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으로 얼룩진 南山 1백년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0.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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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공사관 건립후 ‘오욕의 역사’시작…도로·외인아파트 등으로 무차별 파괴돼

남산 훼손 1백년의 역사는 근·현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수난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일제의 강점으로 그 순결을 잃기 시작한 남산은 행정부재의 혼란기와 무분별한 경제개발기를 거치면서 우리들 스스로의 손에 의해 유린됐다. 파괴의 역사를 복원의 역사로 돌리게 될 ‘제모습찾기 사업’이 발표된 시점에서 남산의 유래와 그것이 좀먹어들어간 부끄러운 과거를 문헌과 비화를 통해 정리해본다.

 

 높이 2백65m의 南山은 옛 서울의 남쪽 끝에 있던 산으로 內四山 중 하나이다. 내사산이란 남산과 함께 경복궁 뒤의 북악산, 사직공원 뒤의 인왕산, 대학로 위의 낙산 등을 말하는데 서울을 안쪽으로 둘러싸 자연성곽을 이루었다. 고려 때 서울 일대의 이름이었던 木覓壤에서 비롯된 목멱산, 서울을 개성에서 끌어왔다는 뜻의 引慶山, 烽燧가 끝나는 곳이라고 해서 붙여진 終南山등은 모두 남산의 별칭이다. 풍수설로는 명당인 경복궁 자리에 앉았을 때 그 앞의 凡案(작은 상) 같다고 하여 案山이라고도 불렀다.

 남산은 예로부터 ‘올라가 노는 산’이 아닌 ‘바라보는 산’이었다. 남산이 ‘바라보는 산’이 된 연유는 목멱대왕을 모셔놓은 國師堂이라는 신성한 제단과 5개의 봉수대가 산 정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남산 최초의 건축물로 여겨지는 국사당은 태조 이성계가 定都한 지 5년 후인 1397년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에서 기우제 등이 올려졌다. 봉수대는 세종 때 국사당 옆에 설피됐는데 국방, 특히 안보통신기능으로서의 남산의 기나긴 역사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한·미군의 관계시설이 대부분 옮겨가게 될 1996년은 따라서 남산이 ‘서울의 안테나’ 역할을 근 6백년만에 중지하게 되는 해라고 할 수 있다.

 전국 각 도의 봉수대에서 올라온 봉화는 옛 서울 근교, 지금은 대부분 서울이 됐지만 워커힐 동쪽의 아차산, 상계동과 의정부 사이의 수락산, 연세대 뒷편의 무악산, 김포공항 부근의 개화산 등에 도착하여 남산의 봉수대에 전달되었다. 한양 성내 사람들은 저녁식사를 마치고 대청마루에 앉아 1개의 봉수대에서만 봉화가 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변방의 무사를 확인했던 것이다. 변고가 있을 경우에는 적출현(2), 국경접근(3), 월경(4), 접전(5) 등으로 봉화의 갯수가 달라졌다.

 구한말 영국 〈런던 데일리 메일〉기자로 조선을 찾은 F.A 멕켄지는 그의 저서《조선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남산의 봉화와 관련한 감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둠이 깃들게 되면 남산과 그밖의 높은 산에서 봉화가 타오른다. 네개의 산 위에서 네 개의 봉화가 올라가면 그것은 먼 지방에 있는 봉수감시인들에게 ‘모든 것이 양호하다. 그리고 온 나라는 평화 속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신호이다. ···이윽고 시내 중심부에 있는 대종(보신각종)이 警告를 발하면서 은은하게 울려퍼진다. 이것이 만종(인정)이며 서울은 이때부터 휴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처럼 나라의 안녕을 확인하던 ‘바라보는 산’남산은 일본인들에 의해 잠식되기 전까지

