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땅에 대한 타락한 마음가짐 버려야
  • 최창조 (서울대교수·지리학) ()
  • 승인 1990.09.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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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지리설은 과학과 예술의 양면적 조화…이기적 俗信으로 이해하면 윤리성 상실

 오늘날 학계에서 풍수지리설을 되짚어볼 수 있는 근거는 두 가지라 할 수 있다. 하나는 ‘땅의 生能的 技術’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思想性에 관한 것이다.

 본래 풍수에는 과학과 예술의 양면성이 깃들어 있다. 즉 삶의 장소가 사람에게 적절한 쾌적함을 주도록 배려하는 측면 이외에, 그 장소가 인간의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메카니즘에 작용하기도 한다. 그래서 풍수는 고대인들이 자연의 道에 순응하여 살던 삶의 방법과 자연을-특히 땅을-소유와 이용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현대인의 생활 사이에 미묘한 고리 역할을 해줄 수 있다. 풍수는 氣로부터 흘러나오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침묵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이다. 이런 것을 풍수의 생태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풍수적 기술을 이론적으로 현대인이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잘 것 없는 지식과 분석력 따위를 모두 끊어버리고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연의 흐름에 맡겨 가장 적절한 장소를 종합적 직관력에 의지하여 선택하는 풍수 기술은 그렇기 때문에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지식을 끊고 직관에 호소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지식이 끊어진 자리에서 온몸으로 땅의 기를 받아들일수 없게 된 사람은 다시 지식체계로 돌아가 논리에 입각한 언어적 표현에 매달리게 된다. 이것이 풍수이론과 풍수논리 체계를 성립시켰다. 전적으로 기에 대한 느낌(氣感)일 수밖에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당연히 그 이론은 여러 가지가 될 수밖에 없고 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후대의 사람들은 地氣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훈련을 하기보다는 주로 이론을 통한 이해에 매달렸다. 그 이론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이해해도 현장 적용은 잘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론은 이론대로 머리속에서만 맴돌고 산은 산대로 그 자리에 있는 (山自山 書自書)” 답답한 상태를 겪게 된다. 책을 보면 산이 떠오르고 산을 보면 글이 그위에 겹쳐져야 수준에 오른 풍수사가 되는 것인데, 그런 단계의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된 것이 요즘 세태이다. 그런데도 그 이론은 기술적으로 매우 유용한 측면이 있다. 그 유용성에 관한 연구가 지리학 조경학 건축학 환경계획학 분야의 젊은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기능주의, 실증주의적 공간 이론에 의하여 비인간적이고 몰개성적인 ‘익명의 공간’ ‘잃어버린 삶터’ ‘고향없는 장소성’으로 변질된 현대의 지리 현상을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풍수의 생태적 기술을 원용하고 있다.

 풍수의 사상성을 알아보자. 오늘날 땅과 사람의 관계를 비유컨데, 우리들은 한마디로 고향을 잃어버린 꼴이다. 어머니의 품속 같은 고향. 강아지도 제 어미의 체취를 알고 그 독특한 품안에서 자고 그 독특한 품안에서 안정을 얻는다. 아무 어미나 젖만 주면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야….

 고향이란 일반적이고 규격화된 촌락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남의 어머니에게서 맡을 수 없는, 오직 그 분의 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개성있는 체취가 있어야만 어머니인 고향이랄 수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가치 내재적이고 정서적인 우리만의 어머니를 몰가치하고 형체만 지닌 무국적의 모친으로 변질시키는 ‘국토정책’에 몰두해온 셈이다. 좀더 많은 젖을 빨아먹으며 살아왔을지 모르지만 어머니인 땅과의 정서적인 교감은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그것을 심각하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고 말았다.

 오늘의 우리 학계가 조상들의 땅에 관한 지혜의 집적인 풍수지리설을 돌이켜 보는 것은 오늘날의 땅에 대한 타락한 마음가짐에서 벗어나 보자는 의도임은 재언의 여지도 없다.

 그런 면에서 풍수는 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해준다. 땅은 인간의 이기심으로부터 뻗어나오는 약탈의 대상이 아닌 인격체이며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임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예나 지금이나 주의해야 할 일은 풍수를 이기적인 俗信으로 오해하여 그 윤리성을 잃는 것이다.

 “좋은 땅은 좋은 사람에게만 주어진다”는 풍수의 원칙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美德이 吉地’라는 응보관계로 이해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우연히 훌륭한 풍수사를 만날 수도 있으나 名穴 吉地가 그것으로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착한 사람은 으레 하늘을 아버지처럼 믿고 두려워하며, 땅을 어머니처럼 의지하여 살아가는 법이다.

 참으로 좋은 땅이란 인륜을 지켜 살아나가는 사람들의 터전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래도 좋은 땅을 원한다면 자연과 교감할 수 잇는 인간적 본능을 되찾을 일이다. 그다음 地氣를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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