밟히면서 일어서는 중국의 풀잎, 北京大
  • 북경·김동선 편집부 국장 ()
  • 승인 1990.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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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반봉건투쟁 발상지이자 ‘지식인 탄압’역사의 현장

토론 활발하고 ‘낭만’만발…호수 주변은 ‘연애소굴’로 유명

 중국 북경의 지식인들은 북경대학을‘自由區’라고 부른다 그들 표현을 빌리면 북경대학 구내에서는 ‘사상의 압제’가 없기 때문이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마르크스는 옳은가” “모택동은 옳은가”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곳이 북경대학 구내이다.

 87년 12월 북경대학 미래학회에서 ‘미래의 중국과 세계’라는 주제로 대형토론회가 열렸을 때 한 토론참가자는 “사회주의 시도와 실패는 20세기 인류의 2대 유산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에 대한 토론자의 첫 반응은 “이 사회주의 부정은 격렬한 것이 아닌, 오히려 조금 삼가는 편”이라는 것이었다.

 

교수가 병영 찾아가 교양과목 강의

 작년 6·4 천안문사태 직전인 3월에 북경대학에서는 “공산당의 정치는 空論·강권·독재·무단과 같다‘라는 대자보가 붙었었다. 잘 알려진 바처럼 천안문시위 때 학생들의 요구사항은 △호요방의 공과 재평가 △언론의 자유 △교육비 증액·지식인의 처우개선 △86년 학생운동 재평가 △4월20일 학생데모사건 진상공개 △관리들의 부정부패 엄단 △호요방 사망경위 전면공개 등이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언론자유, 지식인 처우개선, 부정부패 엄단 등의 요구이다. 학생들의 언론자유 요구는 민주개혁 의지이고, 지식인 처우개선과 부정부패 엄단 요구는 모순으로 뒤엉킨 오늘의 중국사회상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이러한 요구는 ‘유혈진압’이라는 참극을 빚었고, 북경대학을 비롯한 학생·지식인그룹은 엄청난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수천명의 학생·지식인들이 체포·투옥 또는 지방으로 격리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민주화 의지으 근원지인 북경대학에 대한 탄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우선 시위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丁石孫 교장(총장)을 파면시켰고, 작년 9월 신입생 모집(중국은 9월이 신학기) 때는 모집인원을 예년의 2천명에서 8백명으로 줄였는데, 신입생 모집을 금지시킨 학과는 시위의 주동 역할을 했던 경제학과를 비롯한 인문·사회계열 학과들이 대부분이었다. 박정희시대와 5공시절의 학원탄압과 비교해보면 중국정부는 가히 ‘큰손’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신입생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입학하자마자 군사학교에서 1년간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 기간중 대학의 교양과목은 교수가 병영으로 찾아가 강의했다.

 ‘박해’는 졸업생들에게까지 뻗쳤다. 대학생들이 중국 형편을 모르니까 유혹을 받아 불만이 생긴다는 이유로 졸업생들을 직장에 배치한 뒤 무조건 1년간 ‘기충 공장’에 다시 보내 ‘단련’을 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현대사를 잠시 훑어보면 중국에서 지식인(당국에서는 ‘지식분자’라고 부른다)에 대한 이러한 박해는 꽤 뿌리가 깊다. 북경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한 바 있는 모택동은 공 산정권 수립 초기만 해도 지식인들에 대한 적대감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지식인들이 당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57년 ‘百化齊放 百家爭鳴’이라는 일종의 언론자유정책을 폈다. 이때 지식인들이 당과 권력의 독주에 대해 폭발적으로 불만을 터뜨리자 모택동은 이 운동을 반우파투쟁으로 전환시키면서 당노선에 회의적이거나 비판적인 지식인들을 가차없이 숙청해버렸다. 이때 북경대학 교장이던 인구학자 馬寅初는 공식석상에서 “인구증가는 중국 발전의 큰 장애요소”라고 경고했다가 모든 공직에서 추방되는 숙청을 당했다. ‘인구는 국력’이라는 모택동의 뜻에 어긋난 주장을 편 데 대한 벌이었다.