소나무 숲이 울창한 ‘仙境’을 자랑해왔다. 필동 중앙대성심병원 뒷편 수방사 입구쯤에 있었다고 하는 유명한 靑鶴洞 등이 그런 곳이다. 벼슬자리 없고 가난에 ‘오기’만 남은 선비들이 많이 살았다 하여 ‘남산골 샌님’이나 ‘남산골 딸깍발이’ 같은 말도 생겨났다. ‘제모습찾기 사업’ 가운데 곧 이전할 수방사 자리에 남산골을 재현시킨다는 얘기는 그래서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나 1884년, 남산골은 차츰 일본인들의 무대로 바뀌기 시작한다. 갑신정변 후 맺은 한성조약 4조에 따라 일인들이 남산골 아래 지금의 충무로 2가인 진고개 일대에 공사관과 영사관 부지를 얻고 아울러 일본인 거류구역을 지정받게 된다. 서대문 밖에 있던 그들의 공사관이 임오군란으로 불타버리자 종로구 경운동 朴永孝의 저택(현 경인미술관 터)을 구입하여 서울에서 최초로 2층 양옥의 공사관을 지었으나 갑신정변 때 또 불타 조선정부에 대책을 요구한 것이다.

 조선정부는 이곳이 진고개란 이름 그대로 땅이 낮고 협소하여 비가 오면 물이 잘 빠지지 않는 등 비교적 주거환경이 좋지 않아 일인들의 요구를 쉽게 받아들였다. 이 일대를 낀 남산기슭은 임진왜란 당시 倭將 우키다 히데이에의 병사 1천5백여명이 오랫동안 진을 쳤던 자리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 때문에 일인들은 지금의 케이블카 기점 아래 통일원 영화진흥공사 자리에 倭城臺를 설치하는 등 일대를 공원으로 만들어 벌써부터 성역시했다. 이때가 1897년인데 일인들이 제멋대로 남산에 손을 대기 시작하고 동시에 조선사람들이 남산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사실상 남산 훼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일인들은 이곳을 왜장터로 불렀으나 藝場터가 와전된 것으로 전해진다. 임란시 왜군의 기지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전부터 우리 營門 군졸들의 연습장으로 쓰인 동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으며 오늘의 중구 예장동이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신변이 보호되는 거류구역이 확정되고 청일전쟁의 승리 뒤에 기세도 높아지면서 입경하는 일본인 수가 해마다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 1898년 그들은 남산을 이미 자기네 땅으로 여겨 경성신사를 세운다. 일인들에 의한 두번째 남산 훼손이다.

 

일제. 신궁 세우고 절대 성역화

 이즈음 서울을 찾은 I.B 비셥 여사는 남산 아래 살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남산 비탈에 단조하고 수수한 백색 목조의 일본공사관 건물이 위치하고 그 앞쪽에 근 5천명이 살고 있는 일본인 거류지가 있다. 다방도 있고 극장도 있으며 그밖에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그곳은 조선인 거리와는 대조적으로 점포와 주택이 들어선 가로는 깨끗하고 말끔하다. 얼굴을 가리지 않은 여인들, 허리띠를 두른 길다란 일본옷을 입고 남자들은 모두 나막신을 신을 채 일본에서와 같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있다”

 1906년 2월 통감부가 발족하면서 남산 허리, 오늘의 예장동 8번지에는 또 하나의 목조 2층 건물이 들어선다. 통감부 청사가 남산 언덕에 세워진 것이다. 이 청사는 한동안 총독부 청사로도 사용됐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남산의 허리를 타고 앉아 시내를 굽어보기는 하였으나 북향 또는 서향의 건물이 돼 좋지 않았고 규모가 작아 서울시민은 물론 한반도 전역을 위압하는 물리적인 상징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북악산쪽 시야를 완전하게 차단하고 있는 중앙청(현 국립중앙 박물관) 건물이다.

 통감부 이후 남산을 절대성역화한 일제는 드디어 1920년, 자국민을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현지인 토속신앙을 교화할 목적으로 거대한 신사를 하나 짓는다. 朝鮮神宮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적 지배체제의 일환이었다. 천조대신과 명치천황을 祭神으로 모신 이 신궁은 공사기간 5년에 공사비 1백56만엔이 들었는데 훼손한 남산의 땅 넓이는 무려 12만7천9백평에 달했다. 현재의 도서관과 식물원이 있는 위치가 신궁의 자리였으며 기다랗고 가파른 돌계단은 훼손의 유물로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이때부터 남산은 조선인들에게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신성한 곳’이 되고 마는데 신궁 건축에 얽힌 얘기 또한 그만큼 전설적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조선인들을 동원하기는커녕 근처에 접근도 못하게 막았으며 하얀 천으로 주위를 가리고 그 안에서 일본의 일류기술자(宮大木·미야다이쿠)들이 비밀리에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매일 아침 목욕재계를 하고 가미시모(上下·정장)와 두건 차림으로 엄숙하게 공사에 임했다고 당시의 기록은 전하고 있다.

