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제궁 주인을 찾습니다.
  • 파리.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4.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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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년 프랑스 대권 노리는 난형난제 4명 ‘안개 속 각축’

‘아무도 말을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누구나 그 생각만 한다.’ 여름 휴가철이 끝나고 가을로 접어들면서 프랑스 신문?잡지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제목이다. 여기서 ‘그 생각’이란 일곱 달 뒤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를 가리킨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함은, 공산당 당수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공식으로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밝힌 입후보자가 아직 없다는 뜻이다.
 현 프랑스 총리인 에두아르 발라뒤르와 현 파리 시장이자 드골주의공화파(RPR) 당수인 자크 시라크는 ‘그 생각’만 하는 사람들의 가장 대표적인 에라 할 수 있다. 30년 지기이던 두 사람이 엘리제궁 티켓을 놓고 한자리에서 밥도 같이 먹지 않는 정적으로 돌아서게 된 사정은, 우리나라 양김씨의 미묘한 갈등 관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프랑스판 ‘양김씨’ 시라크와 발라뒤르
 자크 시라크와 에두아르 발라뒤르의 동상이몽은 93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우파가 대승함으로써 좌파 출신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의 제2차 좌?우 동거가 기정사실화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1차 좌?우동거(86∼88년) 때 우파 총리를 지내면서 미테랑 대통령과 심한 신경전을 벌였던 자크 시라크는 자기가 이끄는 RPR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확보했는데도 총리직을 사양하고 그의 믿을 만한 동료이자 참모였단 발라뒤르를 그 자리에 천거했다. 발라뒤르가 ‘궂은 일’을 맡아 하는 동안 자신은 착실하게 95년 대선 기반을 다진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미테랑 대통령과 발라뒤르 총리 간에 마찰 없는 밀월 관계가 지속되고, 한편으로 발라뒤르에 대한 국민의 신임이 날로 두터워지자 시라크는 자신의 위치가 점차로 모호해지고 있음을 뒤늦게나마 깨달았다. 발라뒤르의 ‘배반’을 우려해온 추종자들의 관측이 옳았음을 비로소 인정하기 시작한 시라크는 지난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지방순회, 세미나 등 정치 일선에 나서서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발라뒤르 총리는 “지금은 수렁에 바진 프랑스 사회를 재건하는 데 전념해야 할 시기”라면서 애써 무관심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가 다가오는 대선에 출마할 것이라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렇다고 해도, 시라크의 본격적인 선거운동은 현재 드골파 RPR와 중도?자유주의파 연합인 UDF의 연정으로 구성된 집권 여당을 분열 위기로 몰아간다는 비난을 받을 소지를 안고 있다. 우선, 시라크?발라뒤르 모두 RPR 출신인 까닭에 둘 다 출마를 고집하면 당이 분산될 것은 정한 이치이다.

 뿐만 아니라 집권 여당 처지에서 보자면, RPR가 대통령 후보를 독점하는 사태를  UDF측이 달가워할 까닭이 없으며, 자기네도 독자적인 후보를 내세우려 할 것이 당연하다. UDF 출신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 레이몽 바르 전 총리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고질적 분열 때문에 81?88년 두 차례 연속 엘리제궁을 좌파에게 내주어야 했던 우파인 만큼, 이번 선거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단일 후보를 내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단일 후보는 누가 될 것인가. 여론조사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발라뒤르 총리가 단연 유력한 후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단내지지 기반이 약하므로 언제 돌아설지 모르는 여론에만 의존해야 한다는 약점을 안고 있다. 반면 철저한 드골주의자 시라크는 RPR 내에서는 충실한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있지만 일단 당조직을 벗어나면 영향력이 현저하게 감소한다. 게다가 이미 세 번이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경력이 그의 치명적인 오점이다. 한편 조직 명에서 시라크보다 열세에 놓은 발라뒤르측은 중도 우파 UDF를 관리하는 일에 각별히 신경을 씀으로써 공백을 줄여보자는 작전을 꾸준히 실천해 왔다.

 이렇게 볼 때, 우파 지도급 인사들을 둘러싼 최근의 각종 부정부패 사건들은 발라뒤르 총리 진영에 예기치 않았던 먹구름을 몰아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간의 관심이 총 집중되고 있는 추문의 중심 인물이 다름 아닌 UDF 출신 현 상공장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난 여름에도 이미 비슷한 추문으로 인하여 방송통신장관이 사퇴한 전적이 있으므로, 도덕 정치를 기치로 내걸었던 바라뒤르 정부로서는 상당히 거북한 상황을 맞게 된 셈이다. 국민에게 약속한 깨끗한 정치를 위해서라면 사법부의 의심을 사고 있는 장관에 대해 가차없이 단호한 조처를 취해야겠지만, 문제의 장관이 발라뒤르 지지자인 데다 UDF의 실세인 탓에 선뜻 결단을 내리기 곤란한 상황이다. 지난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한 주된 원인 중의 하나가 바로 집권 당시 발생한 일련의 부정부패 사건이었음을 아직도 국민들이 생생히 기억하는 만큼, 이번 사건 처리 과정이 다음 선거에서 중요한 관건이 되리라는 점은 명백하다.

