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돌아온다, 대비하자”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4.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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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택 대표, 독자노선 준비 … 민자당 일부 “YS 후계자 키워야”

김대중 아 · 태재단 이사장은 과연 정계에 복귀할 것인가. 정가에서는 이제 이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여야 모두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이다. 특히 민주당 중 · 하위 당직자들의 자세 변화는 괄목할 만하다. 그동안 김이사장의 정계 복귀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여당의 음해라며 짜증을 내던 이들은 요즘 거리끼는 기색 없이 김이사장의 정계 복귀 시기를 점칠 정도로 변했다. 오랫동안 야당에서 산전수전을 겪어온 이들의 태도 변화는 그 어떤 정세 분석보다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한다.

DJ 행보 예측한 ‘쪽집게 보고서’
  김이사장은 10월 5일 정계 은퇴 뒤 처음으로 ‘선거’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한양대와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이 주최한 세미나의 기조연설에서 “96년 총선과 97년 대통령 선거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주민들이 자기네가 뽑은 지방 행정부의 주관 아래 치른다. 이런 계기를 명실상부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년 지방자치 선거에서 주민들이 정말로 책임 있는 주인으로서 선거에 참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92년 대선에서도 법대로 지방자치를 실시했더라면 야당 후보가 좀더 유리한 조건에서 선거를 치를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아쉬워했다. 그동안 정치 얘기는 될 수록 삼가온 그가 정치 얘기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선거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다.

  김이사장의 정계 복귀 문제는 지난 5월 그가 미국을 방문하기 앞서 <대전일보>와 가진 기자회견에서 정식으로 되살아났다. 그 때만해도 민주당에는 그의 정계 복귀를 회으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이제 그의 정계 복귀 순서의 윤곽은 거으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민주당 전체의 분위기인 듯하다. ‘김이사장이 정계에 복귀하려면 이런 순서를 밟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많은 사람이 예상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김이사장의 <대전일보> 회견이 있기 두달 전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의 보좌진은 김이사장의 동향과 관련한 보고서를 낸 적이 있다. 그런데 7개월 전에 작성된 이 보고서는 신통하게도 앞일을 족집게처럼 맞췄다. 보고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멀지 않아 김이사장측에서 정계 복귀를 시사하는 발언이 어떤 형식으로든 불거져나올 것이다. 다음 순서는 5 · 6공 세력 끌어안기이다. 김대통령은 김이사장의 공세를 의식해 5 · 6공 세력의 정치 재개(박태준씨 사면을 포함한)를 용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대통령은 궁극적으로는 기이사장을 지지하게 될 한총련 등 NL(민족해방) 계열의 운동권과 재야에 철퇴를 가하면서 나머지 재야를 끌어들이려고 노력할 것이다.’

  실제로 김이사장은 그동안 보수 세력에 끊임없이 화해 제스처를 보냈다. 5월 미국 방문 뒤에는 박준규 전 구고히의장과 회동했으며, 최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15주기 추도위원회 고문 직도 수락했다. 박철언 · 김복동 씨 등 대구 · 경북 세력을 끌어안으려는 이기택 대표의 야권 통합 노력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지난달 미국 방문 때는 미국내 보수 인사들과 접촉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여권은 박 홍 총장의 주사파 발언을 계기로 학생운동권에 철퇴를 가했다. 김문수 · 이우재 · 정태윤 씨 등 민주당 출신 재야 인사를 잇달아 영입했다. 장기표 · 김근태 씨에 대한 입당 로비도 맹렬히 전개하고 있다. 민정계 중진들에게는 시 · 도 지부장이라는 계급장을 달아주고 다시 전면에서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박준태씨도 사법 처리하지 않을 것 같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전두환 · 노태우 전 대통령 측근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우연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현재 상황은 보고서 내용과 일치하다.

민주당 비주류 움직임 ‘둔화’
  민주당 이기택 대표도 각오를 한 듯하다. 최근 측근들에게 자기 처지가 “김이사장이 은퇴하기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게 없다”고 푸념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특히 자기가 주도한 경주 보선에서의 승리 이후에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대중적 지지도가 올라가지 않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대표는 최근 비서진에게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AFUS하라고 주문했는데, 비서진은 ‘김이사장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고 한다. 이기택 대표는 김이사장과 같이 박정희 대통령 15주기 추도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됐다는 언론 보도에 대해 10월 5일 이를 즉각 부인하는 논평을 냈다. 이는 독자노선을 걷겠다는 신호탄일 수도 있다.

  비주류의 목소리도 현저하게 잦아들었다. 특히 내외문제연구회에 가입한 정대철 고문에게 김이사장이 친필 쪽지를 건넸다는 소문이 돈 뒤 비주류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화했다. 요즘은 당권 문제를 놓고 목청을 높이는 민주당 의원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기는 민자당도 마찬가지이다. 민자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이제 김이사장의 복귀를 현실로 인정하고 대책을 세워야 할 때다. 당장 김이사장의 상대로 누구를 세워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김대통령이 또 맞설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한다. 민자당 내에서는 “빨리 김영삼 대통령의 후계자를 정하고 키워야 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민주계의 한 의원은 “김이사장의 일련의 행보는 모두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게 틀림없다. 김이사장은 정계 복귀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한발한발 매우 성공적으로 다가가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와 맞설 만한 카드가 없다. 그게 큰 문제이다”라고 말한다.

“DJ에 대한 영남지역 정서 많이 변했다”
  또 다른 민주계의 한 의원은 “김이사장에 대한 영남지역의 정서가 많이 희석된 것 같아 걱정이다”라는 말도 했다. 김이사장이 은퇴한 지 두달쯤 지난 뒤인 93년 4월 코리아 리서치가 전국 천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이사장의 정계 복귀를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는 의견은 64.4%였다. 대구 · 경북 지역과 부산 · 경남 지역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가 각각 74.1%와 69.8%였다. 그로부터 1년 5개월여가 지난 지금 민자당의 고민은 특히 대구 · 경북 지역의 수치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지난 5월 김이사장을 수행해 미국을 방문했던 민주당의 한화갑 의원은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영남 지역에서 김이사장이 복귀해야 한다는 여론이 80% 정도만 되면 정계에 복귀할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보고서의 결론은 이렇다.

  ‘96년 총선 이후 민주당, 민자당내 5 · 6공 세력, 제3 원내교섭 단체 등은 공동으로 DJ 범국민후보론을 들고나올 것이다. 김이사장은 지역감정과 정치 보복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을 없애기 위해 “나는 통일과 외교에만 전념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면서 의원내각제 개헌안을 들고나올 것이다. 급격한 정치 변동이 가능한 대통령제가 늘 부담스러웠던 미국도 동의할 것이다. 이는 ’현상 고착적 남북 연합‘을 지향하는 미국의 신동북아 정책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이 보고서 내용과 일치할지는 아직 모른다. 김이사장측은 1%의 가능성도 없는 얘기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벌써부터 정계 복귀 얘기가 불거지는 것을 보면서 DJ가 정말 마음을 비운 것 같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김이사장의 스타일로 보기에는 진행 상황이 너무 거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야정치인들은 김이사장의 정계 복귀를 현실로 받아들이며 각자 이해관계에 따라 대책 마련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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