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가 고장나면 내 몸이 아프다”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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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 통달한 ‘쇳물인생’ 延鳳鶴씨 ? 포철 技聖 1호

현장 근로자 홀대하는 풍토, 정부?경영자 책임 커

 쇠에도 생명이 있다. 가열로에 따라, 시간에 따라 사람의 기술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포항종합제철 공작정비본부 2층에는 꽤 색다른 느낌을 주는 방이 하나있다. 방문 앞에는 ‘기성’(技聖)이란 팻말이 붙어 있다. 바둑이나 장기의 뛰어난 명수를 일컫는 이름이 아님은 기성이란 한글 밑에 작게 쓰인 영문 ‘Saint Technical'에서 비로소 짐작이 된다. 기능인으로서 그 기술 수준이 신의 경지에 올라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기능인의 최고 예우인 셈이다. 이 방의 주인은 국내 기성1호인 延鳳鶴(55)씨다.

 포철이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는 수십명의 임원, 이보다 더 많은 부장, 더욱 더 많은 과장이 있지만 기성은 오직 한사람뿐이다. 기성을 우리 전통사회에서 찾자면 대행수(大行首)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도통한 경지에 이른 사람들이라고 전해진다. 이를테면 무쇠장이 행수의 경우 무쇠를 혀로 핥아 그 단단한 정도를 3백60차등으로 식별하는 능력을 가졌다고 한다.

 

한국의 공작기술 선진수준으로 끌어올려

 연봉학 기성은 현장점검과 작업검토 및 방법제시에 하루를 모두 쏟아붓는다. 국산화추진회의 등 많은 회의에도 참석해야 한다. 쉴새없이 울리는 전화소리가 마음놓고 차 한잔 마실 짬도 허락하지 않는다. 걸려오는 전화의 태반이 “생산이 중단되고 있으니 고쳐달라”는 절박한 ‘구명신호’이니 곧이어 계단을 내려가는 구둣발소리가 요란할 수밖에 없다.

 서울 여의도의 4배반인 2백75만평이나 되는 포철의 공장 어느곳에나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 하루종일 그는 기계설비의개보수 요청을 받는다. 아침에는 제강공장에 달려가고 저녁에는 열연공장에서 씨름하는 식의 나날이다. 그의 손끝이 닿으면 꿈쩍을 않던 집채만한 설비들이 굉음을 내며 움직인다. 그는 포철의 해결사인 셈이다. 빡빡한 틈새를 비집고 시간을 내 기술서적도 탐독한다. 그래서 그의 하루는 치열하게 바쁜 삶일 수밖에 없다.

 그때그때의 개보수 요청외에 연봉학 기성은 고정 추진업무를 맡고 있다. 제4고로의 냉각판(스테이브 쿨러) 설치 공사인데 소요기간 1년4개월의 대규모 작업이다. 완공목표는 내년 4월이다. 용광로에서 끓인 쇳물(선철)은 고로에 옮겨지는데, 이 과정에서 고로 내벽에 설치되어 있는 내화벽돌이 쇳물에 의해 녹아 내린다. 냉각판 설치 공사란 이 내화벽돌 벽을 헐어내고 냉각판으로 이를 대체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고로의 수명이 최소한 2년이 연장돼 3백20억원의 절약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고로의 불을 끌 수는 없기 때문에 정확히 1천4백61개의 구멍을 뚫어 노체 바깥에서 고리를 넣어 위에서 내려보낸 냉각판을 ‘낚시질’하는 철피설계를 우선 해야 한다. 남은 벽돌을 몽땅 털어버리기 위해 화약을 넣어 제거하는 발파공사와 한군데에서 이를 조정할 수 있는 종합계기판을 만드는 전기계장 공사 등 사전에 준비해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다. 이렇게 충분한 사전준비를 한 후 8일만에 해치워야 하는 어려운 공사를 부여잡고 그는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참된 기능인이라면 자기가 다루는 기계설비의 고장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가면 느껴야 한다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아니고 그대로 설비가 자기 몸이 되어야지요.” 이같은 장인정신에 많은 ‘쇳물인’들도 공감을 표시한다. 특히 76년 8월 제2고로 BFG관(용광로에서 쇠를 녹일 때 코크스?철광석 등이 녹아 가스가 발생하는데 이를 가스저장탱크까지 옮기는 통)압축사고 후 강한 폭풍우의 악조건 속에서도 천막을 치고 용접작업을  해 이 설비를 되살려 낸 그때를 기억하는 이들은 더욱 그렇다.

