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류 실천이 경제협력 첫 단추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09.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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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끌어내는 일이 선결과제… 직교역부터 시작, 산업협력· 공동사업 등 단계 밟아야
지난 1일 부산항에는 올들어 뜸했던 북한산 원자제가 반입돼 관심을 끌었다. 아연괴 철강재 가발원료 등 2백만달러어치나 되는 북한물자가 들어왔다. 이 교역은 두가지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우선 제3국 우회라는 수송경로를 따르지 않고 원산항에서 직반입된 것으로 알려진 점이다. 다음으로 국내 2개 종합무역상사 등 7개 기업이 중국 흑룡강성 민족경제총공사의 국내판매 회사인 세진상사를 통해 반입한 것이어서 남한· 북한· 중국 3개국 경제협력의 새 형태를 제시한 사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남북총리회담의 성사로 휴면상태에 빠졌던 남북교역이 다시 활기를 띠고 있다. 비록 ‘경제협력을 하자’는 원칙만 거론되었을 뿐 구체적 합의가 도출되지는 않았지만 “이제는 무언가 제대로 되겠다”는 희망을 재계에 던져준 것이다.

 

재계에선 2차 총리회담에 큰 기대

재계는 10월 16일 평양에서 열릴 2차회담을 특히 주목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북한 廷亨默정무원총리와 만난 盧泰愚대통령이 남북경협이 유익함을 지적했을 때 연총리가 “우리는 크게 아쉬운 것은 없으나 인력이 모자라 지하자원을 더이상 개발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다”고 대답한 사실에 고무받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金正宇 대외경제사업부 부부장 역시 “앞으로 남북이 합의를 잘 이뤄 그러한 관계가 되기를 원한다”고 거들었다고 전해진다.

정부는 평화통일을 이루기 위해 꼭 거쳐야 할 단계로서 남북한 경제통합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88년 7· 7선언 이후 남북하나 교역협력에 관한 기본지침(88.10)을 마련하고 남북교역추진민간협의회(90.7)를 설치하고 남북교류협력법(90.8)을 제정하는 한편 3천억원의 남북교류협력기금을 조성하는 등 일련의 조처가 얘기해 준다.

1차회담에서 정부는 경협에 관한 한 매우 신축성있는 대응자세를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물자의 직교역, 상호합작투자 및 해외공동진출, 금강산 설악산 등 관광자원 공동개발, 끊겼던 철도와 도로 복원, 통행· 통신· 통상(3통) 합의서 채택, 경제협력공동기구 설치, 남북한 중앙은행의 청산계정 설치 등을 제안했다. 북한측은 ‘직교역부터’ 하자는 우리측과 달리 ‘합작부터’ 하자고 주장했으나 경제합작과 교류를 실현, 교통· 체신망 연결, 대외 경제관계에서의 협력도모 등을 언급해 경협에 관한 한 남북간에 큰 의견 차이는 없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볼 대 남한측이 경협을 최우선 의제로 내세우는 반면 북한측은 주한미군 철수, 군축 등 정치· 군사적 의제를 앞세워 ‘현실적’ 차이는 여전했다.

정부는 이번의 ‘경협보따리’를 평양회담에서도 거의 그대로 풀어놓을 것으로 보인다. 경제협력과 관련, 새로운 보따리를 자꾸 풀어내 놓기보다는 지금의 의제만이라도 잘 매듭지어 뒤얽힌 남북관계의 실마리를 푸는 일이 중요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국토통일원 崔文鉉 통일정책실장은 “교류의 실천 자체가 분단의 끝냄을 의미한다. 상부상조 정신으로 내용 영역 분야 방법 등 모든 면에서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떠드는 교역을 지양하고 조용히 점진적 확대를 모색할 것이다”라고 밝혀 이념과 체제가 다른 북한을 압박하지 않겠다는 자세임을 비쳤다. 그는 또 경협은 물론이고 정치 · 군사적 문제를 둘러싼 남북한간 이견의 폭을 좁혀나가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재계는 남북경협에 상당한 기대를 걸면서도 입장표명은 유보하는 등 매우 조심스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서둘 것이냐 말 것이냐”를 결정하지 못할 만큼 상황이 불투명하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교역절차 및 품목의 다변화 등을 조용히 추진한다는 기존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럭키금성그룹도 중국 · 북한 국경지대에서 무역이 가능할지 재고 있을 뿐 별다른 계획을 내놓지 않고 있다. 현대 종합상사 기획팀 金正鎬부장은 “획기적 합의가 나오지 않는 한 교역에 한계가 있다”면서 직교역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양쪽 모두가 수용태세를 갖추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같은 신중한 움직임과 함께 재계 일부에서는 직교역 등 경제관계의 진전이 멀지 않았다고 낙관하는 분위기가 무르익는 중이다. 철저한 사전준비가 시급하다는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 남북경협이 이루어지더라도 이해타산에 집착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대자원개발 朱剛秀전무는 “이윤추구가 기업의 생리임은 분명하지만 첫단계부터 북한과 장사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된다. 서로 필요한 품목을 맞바꾸고 협력할 방도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전경련· 대한상의· 무역협회 등 경제 6단체가 남북교역을 활성화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되 과당경쟁이나 실적 위주의 교역형채를 지양, 북한을 자극하지 않기로 방침을 세운 것도 이런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80년 초반에도 제3국을 통해 옥수수 등 일부 곡물과 무연탄 등 원자재가 알게 모르게 반입된 적이 있었지만 지금까지 남북한간의 물자교역은 극히 드문 일에 속했다. 간접적인 형태로나마 교류의 물꼬가 트인 것은 “남북한 교역은 수출입이 아닌 내국거래로 간주한다”는 남북한 물자교역지침(88.10)이 발표되면서부터였다. 상공부 자료에는 그때부터 지난 7월말 현재까지 반출입된 물자가 3천2백53만5천달러(1백4건)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으로부터의 물자반입이 3천2백37만3천달러(1백1건)인 데 비해 반출은 16만2천달러(3건)에 그쳤다. 반입 위주의 기형적 교역이다. 그나마 지난해 상반기까지는 도자기 공예품 술 담배 등 기호품류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한때 무역업체간 경쟁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던 교역은 올들어 급격히 감소했다. 남북한 물자교류가 정치적인 변수에 따라 민감히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익이 없다는 점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까지 북한산 물품은 홍콩 싱가포르 등 제3국에서 남북 상사 관계자가 중개상을 통해 계약을 한 후 제3국 선박을 이용, 공해를 통해 들여왔다. (주)선경 劉鐵雄전무는 “수송비가 많이 드는데다 무관세 등의 혜택마저 제3국의 중개상에 돌아가 결국 남한도 북한도 이익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결국 그동안의 교역은 서로에게 실익이 되지 못했고 북한이 제3국에 판 것을 남한이 되사는 데 불과해 교류라고 부르기도 어려웠다는 지적이다.

