이다. 밀약설에까지 시달리자 피해의식을 느끼는 듯했다”라고 전한다.

 그가 정치인으로서 결정을 내려야 할 주요 대목에서 ‘선회’하는 모습은 지난 1월 민자당 불참결정에서도 나타난 바 있다. 그는 통합신당의 15인 멤버로서 정치오찬에 참여해 신당합류의 추측을 불러일으키다가 일주일간의 장고 끝에 마침내 불참의 길을 택했다. 그의 이런 ‘장고’와 선택은 이를 지켜보는 시각에 따라 상당히 엇갈린 평가를 내리게 했다.

 선회의 귀착지가 반민자당을 내건 정통야당의 길이라는 점에 비중을 두는 이들은 그의 선택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일주일간의 주저’를 기회주의적인 선택으로 매도하는 사람도 있다. 즉 신당의 총무직을 염두에 두고 뛰었다가 여의치 않았다는 설과, 여권이 평민당을 견제하는 수단으로서 야권 신당의 입지를 보장해 주리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그것이다.

 ‘크게 보아 正道를 걷는 합리주의자’ 그리고 ‘우유부단한 기회주의자’라는 엇갈린 평가는 사실 야당정치인으로는 비교적 평탄했던 그의 정치이력 과정에서 줄곧 따라붙어왔다.

 이총재는 부산중·부산상고를 나와 고려대에 다니던 중 故 장리욱 박사를 주축으로 한 공명선거추진위 산하인 학생투위 위원장을 지냈고 고려대 학생위원장 시절에 4·19를 몸으로 겪은 세대다. 그는 대학졸업 후 은사이자 당시 민주당 총수였던 유진오박사의 천거로 7대 국회 때 전국구로 원내에 처녀 진출했다. 그는 정계에 입문한 뒤에도 유진오·유진산 등 항상 주류쪽과 밀착해가며 ‘양지바른’ 그늘에서 성장했다. 진산이 세상을 떠나자 김영삼계와 반대 입장에 섰던 신도환 계보에 속해 온건·타협노선의 길을 걸으며 8대에서 10대까지 지역구에서 순탄하게 내리 4선을 했다. 80년 봄 정치규제라는 시련을 겪긴 했지만 야당 복원을 위한 민추협 결성에 나서지 않았던 점 등도 ‘싸우지 않는 정치인’으로 규정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총재가 한국 정통야당사의 맥을 지키는 正道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단을 내려왔다고 평가하는 이들은 79년 5·30 전당대회에서 보인 이총재의 역할을 든다. 당시 이총재는 신도환 계보를 과감히 이탈하고 총재경선에 나서 ‘청년문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뒤 결선투표에서 김영삼씨의 손을 들어 이철승씨를 패배시킴으로써 정통야당의 맥을 잇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이번 야권통합을 둘러싼 이총재의 선회비행의 귀착지는 어디일까. 거대여당의 정치적 구도, 평민당의 대응, 민주당내의 분위기 여하에 따라 그의 선택을 달라질 수 있다. 한가지 분명한 건 지금의 야권통합은 그에게 ‘기회’이자 ‘짐’이라는 점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