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넘나드는 작가 늘고 있다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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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쓰는 시인, 시쓰는 소설가 등 ‘汎장르 작가 시대??열려

 기존의 장르는 고정관념이다. 그 장르는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시 소설 에세이 희곡 그리고 비평 등의 문학장르는 산업혁명 이후 생겨난 ‘나이가 그리 많지 않은??구분이다. 이 장르들이 영원할 것이란 믿음은 따라서 허황하다. 영화?전파매체 그리고 최근 무서운 기세로 미디어 환경을 뒤엎고 있는 컴퓨터(정보) 산업은 펜에 잉크를 찍어 종이 위에 글을 쓰는 ??문학??의 무력감, 나아가 위기감을 갈수록 심화시킨다.

 한국 사회가 후기산업사회에 “진입했다??, 혹은 후기산업사회에 ??한발짝 들여놓았다??고 표현되고 있는 이때, 문학의 장르들은 안팎으로 어떤 변화의 징후를 보이고 있는가. 그 변화의 한줄기는 ??汎장르 작가?? 혹은??장르 넘나들기??라는 새로운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인이 소설을 쓰고 비평도 하며, 소설가가 시 희곡 나아가 영화와 시나리오에도 손을 댄다. 시인과 소설가는 ??죽고??대신 장르를 넘나드는 넓은 의미의 작가만이 살아남게 된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최근에는 ??작가도 죽었다??는 논의도 활발하다).

“한 장르만으로 현실 대응력 약하다??
 “시를 餘技로 여기지 않는다.?? 최근 시집 《열애일기》(문학과지성사)를 펴낸 중견소설가 韓勝源씨의 시집 후기는 아직도 한국 문단의 장르에 대한 고정관념이 단단함을 반증하고 있다. 80년대 후반 들어 줄어들긴 했지만 문학적 엄숙주의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 시인 작가가 다른 장르의 글을 쓰는 것을 ??화제??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장르의 벽은 허물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장편소설집을 내놓은 젊은 시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만으로는 현실과 대응할 수 없다. 기존의 장르는 사회, 즉 독자의 변화를 감당해 낼 수 없다.?? 범장르 작가들은 장르 사이의 단단한 벽이 한국 사회 자체의 규격?획일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석한다. 《세계의 문학》 이영준 주간은 ??기존의 장르들이 장르 내?외부로부터 위협받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범장르 작가의 등장은 ??시에 소설이, 소설에 시와 비평이, 비평에 에세이적 요소가 혼합되는 장르해체 혹은 탈장르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고 말한다. 산업사회의 ??무서운 가속도??가 인간과 문학의 위기를 가져오는 바, 그 기미들 가운데 하나가 장르간 벽 허물기라는 것이다. 이씨는 앞으로 범장르 작가들의 수가 훨씬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르 넘나들기가 최근 들어 급작스럽게 나타난 것은 아니다. 李祭夏 高銀씨 등은 이미 60~70년대에 시와 소설을 넘나들었고, 80년대 후반 들어 시인들은 소설을 쓰겠다고 선언했다. 시인 金正煥 鄭浩承 정동주 蔣正一 김영승 구광본 김형경 공광규 그리고 고은씨 등이 소설이 발표했고, 시인보다는 뜸하지만 소설가 천승세 김원일 이문구씨 등이 시나 동시를 썼다. 최동호 이윤택 박덕규 김혜순 정한용 남진우씨 등은 시인이며 동시에 비평가이다. 소설 발표를 앞두고 있는 평론가도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이같은 흐름과 더불어 최근 비슷한 시기에 시인 張錫周 하재봉씨와 소설과 한승원씨가 각각 장편소설집과 시집을 묶어낸 것을 계기로 문단에서는 장르 넘나들기에 대한 그동안의‘무심한 시선??을 거두어 들이고 있다. 장석주씨의 전작장편 《낯선 별에서의 청춘》(청하펴냄)은 평단과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하재봉씨의 장편 《318W. 51stST.》는 제13회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당선작이다. 한승원씨의 전작시집 《열애일기》는 그 선정이 까탈스럽기로 소문난 ??문학과 지성 시인선??에 포함된 것이다.

‘범장르 작가??의 대두는 자연스런 현상
 장석주씨(36)의 《낯선 별…》은 여섯 권의 시집과 두 권의 평론집을 낸 시인이자 비평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주인공 최영호가 서른 여덟이 된 1991년, 17년 전의 그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전적 소설이다. 30대 후반의 독신자인 ‘나??(최영호)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발굴해 ??출판계의 행운아??로 인정받으며 현실적 지위를 마련하지만, 어느날 일상에 진저리를 친다. 37년의 삶은 ??일방적인 소모의 과정??일 뿐이었다. 집, 즉 존재의 처소가 없었던 것이다. 이 소설은 ??비참하게 현실 속에 내동댕이쳐진 존재??가 그 존재의 근거를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가는가를 시적인 문체로 드러낸다.

