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 사로잡힌 영혼의 파멸
  • 이세룡 (영화평론가) ()
  • 승인 1990.09.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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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들 대령
감독 : 이스트반 자보
주연 : 클리우스 마리아 브렌다우어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메피스토〉로 알려진 헝가리의 감독 이스트반 자보의 〈레들 대령〉은 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 소용돌이치는 합스브르그 제국의 마지막 해를 배경으로 청년장교의 야망과 배신, 음모를 다룬다.

 레들 대령은 권력과 명예를 위해 자신의 야망을 불태우지만 편집증과 욕구불만으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기만에 찬 한 인간의 놀라운 자화상을 대변한다. 자보 감독은 전작인〈메피스토〉(81년)에서 나치시대를 배경으로, 개인적인 신의를 저버리고 자신의 삶을 전체주의 국가가 원하는 예술가에 맞춰나가는 기회주의적 배우의 이야기로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다. 4년 뒤에 만든 이 작품에서는 예술가대신 군인을 모델로 삼아 어떤 출세에 의해서도 은폐할 수 없는 과거와 비밀을 지닌 인간의 심리상태를 통찰력있게 그려내고 있다.

 가난한 집 아이인 레들은 학교에서 황제를 위한 시를 낭독하여 칭찬을 받고, 선생의 추천으로 사관학교에 진학하여 귀족의 아들인 쿠비니와 단짝이 된다. 레들은 쿠비니의 누이인 카타리나와 알게 되고, 쿠비니를 위해 교관에게 허위 고자질을 일삼는다.

 중위가 된 레들은 발군의 충성심으로 실력자인 로덴 대령의 총애를 받는다. 승승장구, 소령이 된 레들, 엄격한 규율을 준수하는 레들에게 부하장교들은 불만이 많다. 쿠비니와의 우정에도 금이 가지만, 유부녀가 된 카타리나와 사랑에 빠져든다.

 중령으로 진급한 레들은 첩보활동에 몰두한다. 한편 레들을 보호하던 로덴 대령이 군부내 정치싸움에서 밀리게 되자 황실은 레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 이를 눈치챈 레들은 자포자기, 평생의 친구인 쿠비니의 권총으로 자살한다.

 레들의 유품이 거래되는 경매장, 소년 레들이 황제를 위해 썼던 시가 팔린다. 화면은 흑백의 기록필름으로 바뀌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개인의 노력에 상관없이 정치에 의해 몰락하는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 드라마는 타이틀 롤을 맡은 클라우스 브렌다우어의 뛰어난 연기가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픽션과 정치적 사건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이 작품은 권력에 사로잡힌 이기적인 인간의 복잡하고 아이로니컬한 자화상을 드러내는데, 브렌다우어는 절망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가공할 인간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보여주는 자살장면은 일품이다.

 그토록 충성을 바쳤던 조국이 레들에게 자살할 것을 요구했을 때, 레들은 실내에서 미친 듯 돌아다닌다. 권총을쥔 채 절규하며 몸부림치는 레들. 입에서는 궁지에 몰린 짐승같은 신음이 터져나오는데, 레들은 그것이 가장 진실한 자신의 목소리임을 깨닫는다.

 〈레들 대령〉의 화면은 카메라의 움직임이 거의 없으므로 고정되어 있지만, 정교한 연출의 힘으로 한 인간의 비정한 운명과 제국주의 정치의 냉혹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에 들리는 ‘라데츠키 행진곡’외에 악기가 등장하거나 춤추는 장면을 빼면 음악이 전혀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대신 발자국 소리와 총소리 같은 음향효과에 의해서 드라마의 긴박감이 유지된다. 소리와 소리 사이의 침묵이 한 몫을 단단히 해내는 영화. 팽팽한 긴장감이 넘치지만 어떤 때는 쉼표없는 문장 같아서 오락영화에 길든 관객들에게는 적잖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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