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부추기는 미국 언론
  • 이재원 (클리블랜드주립대교수· 언론학) ()
  • 승인 1990.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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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앵커 “전쟁이 임박했음을 느낀다” 며칠간 공언… 근원적 문제 제기 소홀

‘페르시아만 위기’가 발생한 지 한달 보름이 지난 지금 미국은 對이라크 봉쇄를 강화하며 이 지역에 계속해서 군사력을 증강하고 있다. 이같은 상황은 지금도 미국 언론의 주요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사태 발생 이후 쏟아져나온 미국 언론의 보도경향을 재미학자 李在元교수가 진단했다.

냉전의 종식으로 군사강대국의 의미가 퇴색하고 반면에 경제대국의 시대가 오는가 할 즈음에 중동사태가 벌어졌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은 중동에서의 지위향상을 위해 일을 벌였겠지만, 미국 보수세력권의 입장에서는 이처럼 시의적절한 계기가 있을 수 없다.

‘적’이라는 상대가 있어야 기세를 올릴 수 있는 미국의 보수세력권은 냉전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판단 자체를 보류하고 있던 참이었다.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미국 본토에까지 와서 “냉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 선언하는데도, 부시 미 대통령은 “우리의 새로운 적은 불확실성과 불안전성”이라고 강조해왔다. 마치 그러한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중동사태가 적시에 발발하였다.

사태가 터지자마자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이 페르시아만에 병력을 투입하였다. 지상군 투입, 항공모함과 신예 전투기 배치 등의 조치는 전쟁이 당장이라도 일어날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우방국을 참여시켜서 유류공급은 국제적인 관심사라는 점도 부각시켰다. 소련마저도 따라오게 만든 UN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는 미국 주도의 작전을 국제법상으로 추인하는 요식행위가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위상과 힘을 의심하는 사고방식은 치명적인 도전을 받고 있다. 미국은 여전히 강대국이며, 냉전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해도 지역적 분쟁을 통제하는 데에는 군사적 강대국이 필요한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유럽이 유럽공동체로 성장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는 미국 주도의 국제정치에서 벗어날 수 없음도 드러났다. 1인당 GNP가 미국을 앞섰다는 일본도 미군의 전비나 조달하는 처지로 보이게끔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부시 대통령은 컨트리클럽에서 골프공을 쫓아다니며 여유작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정도의 문제로 휴가일정을 취소하지는 않겠다는 자신감의 표시요, 심리전이다. 항공모함 4척 동원, 군병력 20만 투입, 그리고 예비군 동원령을 내리면서, 부시 대통령은 마치 골프공을 사우디아라비아의 모래함정(샌드 트랩)에 떨어뜨리고 고민하는 골프꾼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언론에 있어 중동사태는 ‘가뭄 속의 단비’

후세인 대통령이 이번 모험으로 아랍권의 실세라는 지위향상을 이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반대로 굴욕적인 축출이나 비참한 최후를 맞을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본의 아니게도 미국의 국제적 위상 회복을 돕는 데에 기여하였고, 2년 후에 있을 미 대통령선거에서 부시의 재선 가능성에 일조를 하였다.

미국의 군부세력과 군수산업계 역시 후세인 대통령의 덕을 단단히 보고 있다. 국방비를 대폭 감축해야 한다는 여론이 정착기를 맞지 못하고 꺾여버렸다. 미 해군은 항공모함이 역시 긴요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고, 공군은 F-117A스텔스 폭격기의 위용을 과시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해병대와 육군은 특별기동사단체제의 편제가 지역분쟁 개입에 안성맞춤인 것을 과시하고 있다.

미국은 근년에 그라나다, 파나마 같은 상대가 되지 않는 소국에 미미한 명분으로 무력을 휘둘렀다고 빈축을 받아왔었다. 그러나 이번의 중동사태는 판이하다. 1백만명의 군대를 가진 이라크가 소국일 수는 없다. 문제의 핵심인 유류공급 역시 어느 한 나라만의 관심사가 아니다. 분쟁의 범위도 중동을 망라하고 있다. 미국이 떳떳이 싸워볼 만한 조건이 구비된 호기이다.

또한 전쟁이 발발해도 미군은 전략, 장비 등에서 유리하기 때문에 승산이 확실해보이기도 한다. 육중한 항공모함으로 해로를 차단하고 스텔스 폭격기로 위협비행을 하면 후세인 대통령은 심리적 위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공격목표가 뚜렷이 드러나는 지형이어서 전쟁 자체도 단기전으로 끝나기 쉽다. 미군은 실전을 않고 심리전으로 이길 가능성도 있다.

미국 행정부내에서도 보수세력이 전성기를 맞았다. 동유럽과 소련의 변혁으로 외교와 군축이 주요 관심사일 때에는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이 ‘대통령 대행’이라는 별칭을 들을 정도로 각광을 받았었다. 그러나 중동사태 발발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딕 체니 국방장관이 행정부의 제2인자처럼 바빠졌다. 흑인으로서 미군의 총수자리에 오른 컬린 파월 합참의장 역시 늠름한 모습을 부지런히 보이고 있다. 그를 두고 일부에서는 “이 사람이야말로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될 자격을 갖추었다”는 평을 흘리고 있다.

