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 어두운 서민만 골탕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09.1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증권병을 앓는 이가 지천이다. 가장의 체면이 말이 아니고 사랑에 배신도 당한다. 원금은 날리고 빚까지 져 패가망신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같은 투자자들의 파탄을 그들만의 문제라고 간단히 넘길 때는 지났다. 직접투자자만해도 줄잡아 5백만명. 전국 모든 가구의 절반 남짓이 증시에 몸을 담그고 있기 때문이다.

 샐러리맨 ㄱ씨(관악구 봉천동·34)는 집장만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고 저축한 1천5백만원을 불려볼까 하고 증시에 뛰어들었다. ‘투자 안하면 팔불출’ 소리를 들을 만큼 증권열풍이 한창이던 88년말이었다. 주가지수는 9백선을 힘차게 오르고 있었다. 자본시장 개방과 공신력을 믿고 그는 증권주와 은행주를 사들였다. 초심자라 멈칫거리던 그를 증권사 직원은 “유망하다”고 안심시켜주었다. 88년말 이후 산 주식들은 제법 올라 객장에 나가 보는 것이 사는 낙이 될 정도였다. 주가는 계속 올라 산 지 4개월 후에는 1천선을 돌파했다. “이렇게 돈을 벌 수도 있구나”라는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후 주가는 떨어지기 시작했고 투자자들의 아우성이 커지자 정부는 ‘12·12’라는 초유의 대형부양책을 내놓았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무제한 사들이겠다는데 달겨들지 않고 배길 사람은 없었다. 주가가 오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기 때문이다. 3백만원을 잃고 노심초사하던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이었다. 거기다 주식을 담보로 주식을 살 수 있는 代用제도가 허용돼 현금이 없는 그로서는 안성마춤이었다. 시가 1천2백만원의 대용가격은 9백60만원. 이 금액의 최고 2.5배까지 살 수 있었으므로 그는 2천4백만원어치의 주식을 새로 사들였다. 금융주를 더 사고 일부는 제조업주를 선택했다.

 반짝하던 주가는 웬일인지 또 크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ㄱ씨가 전해 들은 소식은 금융실명제를 염려하던 대주주와 큰손들이 이때를 기회로 모두 주식을 팔아치웠다는 것이었다. 특히 경영권과 관계없는 무의결권 우선주는 깡그리 팔았다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해초 재무장관은 ‘12·12조치’의 번복발언을 했다. 돈푸는 것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실망매물이 쏟아져 대폭락이었다. 게다가 구조적으로 시장에 좋은 요인은 하나도 없었다. 공급과잉과 경기침체, 정치불안은 주가 폭락을 더 부채질했다.

 기가 질린 그는 증권사 직원과 협의, 단기차익을 노리는 이른바 ‘단타’도 해보았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이쯤해서 손절매(주식을 팔아 털어버림)를 했으면 피해액을 줄일 수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그러기엔 잃은 돈이 너무 많았다. 만회하기 위해 신용구좌를 텄다.

 그때마다 정부는 이미 실기한 정책을 펴서 장세는 곤두박질, 파산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쳐왔다. 그의 현재 손익계산서는 적자다. 대용으로 산 주식이 50%나 떨어졌으니 남은 것이 없고 원주식도 가만 있을 리 만무. 그동안 이자다 거래세다 해서 비용을 빼면 영락없는 깡통구좌(잔고 주식값이 외상값보다 적은 계좌)이다. 증권사는 팔기를 종용하고 있으나 만회할 길이 없어 그는 머리가 돌 지경이다. 술로 지새는 날이 많아 증권은 그의 건강까지 위협하는 셈이다.

 ㄱ씨의 경우처럼 깡통구좌가 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정부의 정책대로 따라 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30년 공직생활 후 받은 퇴직금 5천만원으로 투자한 ㅎ씨(58)도 그런 경우다. 증권열풍이 불지 않았으면 은행에 안전투자를 했을 성향을 가진 그가 증권행 막차에 올라탄 것은 올 3월. 3·2부양책 직후였다. 이 약효도 오래 못가고 주가는 내리막길. 정책은 나올 때마다 실기했고 눈치빠른 큰손들은 다 빠져나간 뒤였다. 1천만원 가까이 잃은 그는 오기가 났다. 어떻게든 회복해야 부인 볼 면목이 생길 것 같아 신용거래에 손을 댔다. 마침 증권사가 돈을 빌어 사라는 권유를 해왔다. 5개월이 지난 오늘 그의 거래카드에 남은 돈은 2천5백만원인데 외상을 갚기도 달랑달랑한 액수이다. 신용거래가 무섭다는 사실을 그는 절감해야만 했다. 그는 앞으로 살아갈 일이 막막해졌다.

 ㄷ증권사 객장에서 만난 ㄹ부인은 울어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남편 몰래 투자한 1천3백만원의 돈이 1백만원도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도 계 탄 돈 6백만원 외에 7백만원은 손실을 만회하려고 이리저리 친구로부터 꾸어 쓴 돈이었다. 남편이 알면 이혼하자고 야단칠 것이라고 그는 다시 울먹거렸다. 증권투자가 가정파탄까지 부를 판이다.

 국민개주화를 독려한 정부 덕택에 주식에 맛을 들인 농민 ㅅ씨(48)가 1년 전에 5천만원을 투자해서 지금 남은 돈은 9백만원뿐이다. 소 팔고 밭뙈기 판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농협에서 빌린 1천만원을 생각하면 울화통이 터진다.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해서 샀는데 벌기는커녕 빚만 1백만원이 남았다. ㅅ씨는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부동산투기는 더 이상 안된다는 정부말에 이를 팔아 증권을 산 ㅇ씨(55). 원금 70억원 중 남은 20억원을 손에 쥐고 그는 증시를 떠났다. 다시 증권투자하면 성을 갈겠다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정도 규모라면 작은 큰손은 되니 먹고 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투자에 실패하고 자녀 등록금을 걱정하게 된 ㅇ부인, 혼수자금 7백만원을 거의 날려버린 ㄴ양, 아버지가 남긴 노모 부양금을 탕진한 ㅅ씨 등등 1천만원 남짓의 돈을 날려버린 서민들의 사연은 더 딱하다.

 누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현재 ‘깡통을 찬’ 이들은 대부분 작년 ‘12·12조치’ 전후에 주식을 산 사람들이다. 정부가 무제한 사겠다는데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이어 정부는 말을 번복했고 정보력과 자금력이 뒤진 이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점인 ‘상투’에서 사들였으니 손실액이 간단치 않는 데다가 정부가 가수요를 일으키기 위해 쓴 대용제도, 신용거래에 더 녹은 것이다. ‘홀랑 털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무분별하게 투자하지 않았느냐 하는 지적에 대해 한 투자가는 “대용이나 신용은 정부가 인정한 건전거래”라고 주장한다. 돈을 빌어 왜 샀느냐고 탓하기 전에 정부가 이를 조장했다는 투자가의 항변에는 일리가 없지 않다. 증권투자는 자기 책임 아래 자기신용으로 투자하는 것이라는 구호가 빛이 바랠 수밖에 없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