 긴급조치와 민청학련사건, 광복절 기념식장에서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미수사건 그리고 서울 지하철이 개통되던 해, 그 74년에 스물한살이던 최영호는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작가 지망생이었다. 카프카 볼프강 볼헤르트 김승옥 등의 소설과 에리어트의 시, 비틀스 바흐 양희은을 좋아하던 ‘나??의 스물한살은 반항자, 서투른 아나키스트, 철없는 완전주의자로 집약되지만 ??나??의 개인?사회사적인 체험은 30대 후반의 세대론적 풍경으로 확대된다. 70년대에 대학을 다닌 지금의 30대들에게 입력돼 있는 70년대란 황당무계함의 시절이었고 그래서 환멸 그 자체의 세월이었다.

 ‘청춘에 대한 ??送辭??이기도 한 《낯선 별…》은 성장소설과 연애소설 그리고 에세이소설의 성격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더해준다. 장씨는 내년 초에 장편소설 《천사인들 두려워하지 않으랴》(가제)를 선보일 예정이다. 현재 초반부를 쓰고 있는데 90년대 한국 사회에 나타난 ??나르시스트 예수??를 통해 한국인, 한국 사회를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다.

 시인 하재봉(34)도 범장르 작가의 대표적 주자로 떠오르고 있다. 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된 이래 그는 두 권의 시집을 펴냈고 시 전문지에 시론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도 나와 있듯이 그는 비디오(컴퓨터) 아트나 무용과 같은 장르와의 실험적인 만남에 큰 관심을 지니고 있다.

 하씨의 데뷔소설인 《318W…》는 사보 기자인 35세의 소시민이 가정과 직장을 피해 한달간 뉴욕으로 여행을 떠나 뉴욕에서 자신의 반생과 가정 직장 그리고 한국 사회를 반추하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안락한 생활인인 주인공은 “활자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하는 비디오광이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상황은 결코 편안치가 않다. ??나??는 노조와 회사 양쪽으로부터 돌팔매질당할 것을 알면서도 조그마한 배낭 하나와 비디오 카메라 한대를 들고 뉴욕으로 떠난다. 뉴욕의 허름한 호텔에서 그는 ??세계의 끝?? ??내 삶의 끝??을 곱씹는다. ??나는 왜 한국을 떠났는가??라고 자문하는 그는 자신이 떠나온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밀려왔음을 깨닫고 ??나는 안간힘을 다해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에 떠다니던 시의 혼령들
 장석주씨의 소설이 그렇듯 《318W…》도 유년시절과 20대의 내면 세계가 치밀하게 그려져, 성장소설의 성격을 지닌다(모든 작가의 첫 소설은 거의 성장소설이다). 이 소설은 서울과 뉴욕에서의 ‘나??를 묘사할 때는 극도의 사실적 묘사이지만, 유년시절과 20대를 그릴 때는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속도감있는 ??장면전환??을 보여준다. 서울과 뉴욕, 현재의 ??나??와 지난 시절의 ??나??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는, 자칫 실험성을 내세운 소설들이 드러내기 쉬운 생경함?가벼움 등을 뛰어넘고 있다.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심사위원들(김윤식 이청준)은 이 소설의 견고한 구성과 ??꾼??의 기량을 높이 샀다.

 이 소설은 제목과 신화적 요소의 삽입 등 일부 개작을 거쳐 《왜 연어는 집으로 돌아가는가》(가제)라는 제목의 소설집으로 열음사에서 출판된다. 하씨는 내년 상반기에 90년대 여성의 전형을 그린 소설 《쿨 재즈》를 비롯 세 편의 장편을 낼 계획이다.

 최근에 나온 장편 《해일》을 비롯 20여년간 15권의 작품집을 펴낸 소설가 한승원씨(52)가 시를 쓴 까닭은 앞의 두 시인들이 소설을 쓴 이유와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다. 두 시인이 장르의 위기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라면, 한씨의 시집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고전적인 노래??들이다. 눈밝은 평론가들이 그가 시집을 냈다고 했을 때 ??그럴 줄 알았다??고 지적했거니와 그의 소설에는 시적인 대목이 없지 않았다.

 “시인이 아닌 작가가 있느냐??고 반문하는 그는 ??젊었을 때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20여년 간 잠복해 있던 詩心을 이끌어 낸 것은 5년 전 그를 쓰러뜨린 약물중독 때문이었다. 알레르기성 비염이 제때에 치료되지 않아 약물중독이 되었던 것인데 디스크 십이지장궤양 등 합병증이 나타났다. 그때 죽음과 매우 가까이 있었다. 혹시 ??유고로 발표될지도 모르는 원고들??을 정리하면서 젊은 날에 쓴 시들을 다듬었고, 지난해 내내 새로 시를 썼다. 이번 시집은 <열애일기>와 <연시> 두 연작시와 예전에 쓴 시들로 엮어졌다. 두 연작시는 그가 도달하고 싶은 ??더 높은 세계에 대한 열망??을 불교와 老莊사상 등이 녹아들어간 戀詩 형식으로 노래하고 있다. 에로스와 그 에로스가 닿아 있는 죽음의 세계인 연시들과 함께 자신의 일상과 지난날에 대한 반성들이 빛난다.

 한씨는 “소설은 소설 속의 인물을 통해 작가가 드러나지만 시는 맨살 그대로 드러나 시쓰기의 매력을 느낀다??고 말했다. ??장르 넘나들기는 바람직한 현상??이라는 그는 소설을 쓰는 한편으로 시와 희곡을 쓰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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