정부나 민간 모두는 10월의 평양 고위급회담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북한은 현재 심각한 경제난을 겪고 있는데다 ‘두개의 한국 반대’ 논리의 훼손이나 ‘개방’의 악영향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경협은 진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하는 것이다. 경제계는 직교역과 상호투자의 길이 열리기를 희망하면서 그 추진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북한의 경계심 늦출 완화장치 마련돼야”

한국개발연구원 廷河淸부원장은 “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해서는 경제적 측면에서만 접근할 때 4가지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선 경협은 간접교역 등 어떤 형태로라도 접촉하는 매개단계가 필요하며, 그 뒤 신뢰 · 협력단계를 거쳐 동화단계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3국을 통한 간접교역을 직교역으로 전환한 뒤 기술이전, 노하우 제공 등 산업협력과 직· 간접투자 등 공동사업을 통해 서로가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이 확고해져야만 전면교류라는 경제공동체 조성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부분의 북한문제 전문가는 경협 초기단계에 남한이 대폭 양보해 우선 교류의 마당으로 북한을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있다.

물품교역을 할 때는 원자재는 원자재와, 공산품은 공산품과 바꾸는 수평적 분업형태여야 한다는 의견이다. 비교우위를 앞세운 수직적 교역형태를 북한이 수락할 리 없다는 분석이다. 자원개발· 관광지개발에 남한이 기술과 자본을 대고 북한이 자원과 노동력을 제공하는 공동사업도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남한의 물자가 들어갈 경우 체제가 흔들릴 것을 걱정하는 북한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소련 중국 동유럽 등 사회주의 국가에의 남북한 합작진출 또는 서방국가와의 3자공동진출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정부는 북한이 일본에 금 아연괴 철강 코일 무연탄 게 등 광산물과 수산물을 주로 수출하는 반면 자동차 공작기계류 냉장고 냉동기기 고무 및 플라스틱 가공제품 필름류 등을 수입하고 있어 이를 남한에서 사도록 유도할 생각도 한다. 합의가 된다면 5억달러 정도의 대체교역이 가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 북한이 요구할 경우 차관· 무상원조 등 직접적인 지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국토통일원은 11월초 대규모 북한물산전을 열 것을 검토하고 있다. 이같은 계획은 평양회담이 잘 진행될 경우 무리없이 추진될 것이지만, 설사 평양회담 결과가 기대에 못미치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북한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면서 경협논의를 진전시키겠다고 당국자는 거듭 밝히고 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북한도 스스로를 완전히 고립시켜 ‘포위된 성채’로 남을 수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적극적인 북방정책으로 동유럽· 중국·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가 호전되고 미· 일의 대북한 접근이 진전을 보여 남북한 관계개선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외부환경의 어떠한 변화도 그것이 북한의 내부적 동기에 의해 활용되지 않는 한 의미가 없다”는 것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李庭植교수의 지적이다. 소련과학아카데미 알렉세이 세미요네프 사무총장은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한다. “남북한 경제교류의 발걸음은 ‘유대의 끈’을 강화하고 ‘대치 강도’를 약화하는 것과 보조를 같이한다. 우선은 제3의 국가들과 동반 참여함으로써 이념이 다른 데 따른 충격을 완화할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남한의 경제적 성공에 대한 북한 지도자들의 경계심이 누그러질 것이다.”

남북경협에서 우리가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남북이 ‘한겨레’라는 점이다. 설사 ‘남한 손해, 북한 이익’이라는 손익계산서가 된다 해도 이는 결국 우리나라에 이익이 남는 것이지 외국에 유출되는 것은 아니라는 한 기업관계자의 말은 인상적이다. ‘함께함이 발전을 이루어낸다’는 전제 아래 양보하고 타협해가면서 정치· 경제· 사회체제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를 극복해나가야 한다. 9월의 1차 총리회담은 단절 끝의 시작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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