 신궁 위로 올라갈 경우 가차없이 총살을 한다고 위협하는 등 공포의 출입금지가 시행됐다. 40년에는 총독부 고시로 주변 1백13만1천㎡가 남산도로공원으로 지정됐다. 남산공원은 일제에 의해 공원화된 것이다. 그래서 혹자는 남산이 해방 전까지는 오히려 철저히 보호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6·25 직후 소나무 베어 뗄감으로

 해방이 되자 남산 일대는 급격히 변하기 시작한다. 전쟁과 제1공화국의 혼란기 동안에 무허가 건물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차면서 우리 손에 의한 훼손이 일제의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자행된 것이다. 자유당정부는 무허가 건축을 막을 행정관리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스스로 훼손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설계작품 현상모집까지 벌인 국회의사당 건립 계획이다.

 이 현상모집에 당선된 작품은 유명한 김수근씨와 강모교수(ㅎ대)의 공동작품. 동경대 석사과정의 학생 신분으로 밝혀져 크게 화제가 된 이들 가운데 특히 김수근씨는 뒤에 김종필씨와 손을 잡고 워커힐호텔을 비롯하여 타워호텔·자유센터(현 자유총연맹)등 남산을 잠식하고 들어선 건축물의 설계를 맡아 한국건축계의 거물로 떠올랐다. 김씨는 잠실 올림픽단지 조성을 마지막으로 얼마전 작고했다. 김씨와 강교수의 국회의사당 설계도는 지금의 남산야외음악당 자리에서 일단 공사에 들어갔으나 이승만대통령의 중단 지시로 땅을 조금 깎다 말았다.

 남산은 6·25와 함께 본격적인 황폐화의 길을 걷는다. 조선군사령부의 훈련장이었던 후암동 일대 3백여만평의 비탈지에 무단점령한 월남민 주거지역, 이른바 해방촌이 형성되면서 남산의 서남쪽 기슭이 판자집으로 뒤덮이고 말았다. 남산공원관리사무소측에 따르면 이 무렵 엄청난 양의 남산 소나무가 베어져 해방촌 사람들의 아궁이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나는 집을 골라 남벌단속을 하던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남산은 무허가 건축이 ‘붐’을 이뤘는데 정부기관인 KBS(중앙방송국 남산방송소)가 57년 예장동 4번지 국유지에 불법으로 방송국을 지을 정도였으니 “허가를 내주는 데도 없고 안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 그냥 지은 것이지 요즘처럼 특혜를 받거나 당국의 눈을 속여 건축한 게 아니었다”는 한 주민의 말이 실감난다. 무조건 짓는 놈이 임자였던 것이다. 이때 생겨나 지금까지 차지하고 잇는 큰 건물이 숭의여고·동국대 등이다. 철거될 예정인 외국인 임대주택단지와 외국공관관저도 58년에 만들어졌다.

 필동의 동국대 경우는 이대통령의 총애를 받고있던 白性郁총장이 55년 대통령의 특별승낙을 받아 59년에 준공됐다고 서울시 6백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백총장은 불교철학으로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30년부터 10년간 금강산에서 입산수도하다 해방과 함께 ‘예언승’으로 등장, 이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을 얻어 내무부장관으로 발탁되기도 했으나 6·25가 일어나는 바람에 인책사임했다. 전쟁을 예언못한 ‘죄’로 장관직을 잃었지만 54년부터 61년까지 동국대 총장겸 재단이사장을 지냈다.

 

“3공 정부가 솔선해 망가뜨렸다.”

 자유당정부 시절의 남산 훼손이 정부의 무능에 기인한 것이었다면 60~70년대 3공의 남산파괴는 ‘유능한 정부의 철학없는 개발’에 따른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해방 후 남산파괴사 가운데 해방촌과 더불어 굵은 획을 긋는 사건이 62년 남산관광도로의 개설이며 68년부터 뚫기 시작한 남산터널도 같은 맥락으로 지적되는 ‘훼손의 원천’이라고 얘기한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되니 제일 먼저 정부 관련 기관이 들어섰으며 고층 아파트 등 주거시설과 호텔 같은 관광시설이 세워지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이 시기 남산은 대한민국정부가 솔선수범해 망가뜨렸다고 말한다.

