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게 ‘영화’를 보낸다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10.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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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선우 감독, <너에게…>에서 의미있는 변신…‘사랑의 몰락’ 통해 현실 풍자.고발

張善宇.감독(42)은 첫 작품 <서울 예수>이후 <우묵배미의 사랑> <화엄경> 같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예측 불허인 감독’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러나 그의 여섯 번째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만큼 격렬한 파격의 이양을 갖춘 작품은 없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포르노 영화라고 자처하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서울 예수>와 <성공시대>의 우화적 표현 단계를 지나 <우묵배미의 사랑>이라는 리얼리즘의 바다를 항해해온 장선우 감독이 94년 가을에 도달한 곳이다. 그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지점이다. 권력과 금력의 울타리, 또는 군사 문화와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 파괴당해 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추찰해온 장선우 감독이 스스로 포르노의 ‘쓰레기더미’로 몸을 던지리라는 것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카메라의 인간선언’을 통해 민중의 영화를 구현하겠노라며 보인 의욕을 기억하는 이들이 이번 작품을 장선우이 변신이 아니라 배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10월1일 이 영화가 개봉된 후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일단의 관객들로부터 박수 세례가 터져나온 것이다. 장선우마저 춘화의 이전투구에 뛰어들어야 하느냐고 비난하던 사람들일수록, 한국 영화가 반드시 민초들의 삶에 집착해야 하느냐고 묻던 사람들일수록 이 영화에 애정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포르노를 택한 대신 기득권을 포기했다”

 장선우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드러내는 것은 ‘희망 없음’이라는 메시지이다. 이데올로기가 좌초한 시대,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던 사랑마저 난타당핸 페허가 바로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현장이다. “고통과 억압은 여전하나 비전은 상실한 시대, 그러나 사랑마저 물화되어 거래되고 있음을 알고 절망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외국 영화제에 나가 보면 한국 영화의 성 표현처럼 거칠고 일방적인 것이 없다”고 전제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는 모습으로 그려질 수밖에 없는 한국인이 사랑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결코 한국 사회를 냉소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한다. 이것은, 풍자인가 아니면 자살 행위인가하고 묻는 이들에 대한 그의 최종 답변이다. “스스로 파괴하지 않으면 냉소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장선우 감독의 자살극이다. “나는 포르노를 택한 대신 기득권을 포기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너희들은 기득권을 버렸느냐? 우리 시대를 정말 아파해본 적 있느냐”라고 되묻는다.

 그의 자살 여향은 그다지 외로워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개봉하자마자 박이 터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흥행에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산의 한 개봉관에는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하루에 8회 상영을 감행할 정도로 관객들이 몰리고 있다. 그러나 그가 외롭지 않은 더 큰 이유는 그의 자살극에 기꺼이 동반해준 사람들 때문이다. 그가 “이 쓰레기 같은 영화에 기꺼이 참여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바로 문성근?여균동?정선경이다.

‘희망 없는 현실’을 향한 자살 공격

 문익환 목사의 아들인 문성근이나 운동권 출신 감독 여균동은 “장감독과 함께 이 영화를 하지 않으면 앞으로 3년은 후회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이들의 절망을 그만큼 파괴적으로 표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감해한 동반자살극은 그만큼 독특한 분위기를 만든다. ‘고 은 선생도 창녀들 편지 써주다 시인이 됐다’는 등 원작이나 대본에 없던 대사들이 현장에서 제멋대로 살아나는 분위기가 바로 그것이다. 관객들로부터 호감을 사는 장면들도 주로 그런 것이다. 배우가 어느 방향을 향해 몇 발짝 걸을 것인가까지 관리하던 장선우 감독이 그저 판만 짜주고 같이 논다는 제작 태도를 보인것은, 이 별난 배우들의 감성을 그대로 수용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전편에 펼쳐지는 니힐의 정서는 거의 모든 성적 행위를 철저하게 가학과 피학의 폭력적 세계로 그려 보인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이 영화는 지적인 관객을 만족시킨다. 관습적으로 영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정사 장면이 가장 중요하지만, 지적 훈련이 되어 있는 관객들에게는 다른 포르노 영화와 달리 유쾌한 풍자극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폐허에서 그가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도 그것을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지배 이데올로기가 은폐하려 하는 것들, 장선우 감독이 그것들을 끝까지 햇빛 속으로 끌어내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한 그는 오히려 언제나 ‘예측이 가능한’감독이다.
金賢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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