중동사태는 미국의 언론매체에게도 시의적절한 소재를 안겨주었다. 미국의 언론은 낙태법 분규, AIDS 논쟁, 무역역조, 신용금고의 대규모 비리와 같이 아무리 토론해도 뾰족한 결론과 해결책이 없는 문제를 가지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독자와 시청자를 지루하게 만들고 있던 참이었다. 무더운 8월의 여름날씨에 신선한 소재가 빈약한 때였고, 텔레비전 역시 새 시즌 가을을 앞두고 묵은 프로그램을 재방영하는 것으로 시간을 메꾸고 있었다. 누구나 휴가와 여행을 즐기려는 철에 휘발유 값을 껑충 뛰게 만든 중동사태는 독자와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좋은 소재가 되었다.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해야 하는가’

언론매체는 중동사태에서 특종을 내는 것이 주임무인양 뛰었고, 전쟁이 당장 터질 듯이 보도했다. CBS방송망의 뉴스 프로그램의 대표적 앵커 댄 래더는 여러 날 저녁에 걸쳐 “전쟁이 임박한 것을 육감으로 느낄 수 있다”고 공언하였다. 시사주간지 《타임》 역시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표지를 장식하였다. 〈뉴욕 타임스〉는 이미 8월24일에 ‘미국은 이라크를 공격해야 하는가’라는 제목의 지상토론을 실었다.

호전적으로 전쟁을 부추기는 보도는 텔레비전 뉴스 프로그램에서 좀더 실감있게 나왔다. 중동으로 향하는 한 해병은 “그이(대통령)가 단추만 누르면 뛰어들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사막에서 막사를 설치하고 있던 한 육군장교는 “어떤 행동개시가 없어 심심하다”는 말을 했는데, 그런 내용이 계속 보도되었다.

새로운 인터뷰 감이 없으면 거대한 항공모함이 페르시아만으로 진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미 공군의 폭격기가 무섭게도 크게 보이는 미사일을 적재하고 연습비행하는 장면을 밤낮 되풀이하여 보여준다. 이라크군의 독가스사용 가능성에 대비한 방독면 착용 모습도 계속 나왔다. 영화에서 보아온 우주전쟁 장면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따로 연예물을 제작할 필요가 없게끔 되어버렸다.

이러다가 막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면 가장 섭섭하게 생각할 쪽은 언론매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정치인이 연출하는 국제정치 무대는 정치적 속성에 연유한다고 치더라도, 언론만은-그것도 중립을 표방하는 자유언론만은-위험천만한 사태의 추이에 장단을 맞추는 습성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과 같은 중요 사태를 간단하고 단편적인 사건이라고 볼 사람은 없을텐데, 언론매체가 마치 1백m 경주라도 하는 태세로 보도경쟁을 벌이고 있으니, 좀더 근원적인 문제는 누가 제기할 것인가.

중동사태의 보도에서 미국의 언론매체가 소홀히 다루고 있는 몇 가지 문제점을 열거해 보자.

●이번 사태에서 전쟁은 필연적인 해결책인가. 국내정치에서는 협상을 미덕으로 보는 언론이 어찌하여 국제문제에서는 “부시가 역시 약한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는가.

●전쟁이 시작되면 미군은 과연 며칠내에 승부를 가릴 능력이 있는가. 카터 대통령 시절, 이란에서의 미국인 인질 구출작전 때는 “사막의 모래 때문에 헬리콥터가 망가졌다”는 변명을 들었는데, 이번에는 “사우디 사막의 날씨가 너무 더워서”라는 변명을 듣게 되는 건 아닐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고 하더라도 미군의 주둔은 얼마나 더 계속될 것인가. 그럴 경우 중동 각처에서 미국인 인질극이 장기적으로 심화될 가능성은 없는가.

●미국의 개입으로 아랍국가들의 분열상이 국제화되었는데, 아랍문화권이 앞으로 미국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지는 않을 것인지. 아랍국가들로 둘러싸인 미국의 맹방 이스라엘의 위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의건 타의건 이스라엘이 개입한다면 이를 계기로 중동에서의 전면전 발발 가능성은 없는가.

●중동국가들을 화약고처럼 무장시킨 것은 어떤 나라들이며 어느 나라가 어떤 무기를 얼마나 판매하였는가.

●이란· 이라크전쟁 막바지에 이라크는 쿠르드족 거주지역에서 화학무기를 사용했었는데 당시 강대국들은 왜 그같은 비인도적 행위를 소홀히 취급하였는가.

●중동사태에서 미국의 정책에 협조하고 미국을 돕는 나라들은 과연 민주적인 정치를 하고 있는 국가들인가.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젊은이들을 희생시킬 만큼 값어치가 있는 민주국가인가.

●UN은 이번 경우 거부권 행사가 없었고 결의가 신속하였는데, 이는 국제분쟁시에 UN이 타협의 모체로 재등장할 가능성을 보인 것은 아닌지. UN의 위상을 높이고 실질적 기능을 강화시킨다면 대결의 시대를 마감하고 타협의 시대를 여는 데 UN이 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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