 UDF 출신 후보는 제쳐놓고라도, 만년 낙선후보 시라크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것인가, 여론 조사의 총아 발라뒤르를 밀 것인가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우파와는 반대로 프랑스 좌파는 내세울 만한 후보가 없어 전전긍긍하는 형편이다. 좌파의 중심 세력인 사회당의 경우, 작년 4월 총선 패배의 책임을 물어 당내 인사 개편 후 새로 당수에 추대된 총리 미셸 로카르가 당연히 차기 대통령 후보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그는 94년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사회당이 또다시 참패하자 당수로서의 역량은 물론 대통령 후보로서의 정당성마저 문제시되어 모든 직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사회당은 1년이 채 안되는 기간에 바닥까지 떨어진 당원들의 사기 수습, 국민의 신뢰 회복, 대통령 후보자 추대 등등의 산적한 과제를 안은 채 선거운동 체제에 돌입해야 한다는 커다란 부담을 안게 되었다. 95년 대선에서는 도저히 전열을 가다듬어 사울 형편이 못되니 7년 뒤인 2002년에나 대비하자는 자포자기적 패배 의식을 떨쳐버리는 일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다.

 사회당 대통령 후보로 현 유럽공동체(EC) 집행위원장인 자크 들로르가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이같은 맥락에서이다. ‘미스터 유럽’자크 들로르가 올 들어 프랑스 정치계에 혜성처럼 나타난 것은 물론 아니다. 10년째 브뤼셀에서 군림해온 자크 들로르는 물갈이가 유난히 더딘 프랑스 정치판에 식상한 유권자들의 새 얼굴 기대 심리가 표면화할 때마다 새로운 좌파 지도자로서 신화를 구축해왔다. 사회당 집권 초기 3년간(81∼84년) 장관을 맡은 경험 외에는 국내 정치 표면에 나설 기회가 없었던 까닭에 고령(69세)인데도 새 인물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10년 전만하더라도 오늘날과 같은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유럽공동체의 집행위원장에 임명되어 브뤼셀로 ‘귀양’갔던 그가 귀양살이 덕분에 주가를 올렸으니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들로르의 지지자들은 유명무실하던 유럽공동체를 명실상부한 세력 기관으로 탈바꿈 시킨 그의 업적이야말로 대통령 후보로 내세울 만한 으뜸가는 강점이라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외교 협상 실무를 쌓았으며, 구미 각국의 수뇌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친분을 맺은 것 또한 다른 프랑스 국내파 정치인들의 부러움을 살 만한 대목이다. 특히 독일 헬무트 콜 총리와는 유별나게 돈독한 관계를 맺고 있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프랑스?독일 관계의 유지 및 강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리라는 전망이다.

 또한 프랑스ㅔ서 다음 대선의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사회 보장이나 고용 문제역시 들로르에게 친숙한 분야이다. 청년 시절 노동조합 운동을 통해 정계에 바를 디딘 그는 현재까지도 프랑스 주요 노동조합 조직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럽공동체 예산의 상당 액수가 회원국 간의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보조금으로 지출되는 것도 사회 보장을 중시하는 들로르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이렇게 볼 때 프랑스 좌파 내에서 들르로 카드를 제시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점차 가속화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당사자인 들로르 자신이 아직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공식적으로 들로르는 집행위원장 임기가 끝나는 내년 1월 초까지는 유럽공동체 업무에만 전념하겠다는 입장을 누차 밝혀 왔다. 따라서 그는 국내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이같은 그의 침묵이 무수한 논평을 낳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미스터 유럽’ 들로르, 내년 초 결심할 듯
 관계자들은 그를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가족 문제를 꼽는다. 그는 집행위원장 직을 사임함과 동시에 정계를 은퇴하기로 부인과 굳게 약속했다. 또한 자신의 출마로 말미암아 요즈음 한창 사회당의 ‘떠오르는 별’로 각광받기 시작한 그의 딸 마스틴 오브리의 정계 진출에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부성애적 배려도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 출마한다고 해서 반드시 당선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도 들로르로 하여금 은퇴후 조용히 살고 싶은 유혹에 글리게 하는 요소이다. 지난해부터 꾸준히 실시된 여론조사에 다르면, 들로르는 시라크가 우파 후보자로 출마할 경우에는 어렵지 않게 승리할 수 있으나 발라뒤르 총리와 대결하게 되면 10% 정도 차이로 낙선할 것으로 예측된다.

 비록 최근 폭로된 여권 인사 부정부패 사건으로 말미암아 발라뒤르 총리의 신임도가 약간 하강 추세를 보이고 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우파에 대한 경계심이 좌파에 대한 지지율 상승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는 한 들로르의 출마가 반드시 낙관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로르의 출마를 확신 내지 희망하는 측은 좌파 입후보 공석이라는 전에 없던 위기상황에 책임감을 느낀 들로르가 빠르면 내년 1월 중순, 늦어도 2월초까지는 ‘십자가를 질’ 의사를 확실히 하리라고 전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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