 연봉학 기성은 1기 설비공사가 한창일 때인 71년 8월에 포철에 들어왔다. 입사 이래 줄곧 공작정비공장에서 일해왔다. 대형 특수 製罐류의 제작 및 공정관리 분야에서는 국내 최고 수준의 기능보유자로, 우리의 공작기술을 선진국 수준으로 올려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때부터 그이 쇳물 인생은 숱한 신화를 만들어낸다. 외국에서 들여온 기계설비의 국산화를 시도, 대부분 성공한 것이다. 71년 파일(건축물의 밑바닥에 박는 기초재료) 재생을 필두로 73년 출입구관, 배기상승판 및 열풍로(용광로에서 나와 식은 쇳물을 데우는 설비) 제작에 이어 래들(용광로에서 나온 쇳물을 제강공장까지 옮겨주는 설비)의 국산화 성공은 그의 70년대 역사였다. 79년 9월 제1제강공장에서 쓸 1백톤짜리 轉爐 2기의 국산화는 그의 진가를 본격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3억2천만원의 예산절감 효과를 가져왔는데 일본인들조차 그의 기술에 놀랐다는 일화를 뿌렸다.

 이어 후드 스커트(전로에 부착된 가스 수집 배출용 통로)의 국산화 성공(예산절감 효과 4억6백여만원)은 그의 포철에서의 위치를 더욱 확고하게 만든다. 후드 스커트는 쇳물?생석회 등이 뒤섞어 있는 전로의 내용물을 산소로 취련해 양질의 ‘鋼’을 만들 때 발생하는 가스와 엄청난 열을 잡아서 식혀주는 설비다. 이 속에는 1백72개의 파이프가 부착돼 냉각수를 뿌려주는데 조금이라도 잘못 만들어 물이 들어가게 되면 1천5백~7백℃의 전로가 폭발한다. 그는 당시 우리 기술수준으로는 어림없다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놓았다.

 이러한 설비국산화의 공으로 그는 76년 12월 포철 최초의 기성보가 됐고 과학기술상 대통령상(77년 4월)을 받는다. 그이 기능인으로의 치열한 삶은 84년 4월 절정에 달한다. 최고의 영예인 기성으로 선정된 것이다.

 

쌓아온 경험지식 후진에게 물려줄 작정

 연봉학 기성의 ‘쇠’와의 만남은 1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남 성천이라는 두메산골에서 월남한 까까머리 총각이 이리저리 떠돌며 고생하다가 대한중공업(인천제철의 전신)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처음 그에게 주어진 일은 정을 대고 앵글을 깎아내는 망치질이었다. 정머리를 바로 치기 위해서 온신경을 그곳을 집중했다. 집에 와 밥을 먹을라치면 손이 떨려 숟가락의 밥이 다 흩어져버릴 정도였다. 이렇게 열심히 해도 잘못한다고 발길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기술없는 설움을 톡톡히 당한 셈이었다. 기술을 배워야 되겠다고 다부지게 마음을 먹었으나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가스절단공의 눈을 피해 그 기술을 혼자 배웠다. 그는 오늘이 있기까지 한사람의 선배를 은인으로 꼽는다. 60년 호남비료에 다닐 때 그로 하여금 제관분야에 눈을 뜨게 한 사람이다. 도면을 이해하지 못해 찾아간 그를 이 선배는 자상하게 잘 가르쳐주었다.

 쇠에 대한 도전은 포철 입사 후 비로소 개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입사 당시 직속과장이 있던 고 김준영 이사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공구가 있으면 누가 못해. 공구를 만들어서라도 파일을 재생해야지”라는 상관의 질타는 고철을 주워 공구를 만들게 했고 그는 비로소 기능인으로 성숙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줄달음을 쳐온 그도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유혹을 받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나주비료에 있을때 그는 작업중에 담배를 피운다고 호통치는 선배의 말이 서러웠고, 혹독한 근로조건에 몸은 만신창이 상태였다. 같이 들어가겠다고 쪼그리고 앉아 몇시간씩 기다리고 일쑤인 아내를 보기가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게 해도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정말 사는 것이 이런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이때가 자칫하면 기능공 인생을 도중하차할 뻔한 시련기였다는 것이다.

 이런 고비를 넘긴 뒤에도 그의 앞길은 산 너머 산의 가시밭길로 이어질 뿐이었다. 불가항력이라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그는 ‘할 수 있다’는 자기암시를 끊임없이 계속했다고 말한다. 관련자료를 구해 밤을 새며 읽은 적도 많았다.

 그는 흑판과 분필을 좋아한다. 항상 ‘불난 호떡집’ 같은 그의 방에는 이제 막 기능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젊은 기능인들이 몰려든다. 한 기능인은 입사초기 연수원에서 강한 인상을 받고 갈수록 그를 흠모하게 되더라면서 ‘그림자도 밟지 못할 분’이라고 어려워한다. 워낙 인기가 좋아 연수원에서는 그를 한번도 빠뜨리지 않는다. 고정 교육선생님이다. “정확히 계산을 했는데 아귀가 맞지 않았다. 왜 이렇게 됐는가?” 후배의 이런 물음에 그는 자상하게 흑판에 기계설비를 그린 뒤 설명해준다. “쇠는 계산된 수치보다 더 많이 줄어들어. 이를 감안해?”.

