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누비는 ‘불쾌한 한국인’
  • 방콕ㆍ홍콩 박상기 문화부차장 ()
  • 승인 1990.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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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추구ㆍ과소비 등 추태부리는 해외여행자 갈수록 늘어

동남아 관광을 나온 문모 (61ㆍ서울 용산구 보광동)할머니는 영 마음이 개운치 않다. 환갑 기념으로 어렵사리 여행비를 마련해준 아들 내외에게 차마 낯 뜨거워 말못할 일들을 소위 ‘관광’이랍시고 보고다닌 것이다. 여행사에서 수시로 모집하는 단체 관광단의 일원으로 할머니는 태국ㆍ홍콩의 5박6일 관광코스를 돌고 있는 중이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문할머니는 유서깊은 불교의 나라 태국코스 중에 방콕의 새벽사원, 에머럴드사원 방문 등이 들어 있어 내심 반가웠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태국에 가보니 마음 놓고 부처님께 큰절 한번 드릴 시간조차 없이 바삐 움직이는 바람에 젊은 사람들을 뒤쫓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진 몇장 찍고 훌쩍 옮기는 식이었다. 혹시라도 낯 모르는 같은 관광단의 일행들로부터 “행동이 굼뜬 노인 때문에 일정에 지장이 많다”는 눈치가 보일까봐 “잠시만 지체하자‘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글 선전벽보 ‘코브라 쓸개의 효능’

 그리고 나서 관광단 전용버스에 실려 찾아간 곳이 ‘코브라연구소’라는 데다. 일행 전부를 교실 비슷한 ‘특별설명실’로 안내하더니, 일본여자가 나와 유창한 한국말로 ‘코브라약’ 자랑을 길게 늘어놓았다. 태국의 여러 가지 뱀을 원료로 각종 ‘특효약’을 만들어 파는 곳이라는 것이다. 여행객들이 반신반의하며 머뭇거리자 가이드가 “확실히 효험이 있다”고 장담을 하고 나섰다. 서너 사람의 여행객이 약을 산 다음에 버스에 오르자 화제는 온통 코브라 일색이었다.

 다음 관광지 역시 ‘코브라 뱀집’이었다. 방콕 교외의 민가를 찾아가 살아 있는 코브라의 쓸개를 꺼내먹는 것이었다. 뱀집 종업원이 코브라의 배를 갈라 쓸개를 꺼낸 다음 위스키잔에 담아주면 그걸 마시고, 뱀탕을 한사발씩 먹는 것이다. 한 마리당 30달러씩 하는 것을 한국 남자들이 서로 앞다투며 먹어버렸다. 순 한글로 쓰인 ‘코브라 쓸개의 효능’ 선전 벽보가 붙어 있어 이 뱀집의 주고객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를 한눈에 알게 했다.

 문할머니는 뱀을 잡아먹는 모습을 지켜보려니 속이 메스꺼웠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일은 그날밤에 벌어졌다. 일행 중에서 40대 남자가 ‘화끈한 것’을 보러가자고 하자 일행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찬성한 것이다. 할머니는 호텔로 돌아가 쉬고 싶다고 말했으나 “할머니 한분 때문에 단체버스를 호텔까지 운행했다가 다시 나올 수 없으니 다수결에 따르시라”는 핀잔 섞인 권유를 받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할머니는 적지 않은 입장료를 내고 라이브쇼장에 끌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가 별 해괴망칙한 짓거리를 하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날부터는 “관광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집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들더라”고 말했다. 본의 아니게 할머니는 배가 갈라져 꿈틀거리는 코브라와 난잡한 음란쇼를 태국여행의 하이라이트로 기억해야 할 판이다.

 문할머니의 사례에서 보듯이 태국을 찾는 일부 한국인의 행태는 지나치게 무례하고 난잡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방콕 동남방 1백50km 지점의 파타야시 해안과 산호섬의 해수욕장에 한국인이 오면 20세 전후의 현지 아가씨들이 다가와 “안마! 안마! 좋아요” 하며 속삭인다. 실제로 10달러씩을 내고 야자수 그늘 아래 누워 안마를 받고 있는 사람은 대부분 한국사람이다. 본인은 이국 여자의 서비스를 받으며 선민의식에 젖어 있을지 모르지만 이 풍경을 바라보는 외국인들은 눈살을 찌푸리기 십상이다. 파타야는 태국의 대표적인 휴양지로 2만명의 상주 인구보다 훨씬 더 많은 외국 관광객이 항상 붐비는 곳이다.

 밤이 되면 방콕의 파퐁가나 파타야시 일대의 환락가에는 ‘여자사냥’을 나선 한국 관광객이 삼삼오오 몰려다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남자끼리 단체를 구성하여 왔을 경우에는 ‘섹스관광’은 거의 필수적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다. 에이즈(AIDS) 공포로 다소 주춤해졌다고 하나 ‘마사지 팔러’나 ‘라이브쇼’등을 즐기고 여자를 사는 것을 당연히 하는 예가 흔하다. 한때 동남아 일대에서 악명 높던 일본인의 섹스관광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는 것 같다. 현지 교민의 귀띔에 따르면, 이제는 공항에 내리자마자 비밀 매춘조직을 통해서 ‘여자 파트너’를 구해 여행기간 내내 함께 지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해외여행 초심자가 아닌 이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곳’에 대해선 현지 가이드 못지 않게 밝다는 것이다. 방콕에서 한양쇼핑센터를 경영하고 있는 安弘燦(51ㆍ한ㆍ태교류협회장)씨는 “한국 사람은 자기보다 좀 못사는 나라에 오면 대번에 우쭐해져서 안하무인이 되고 탈법행위를 저지르는 버릇이 있다. 돈 몇푼 주면 무엇이든지 다 되는 줄 알고 으스대다가 큰코 다치는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며 현재 한국인 2명이 마약사범으로 수감되어 있는데, 이들 역시 그런 류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한국 관광객 잘 구슬리면 떼돈 번다”