 63년 4월 정부는 장충단공원 안에 중앙공무원교육원 부지를 내주고 있고 비슷한 시기에 타워호텔·자유센터 등을 짓도록 허가하고 있다. 남산야외음악당은 이 무렵 만들어졌다. 65~66년경에는 현재 신라호텔 안에 있는 영빈관과 1호터널 옆의 중앙정보부(안기부)가 들어선다.

 앞으로 어디로 옮겨갈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안기부의 현 위치는 조선시대부터 군사시설이 있었던 곳이다. 인근 수방사 일대와 함께 南小營이란 조선군 병영이 자리했었는데 일제시대에는 일본헌병대 사령부가 쓰던 곳이었다. 공포의 대명사가 시대를 바꿔가며 이어지고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남산 심장부를 구멍낸 1·2호 터널은 당시 서울시장이던 金玄玉씨 아이디어로 알려져 있다. 66년 취임하여 70년 와우아파트 사건으로 물러난 김씨는 서울의 도로혁명을 이룬 시장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당시 전국의 화제를 모은 삼일고가도로를 만들면서 남북을 관통, 강남과 경부고속도로를 연결시키는 도로를 궁리한 끝에 남산터널을 착상했다는 얘기이다. 지금의 교통난을 생각하면 언제고 뚫릴것이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이 터널들이 남산을 상처내는 데 크게 기여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산이 가장 직접적이고 흉칙하게 파괴된 것은 외국인들을 위한 주거·숙박시설이 남산 일대에 대거 세워지면서부터이다. 67~69년에 집중적으로 허가되고 공사에 들어가게 되는데 남산맨션과 주공 외인아파트가 대표적인 경우이다. 이것과 직접 관련이 없는 육영수씨의 사업으로 어린이회관(현 국립도서관)은 70년에 문을 열었다.

 당시 서울시 실무자에 따르면 3공의 경제개발 시책으로 외국인들, 특히 상사원들의 서울 출입 또는 상주가 많아졌지만 그들을 재울 곳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당시 서울의 수세식변소 보급률이 0.6%였음을 상기시키면서 이 실무자는 “부인은 도쿄에 두고 자신은 반도호텔 같은 곳에서 생활하는 외국상사원을 위한 아파트와 더 많은 호텔의 건설이 시급했다. 그때는 그들이 와주는 것만 해도 고마웠기 때문에 남산 훼손이고 뭐고 돈 안드는 땅을 골라 집을 빨리 지어줘야 할 만큼 사정이 절박했다”고 말한다. 朴正熙대통령이 지시하고 무역협회 등에서 압력을 넣은 이 작업은 장동운 대한주택공사장이 실무를 맡아 추진했다.

 이렇게 해서 하얏트호텔과 함께 ‘남산의 3대 흉물’로 꼽히는, 당시로서는 초고층인 16층·17층짜리 외인아파트와 남산맨션이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병풍처럼 산을 가로막으며 버티고 서게 된 것이다. 한남대교를 건너 서울로 들어오는 길에서 마주치는 이 ‘병풍아파트’는 서울시민이면 누구나 분노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흉칙한 괴물. 따라서 이 아파트의 유래를 집중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69년 허가돼 70~72년 사이 건설된 외인아파트 A·B 2개동은 한남동 단국대 옆의 힐탑아파트에 이어 두 번째로 시도한 고층아파트로 각각 16층과 17층형이며 28, 32, 35, 40평형 총 4백27세대. 설계는 엄덕문 설계사무소에서 맡은 것으로 돼있는데 기절할 만한 사실은 주공이 당초 이 아파트단지를 구상할 때는 3만2천여평의 땅 위에 16층형 5개동, 3층형 3개동 부대건물 2개동 등의 대단위 아파트단지 공사계획이었다는 점이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남산 남쪽기슭 전체를 파헤치고 시야를 완전히 차단해버리고도 남았을 이 계획은 불행 중 다행으로 경관을 너무 가린다는 반대론에 부딪혀 현재의 2개동으로 축소된 것이다. 주공 40년사는 남산외인아파트 부분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산기슭의 고층건물이었기에 기초공사에서도 기초지반암의 슬라이딩을 방지하기 위해 암을 꿰뚫어서 서로 묶어놓는 등 상당히 주의를 기울인 정밀시공을 했다. 한국 최초로 골재계량장치가 부착된 시멘트혼합기인 바챠프랜트가 설치됐으며 하물용 리프트를 설치하여 자재운반을 했고 동마다 타워 크레인을 설치했는데 아파트건설에서 이런 시공방법은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이 아파트는 또한 경관을 위해 일자형 형태를 피해 꺾인 구조로 했으며 건물 중앙에 엘리베이터 홀을 설치한 중앙복도식인데 이 형태는 북측방 등이 춥고 어둡다는 이유로 한국사람들에게는 기피를 당했으나 외국인 입주자로부터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한편 A·B동 옥상에는 한국 최초로 헬리포트를 시설했다. 이것은 대연각호텔 화재사건 후 외국인 입주자들의 안전을 위해 추가시설된 것이었다. 이래서 남산 외인아파트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건축기술 수준과 서비스정신을 알려주는 ‘외교아파트’라고 불리고 있다”