 그는 자신이 기술을 배울 때 선배들이 가르쳐주지 않아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쓴 기억을 떠올린다. 폐쇄적인 기능인들의 사고방식은 경제발전을 그르치는 일이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는 남은 생을 쏟아 자신이 갖고 있는 경험과 이론을 이들에게 모두 옮겨줄 작정이다. 이미 제관에 관한 교재가 완성단계에 있다. 그동안 자신이 개발한 설비를 만드는 법과 작동법 등을 자세히 기록해놓았으며 기능인이라면 누가 봐도 만들 수 있도록 매뉴얼화돼 있다. 그의 서류함에는 이런 자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그는 젊은이들이 제조업 근무를 기피하는 오늘의 세태를 ‘망국병’이라고 우려한다. 젊은이들이 산업현장을 꺼리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한다. 그러나 이렇게 된 데는 정부와 경영자의 잘못된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산업현장의 근로자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풍조가 이러한 결과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모두가 우리경제의 살길은 기술개발뿐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생산현장의 사람들을 홀대해온 탓이다. 아직도 생산직보다는 관리직이 위에 있다는 고정관념이 우리사회에 뿌리깊다. 기술 우선, 생산현장 중시의 시각이 좀더 확산되지 않는다면 기술력 제고란 구호는 공염불이 될 수밖에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이를 위해 정부가 유명무실화한 기존의 기능장 제도를 활성화시키고 노동부가 내년부터 시행하려고 하는 ‘명장’제도를 제대로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나타낸다. 이런 실정에서 보면 포철의 기성제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겸손해야 ‘철의 신비’ 터득

 기성제도는 포철 특유의 인사제도다. 일본 야하다제철의 숙노제도와 일본강관의 참사제도, 독일의 마이스터제도 등을 조사?연구해 참고했다고 한다. 회사인력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기능직 사원에게 신명나게 일할 수 있는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기능?기술수준을 높이려는 취지였다. 75년 당시 사장이었던 朴泰俊씨는 이 제도 시행에 앞서 “베토벤과 같은 악성의 경지에 이른 기능인에게 이 기성자격을 주어 기술수준 향상을 꾀하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현재 포철에는 卞盛福씨 등 11명의 기성보가 선발되어 있다.

 내년 4월에는 제2의 기성이 탄생할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기능수준이 성인의 경지이거나 이에 준한다는 이들을 선발하는 기준은 그래서 꽤나 까다롭다. 기성이나 기성보는 그 분야의 기능수준이 최고여야 함은 물론이지만 인격이나 가정생활 등 모든 면에서 전사원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포철은 15년 동안의 기성제도 운영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생산성이 높아지고 낡은 설비의 개조 및 국산화를 통해 설비의 신예화를 이루었다고 판단한다. 또 이들의 산 경험을 전파함으로써 작업원의 기능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됐다고 본다. 앞으로의 운영원칙에 대해 인력관리부 강응규 인사관리 과장은 “제철소의 주요 기술과 설비단위마다 기성이나 기성보를 1명씩 두어 90년 중반까지는 30명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밝힌다. 아직 기성보가 없는 분야가 많기 때문인데, 기능우대 정책을 보다 확고히 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金允鉉 상무(포항제철소 부소장)는 “이제 기업은 생산현장과 기능인을 중시하지 않고서는 발전할 수 없다”고 못박는다.

 연봉학씨는 기성이 된 뒤 정년이 55세에서 65세로 늘어났으며 부장대우를 받고 있다. 급여 등 모든 대우가 부장급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기성은 명예직으로, 일종의 자격이다. 부장대우를 그대로 받지만 부장으로서의 인사권 등 실질적 권한은 부여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문제가 없지 않다는 지적이다. 기성은 공장장의 스텝으로서 관리자와 기능직 사원간의 다리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해 부서장으로서의 권한이 주어지지 않아 기성이 그의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의견이 많다.

 “쇠는 달구면 늘어나고 식히면 줄어드는 것이 본성입니다. 모든 철공작이 이 기본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데 팽창폭보다 수축폭이 더 커 ‘요술’을 부려야 합니다.” 그래서 3년쯤 되면 우쭐거리는 기능인들에게 이같은 철의 신비를 터득하려면 겸손해지라고 조언한다. 공과대학을 나와 계측제어부에서 근무하고 있는 아들 成一(30)군에게도 “눈물이 쏟아지는 가혹한 훈련을 달게 받아야 참된 기능인이 된다”고 강조한다.

 “설비를 수리하다보면 안에서 닳고 닳아진 베아링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 역시 이 공장에서 지위가 더 높아지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모든 힘을 다해 노력하다가 늙은 신하가 왕에게 걸해골(乞骸骨)하는 심정으로 가고 싶습니다.”

 붉은 석양놀이 지는 압연공장 앞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주홍빛 장화가 석양놀에 젖어 피곤해 보였을 뿐 그의 구부정하고 좁은 어깨는 오히려 건장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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