 태국여행의 대표적 탈선이 퇴폐행각이라면, 홍콩은 무절제한 쇼핑의 무대이다. 홍콩관광이 문화감상이나 휴양목적으로 짜여 있는 것이 아니라 쇼핑 틈틈이 해양공원, 천세문 등을 잠간씩 들러보는 격이다. 한약재상가 전자제품점 귀금속점 교포가게 중국백화점 의류점 보석점 등을 돌다보면 점점 쇼핑액수가 늘어나게 된다. 일행 전체가 한 버스로 움직이므로 싫은 사람도 빠지기가 쉽지 않다. 단체관광객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코뚜레를 잡힌 소처럼 이 가게 저 가게로 끌려다니게 된다.

 ‘홍콩에는 가짜가 많다’고 잔뜩 경계하는 사람일지라도 가이드의 입심과 홍콩상인의 상술에 얼이 빠져버려 나중에는 평소의 쇼핑감각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가이드가 안내하는 점포에는 대개 종업원 중에 한국교포가 한두명씩 있는데 이들이 한국관광객을 요리한다. 한약재상가에서는 “무료로 진맥을 해주겠다”고 꼬드겨 “어디가 몹시 안 좋으니 이 약을 먹어야 한다”고 내놓기도 한다. 또 한국사람의 에누리 버릇을 역이용하여 “이곳은 진품만을 파는 곳이기 때문에 절대로 깎아줄 수 없다”고 딱 잘라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한국손님은 대개 기가 꺾여 깎아달라는 얘기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쇼핑액수 중 10~30%를 가이드가 부수입으로 챙기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므로 여행객은 십중팔구 바가지를 쓰게 되어 있다. 우리 여행객들은 녹용 웅담 한약 등을 사고 반지 목걸이 시계 카메라 골프채 등에 지갑을 내밀다보면 돈이 모자라게 마련이다. 카드로 구매할 수도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은 사람은 외상도 가능했다. 한국내 시중은행의 온라인 계좌번호와 예금주를 알려주며 귀국한 후에 그 번호에 한국돈으로 입금시키라는 것이다. 여권과 해외여행 신청서에 의해 한국측 여행사가 확실하게 신원을 파악하고 있으므로 이런 식의 외상 거래를 해도 돈 떼일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외상거래는 방콕의 한약상에도 통했다. 그만큼 한국인의 신용을 알아준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다분히 하나라도 더 팔려는 현지상인들의 술책일 뿐이다. 그래서 “한국 단체여행객 몇 팀만 잘 구슬리면 떼돈을 번다”는 말까지 들려오고 있다.

 한국 보르네오가구의 홍콩지사에서 근무하는 申鉉民씨는 “몇천달러씩 물건 사재기를 하는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다. 보통 10~20명되는 일행 중에서 돈 많은 한두 사람이 먼저 과시적인 쇼핑을 하면 뒤따라 모두가 무분별한 충동구매를 하는 것 같다”며 우리의 ‘선물문화’도 과도한 해외쇼핑을 부채질하는 요인이라고 진단했다.

 해외여행이 전면 자유화된 지난 89년 1월 이후 엄청난 인파가 몰려나가고 있다. 교통부의 자료에 따르면, 88년에 72만5천명이던 내국인출국자가 89년에는 1백21만명으로 늘어났고 올해에는 2백만명선에 육박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 이들이 해외에 나가 뿌리는 여행경비는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지난해에는 88년에 비해 91%가 많은 25억9천만달러를 쓴 것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은 외화를 너무 쉽게 낭비해버리는 것이다.

 초심자는 관광 위주의 그룹여행을 택하지만, 해외 사정에 밝은 이들은 골프 스키 피서 사냥 낚시 등의 목적형 호화여행을 떠난다. 무려 2천여개에 이르는 우리나라 여행업체도 고객유치를 위해 호화ㆍ사치성 상품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밖에도 기업체의 보너스여행, 효도관광, 신혼여행, 초중고 학생의 연수 등 이제 해외여행은 우리의 생활 저변에 깊숙이 번진 하나의 생활 양식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해외여행이 국민의 국제화 감각을 키우고 식견을 넓혀주는 긍정적 측면보다 향락추구ㆍ과소비 등의 부정적 형태로 번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고려여행사의 홍콩가이드 劉載現(31)씨는 “여행자유화 초기에는 해외여행의 경험이 없으므로 환경ㆍ문화ㆍ관습 등의 차이에서 오는 실수가 많았는데, 그런 점은 이제 많이 고쳐졌다. 그 대신에 돈으로 환락을 사서 즐기자는 졸부근성, 남이야 뭐라든 나 좋으면 그만이라는 막무가내식 행동이 점점 두드러져가고 있다”며 걱정했다.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나가서도 샌다’는 속담처럼 우리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 해외여행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는 10월초의 추석 5일 연휴는 시간이 없어 미처 해외여행을 떠나지 못한 사람을 들뜨게 하고 있다. 여행사마다 4, 5일 일정의 ‘추석특선’ 여행상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이들 역시 세계 곳곳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이미지에 먹칠하는 ‘추악한 짓’과 ‘꼴불견 행태’를 저지르지 않을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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