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호주 문단의 한 산맥 김동호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10.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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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취재/역사ㆍ정치의 부조리 깊이 파헤쳐 ··· 작품의 뿌리는 ‘조국의 분단’

김동호 (돈오 김 DON'O KIM)씨는 오른쪽 팔이 불편한 상태였다. 작가가 오른손을 쓰지 못하다니··· 그 사정을 물었더니 “얼마 전 집수리를 하다 떨어지는 바람에 어깨 바로 밑 팔뼈와 갈비뼈가 부러졌다”며 웃었다. 그는 ‘수준급’ 목수였다.

 팔이 불편한 초로의 교포작가. 쉰이 넘도록 독신으로 살고 있지만 외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털스웨터를 입은(호주는 지금이 겨울이다) 그는 매우 당당하고 건강한 한국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한국의 시골읍보다 작은 마을, 파통가를 한바퀴 돌았다. 그가 살고 있는 이 바닷가 마을은 호주국립공원으로, 시드니에서 기차로 1시간10분 떨어져 있는 워이워이(Woy Woy)에서 다시 자동차로 20분쯤 더 들어와야 했다.

 그의 손을 처음 보았을 때 필자는 ‘혹시 동명이인 아닌가’ 싶었다. 그의 손은 ‘작가의 희고 기다란 손’과는 동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거친 노동자의 손을 연상케 했다. 바다낚시와 글쓰기 그리고 나무다듬기 등 그의 삶은 몸과 마음이 거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글을 쓰다가 생활비가 떨어지면 학교에 나가 강의를 하거나 목수일을 나선다. 집을 짓거나 배를 만들기도 한다. 그의 거친 손은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자연 혹은 노동의 한 상징으로 보였다.

 

시드니대학 영문학과 필수교재

 김동호씨는 국내에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다. 그동안 서너 차례 고국을 방문할 때 잠깐씩 매스컴을 통해 알려졌을 뿐이다. 특히 그의 작품은 원고지 50매 정도의 단편 한편(<피아니스트>) 이외에는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다. 그러나 호주문단, 영어권 문단에서는 그 작품세계를 인정받은 저명한 작가이다. 그는 호주정부로부터 문학기금(우리나라로 치면 큰 문학상에 해당한다)을 몇 번 받았으며, 호주 시드니대학 영문학과 학생이 좋은 성적으로 졸업하려면 그의 작품을 반드시 읽어야만 한다. 그의 소설이 필수교재로 채택되어 있는 것이다. 한때 호주문인협회의 주필을 지낸 바도 있다. 최근 호주 국영텔레비전이 그의 삶과 문학에 관한 대형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올 연말에 방송할 계획으로 있는 걸 보면 그의 호주에서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2만명 가까운 호주교민사회에서 널리 알려진 편은 아니다. 8개나 되는 교포신문사에서도 그의 연락처를 알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호주에 들어온 지 15년쯤 된 한인을 교민 1세대라고 부르는데, 61년에 호주로 건너와 저명한 작가가 된 김동호씨를 잘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지에 적응하고 경제적 뿌리를 내리기에 눈코뜰새가 없었던 것이다. 작가 김동호씨 역시 교민들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글쓰기에만 전념해왔다. 시드니에서 그의 사서함으로 편지를 보낸 끝에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계절이 정반대인 지구의 저쪽, 고국에서 찾아온 젊은 시인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마을을 한바퀴 돌아 그의 집에 닿았다. 작은 집이었지만 일일이 자신의 손으로 만든 ‘작품’이었다. 한손으로 순한국식 고추장 양념요리를 하면서 그는 띄엄띄엄 자신의 삶과 문학에 관해 입을 열었다.

 상업주의에 이미 깊숙이 함몰된 서구의 문학 생산ㆍ소비양식에서 그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 킬링타임용인, 가벼운 추리소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그곳에서 그는 문학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는 치열한 문학주의자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존재가 호주문단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69년에 데뷔했지만 지금까지 그가 펴낸 작품집은 불과 세권이다. 과작이다(작품세계 참조).