 한국 최초기록을 여러개 세우면서 성공적으로 지어졌다는 이 아파트는 올해로 착공 20년을 맞고 있다. 아파트 수명 20년에 다다른 것이다. ‘남산 제모습찾기 사업’은 이같은 배경과 미군기지 이전이라는 결정적인 걸림돌 제거 등이 그 추진력을 제공한 것으로 보면 무리가 없다. 그러나 이 사업에 포함되지 않은 또 하나의 흉물에 시민들은 분노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하얏트호텔이 그것이다.

 하얏트가 생겨난 배경도 외인아파트와 같은 맥락으로 풀이되는데 박대통령이 즉흥적으로 위치를 선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72년 외인아파트 준공식에 참석한 박대통령이 헬리포트가 있는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둘러보다 눈에 거슬리는 시설물을 발견하고 수행관료에게 “저것 보기 싫군, 딴 데로 옮기고 그 자리에 호텔 하나 지어”한 것이 지금의 하얏트를 있게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대통령의 눈을 찌푸리게 만든 시설은 현제 한강 이남으로 이전돼 있는 군부대였다. 외국인들이 보기에 좋지 않은 풍경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일본 후지다공업 대표인 제일교포 윤덕하씨와 뉴코리아호텔 대표 이상린씨가 절반씩 투자해 불과 몇달 뒤인 73년 1월 첫 삽을 뜨게 된다. 처음엔 호텔명이 ‘미라마호텔’이었으나 78년 준공과 함께 미국 시카고의 하얏트와 위탁경영을 맺음으로써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

 외인아파트가 완공되고 하얏트 건물이 한층한층 올라갈 즈음 시민들의 원성도 그만큼씩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한 반대여론을 듣고있던 당시 양택식시장은 불안한 나머지 일주일에 한번 이상 제3한강교에 나가 수백장의 사진을 직접 찍으면서 건물이 완공될 경우의 시야차단에 대해 고민했다고 그를 보필했던 서울시의 한 전직 국장은 말한다.

 양시장은 서울공대 화공과 출신으로 그때로서는 드문 문민 출신의 인텔리 시장으로 통했는데 자연환경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쏟아 성산동 분뇨종말처리장과 중랑천 하수종말처리장을 재임중에 만들었다. 남산보호운동이 펼쳐진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72년 순환도로와 산책로를 따라 전장 30여km의 철책이 둘러졌으며 ‘입산금지’구역이 해방 후 처음으로 지정된 것이다. 이 결과 한 때 산토끼가 다시 보이는 등 남산은 최소한 더이상의 훼손·오염을 당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73년 하얏트호텔의 기공을 마지막으로 외관상 남산 훼손의 역사는 끝을 보게 된다. 독일문화원장이 문화원 건물을 한층 더 올리기 위해 서울시청을 여러차례 찾았으나 결국 실패했던 얘기는 ‘하얏트 이후’의 남산보호에 대한 정부의 뒤늦은 자각, 그러나 그것으로라도 다행인 그들의 값비싼 깨달음을 보여주는 일례이다.

 그 대가로 흉물스런 아파트 수명이 20년이 된 뒤에야 제모습을 찾겠다고 나설 수 있었으며, 그것이 어느 정도나마 실현되기에는 수십년이 더 걸려도 모자랄 것이라는 교훈을 남산 훼손 1백년사는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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