 김씨는 1940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여덟살이던 48년에 월남, 열 살 때 6ㆍ25를 당했다. 이 난리통에 이산가족이 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나같은 고통을 겪었다”면서 결코 새삼스런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한다. 현재 부산대 의과대학 교수인 형 김동수씨도 휴전 후 길거리에서 우연히 상봉했다. 그 형은 1ㆍ4후퇴 때 혼자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이야기에는 평안도 사투리가 약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고려대학교 영문과에 다닐 무렵, 희곡에 큰 관심이 있었고 아르바이트로 방송국 드라마를 쓰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잠깐 남산에 있는 여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다가 호주 정부 초정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하여 국가고시에 응시했다. 통과하기 쉬운 시험이 아니었다. 61년 그는 ‘한국인 제1호’로 호주땅을 밟았다. 시드니대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 영문학 석사논문을 쓰다가 집어치웠다. 소설을 쓰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는 “작가로 데뷔하지 않았으면 아마 추방당했을 것”이라고 그 시절을 돌이켰다. 데뷔작은 69년에 출간된 《내 이름은 티안》이다.

 

외국에서의 글쓰기는 수도생활과 같다”

 호주의 권위있는 출판사에서 첫 소설을 냈다. 문단이나 매스컴의 반응이 꽤 좋았다. 출판사가 대뜸 문학지원금을 정부에 신청했을뿐만 아니라 “이 젊은 한국인이 앞으로 호주 문학에 큰 기여를 할 것” 이라며 시민권까지 받아내주었다. 호주여자와 결혼하지 않고 시민권을 따낸 ‘유일한 경우’였다. 첫 소설 때문에 호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의 소설과 삶에 있어 ‘원체험’, 그러니까 작품의 뿌리는 조국의 분단과 닿아 있다. 그가 베트남과 같은 제3세계를 다루더라도 그 행간에는 6ㆍ25와 분단문제가 배어난다. 6ㆍ25가 끝난 이후 채 10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고국을 떠난 그의 지난날은 최인훈의 《광장》을 연상시킨다. 이데올로기에 의한 전쟁을 흑심하게 겪은 뒤 인도를 향해 떠난 《광장》의 주인공 명준의 이미지가 그에게 겹쳐진다. 자유주의자. 그러나 그는 《광장》이란 소설이 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읽지는 못했다면서 “자유주의자는 존재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그는 “영어권 나라에서 영어로 소설을 쓰기란 매우 어렵다. 거의 종교적인 생활을 견뎌나가야 한다. 절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털어놓는다. 작품성을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은 치열한 경쟁이어서 큰 압박감이 뒤따른다고 한다. 그가 독신으로 사는 까닭도 여기서 발견된다. 그는 “소설써서 혼자 먹고살기도 쉽지 않은데, 부양가족까지 있었다면 소설을 아예 포기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작가이지만 동시에 대학교 날품선생(강사)이고 노동자(목수ㆍ어부)이다. 돈을 벌어 얼마간 버틸 수 있다 싶으면 틀어박혀 글을 쓴다. 다시 돈이 떨어지면 대학 강단에 서거나 목수일을 나간다.

 호주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영어가 가장 자유로운 언어”라고 밝힌 바 있다. 왜 모국어로 글을 Tm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특별한 이유는 없고 출판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하면서 영어가 자유로운 이유는 “영어는 개성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영어를 제외한 언어는 그 나라의 독특한 아이덴티티가 있어 제약이 많다는 것이다. 모국어로 글을 쓰지 않(못하)는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의 소설 밑바탕에 깔려 있는 ‘6ㆍ25체험’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해 외국어를 사용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그는 자유주의자가 못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에게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 소설의 주인공은 자기의 철학문제로 고민하지만 결국 과거(6ㆍ25)와 결부되어 정신적 부담감에 시달린다. 종교인이 신에서 해방될 수 없듯이 인간은 역사와 정치현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작가는 혁명가’라는 명제는 김동호씨가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전제를 달고 자주 사용하는 ‘작가관’이다. 이때의 혁명가는 정권을 쓰러뜨리는 그런 혁명가가 아니다. 기성의 문학세계 그 수준에 만족하고 안주해버리면 글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 기존의 세계에 도전하고 극복하는 것을 혁명이라고 강조한다. 평범한 상투어지만 작가로서는 실천하기 어려운 명제이다. 그는 “새로운 작품을 쓰지 않으면 신명이 나질 않는다”고 말한다. 그가 과작인 이유를 알 만하다.

 작은 오두막 창문으로 호주국립공원의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다가 참 아름답다고 했더니, 그는 낮은 목소리로 “여자를 모르는 사람이 여자를 사랑한다고 하고 바다를 잘 모르는 이가 바다를 아름답다고 말한다”고 응수했다. 틈날 때마다 낚시를 즐기는 그에게 바다는 ‘관조의 대상’이 아니다. 그는 바다에서 대 자연의 냉엄한 먹이사슬, 즉 약육강식을 본다고 했다.

 

통일 전망하는 자전적 소설 집필중

 그에게 교민사회의 명암에 대해 물으니 “호주에서 성공하기는 어렵지 않다. 열려 있는 나라다”라고 답한다. 교민 중에는 백만장자가 된 사람도 여럿 있고 모두 호주에 온지 1~2년 안에 기반을 다진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분파주의’이다. 2만여 교민사회에 교포신문이 8개나 되고 한인교회도 몇십개나 된다는 것이다. 호주정부를 대상으로 교민사회가 뭉쳐 정치세력으로 부상해야 하는데 아직 그 단계에 이르기에는 요원한 것 같았다. 한때 교민들이 그를 찾아와 교민사회를 이끌어달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글쓰기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거절했다. 그는 교민들이 “너무 외로워서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김씨는 요즘 자신의 네 번째 작품집이 될 새 장편을 쓰고 있다(그는 컴퓨터로 글을 쓴다).


그가 이에 앞서 발표한 소설이 그러했듯 그는 소설의 공간을 ‘세계사적’으로 확대시킨다. 교황과 고르바초프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일종의 정치추리소설인데, 그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들어간다. “문학은 작가의 전망 제시”라고 믿는 그는 이 장편소설에서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다룬다. 그의 ‘사견’에 따르면, 통일문제는 일차적으로 양쪽의 지도자가 의무감을 갖고 해결할 문제이다. 남북 어느쪽이든 혁명으로서의 통일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진단한다. 동시에 국제정세의 변화를 발빠르게 읽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와 함께 마을을 나올 때 마을 사람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네왔다. 그는 시드니로 돌아 갈 때 기차를 타지 말고 배를 타라고 일러주었다. 그와 그의 마을이 바다 저쪽으로 멀어지고 있다. 그의 오랜 이국생활과 독신주의 , 수도자적인 자연생활 등이 부러진 한쪽 팔과 오버랩되면서 그의 삶과 문학이 조국의 분단과 한덩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올 연말쯤 고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했다.

朴哲 (시인)

 

김동호의 작품세계

분단문제를 보는 폭넓은 시각

 4년 전 김동호씨가 서울에 왔을 때 문학평론을 하는 한 친구가 “모국어로 글을 안쓰는데 너를 어떻게 한국작가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했다. 이말을 듣고 고국에서 쓴 단편소설이 《문예중앙》 86년 여름호에 실린 <피아니스트>이다. 영어로 쓰여진 그의 세 장편소설은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아 그의 작품세계를 논할 계제는 아니지만, 50매가 채 못되는 단편에 그의 소설세계가 집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피아니스트>는 한 음악연주자가 외국에서 이름을 얻은 뒤 고국연주회를 왔다가 옛날 여인으로부터 연락이 와 그녀를 만나려다가 실패하는 간단한 줄거리지만, 6ㆍ25와 가족사 특히 어머니에 대한 회한이 무겁게 자리잡으면서 역사성을 획득한다. 이 단편은 ‘38선이라는 역사적 억압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한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인공 ‘나’는 현실적으로는 성공한 연주자이지만, 서울의 휘황하고 혹은 황폐한 거리와는 만날 수 없는 ‘雜人’이란 사실을 확인한다.

 이처럼 분단체험은 그에게 강박관념인 듯하다. 첫 소설 《내 이름은 티안》은 베트남전을 배경으로 다루면서, 조국을 구한다는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한 소년을 희생시키는가를 드러내고 있다. 정치권력의 부조리와 권력이 요구하는 개인의 희생을 다룬 것으로 우리의 분단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두 번째 소설 《패스워드》는 추리소설 형식의 정치소설로 불린다. 30년대 중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소련 중국 일본 그리고 버마 등 4개국 사이의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통해 권력과 개인의 양심 사이에서 빚어지는 도덕적 딜레마를 그리고 있다. 《차이나맨》은 물질적으로 풍요하지만 정신적으로 삭막해져가는 호주문명을 제3세계적 시각에서 파헤친 장편이다.

 곧 완성될 《그랜드 써클》(태극)은 그의 자전적 체험을 소설 속에 삽입시켜 한반도 통일을 전망하는 장편이다. 고르바초프와 교황이 등장하여 동ㆍ서양 문명의 상호 영향관계를 짚으면서 한반도의 통일이 세계사적 구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제시한다. 김동호의 세계관과 철학 그리고 통일에 대한 사색과 전망이 실려 있는 작품이 될 것 같다. 그는 이 장편의 초고가 완성되면 서울에 와서 탈고할 예정이라고 국제전화를 통해 밝혔다. 내년쯤이면 그의 소설을 우리말로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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