 이로부터 10년도 안돼 더 큰 박해가 중국 지식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65년에 시작된 문화혁명 때 지식인은 ‘악취나는 제9계급’(臭老九·최하위 계층이라는 뜻)이라고 불리면서 살해되고 처형당하거나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됐다. 작가 교수 과학자뿐만 아니라 시골국민학교 교사들까지도 고깔모자를 쓰고 군중 앞에서 자기 학교 어린이들에 의해 수모를 당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노동자보다 적은 대학졸업자 월급

 이 박해 때 북경대학도 온전할 리 없었다. 북경대학 출판부에서 발행한 ≪今日北大≫라는 책은 문혁기간 동안 4분의 1 이상의 교직자가 날조된 죄명으로 조사·투옥, 심지어는 고문을 당했고 이로 인해 61명이 사망했다고 밝히면서 당시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들이 무력을 행사하여 교정도 파괴됐고 수백명의 인사가 다쳤으며 대량의 가옥도 훼손되었다. 그들은 교육 문화 과학을 박해하여 北大는 각 방면에서 심각한 파괴가 이루어졌다.

 이시기에 당내, 특히 하급 당료들간에는 ‘대학은 쓸데없는 생각만 키우는 온상’이란 생각이 팽배해 있었던 만큼 중국의 모든 대학은 5~6년간 폐쇄됐다.

 뒤에 대학의 문을 다시 열기는 했지만 학생 정원과 수업연한이 크게 축소됐다. 또 진학절차도 중등학교 졸업 후 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일단 직장을 배정받고 거기서 일하다가 직장 책임자의 추천을 얻어 진학토록 했다. 게다가 대학 교과과정도 순수한 학문 접근이 아니라 기능 기술인 양성 차원의 실용적인 학습에 역점을 둔 교육이었기 때문에 대학의 질적 수준이 형편없이 저하되는 현상을 빚었다.

 등소평조차도 뒤에 “문혁 이후 중국대학에서 교육받은 사람은 별로 쓸모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이니 문혁기간에 지식인과 대학이 받았던 박해가 얼마나 컸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등소평 등장 이후 대학의 입시제도가 부활됐으나 지식인에 대한 당국의 시각은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지식인은 여전히 ‘지식분자’였고 월급도 노동자보다 적게 받고 있다.

 

대학생들의 최대의 꿈은 해외유학

 이와같은 사회적 냉대 때문에 북경대생들을 포함한 중국 대학생들의 최대의 꿈은 해외유학이다. 고등학교 때 공부 잘하는 학생은 과학자가 되는 꿈을 갖지만 대학생이 되면 유학, 그것도 미국유학을 목표로 삼는다.

 북경대생들에게 유학은 ‘숨막히는 현실의 탈출구’이므로 거의 필사적이다. 그리고 유학이 대부분 ‘도피성’이기 때문에 일단 유학에 성공하면 대부분 귀국하지 않는 실정이다. 그래서 중국정부는 유학생들의 귀국을 유도하기 위해 박사학위 취득자에게는 방 두칸에 월급도 차등을 두어 대우하고 있지만 귀국하는 유학생의 수는 적은 형편이다. 특히 천안문사태이후 각국의 중국 유학생들은 귀국하지 않으려고 무더기로 비자연장신청을 하는 현상일 빚기도 했다.

 현재 해외유학중인 중국학생은 1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유학 선호도는 미국 일본 순. 그런데 이 어려운 해외유학도 당 간부의 2세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하여 대학생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천안문시위 때 학생들은 “모택동은 아들을 한국 전쟁에 보내 잃었다. 그러나 등소평은 아들을 미국에 보냈다”라고 외치기도 했다.

 제일의 꿈인 유학을 갈 수 없을 때 중국 대학생들이 선택한 수 있는 길은 세가지가 있다. 색깔로 풀이된 이 ‘세가지 길’은 북경대생들 사이에 회자되는 예기이다.

 첫 번째로 꼽는 길은 ‘붉은 길’인데, 이것은 정치적 출세의 길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길도 쉬운 것이 아니다. 자기 희생적 자세가 있어야 되고 사람 볼 줄 알고 윗사람을 잘 보좌하는 능력이 있어야 되는데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연줄이다. 중국 항간에는 “모든 것이 관계로 시작되고 관계로 끝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의 의미는 한국에서 50년대에 풍미했던 ‘빽’이라는 말과 상통된다. 정치적 출세의 길에서는 실력보다도 빽이 더 힘이 있다는 의미이다. 북경에서 만난 한 지식인은 “李鵬이 출세한 것은 주은래의 양자였기 때문이다‘라고 중국정부 관료들의 끼리끼리 해먹는 풍토를 비난했다. 그렇지만 대학생들은 역시 권력의 길을 선호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권력이 있으면 부는 자연히 따른다는 말을 예사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부패현상이 심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붉은 길‘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꼽는 길은 ‘누런 길’인데, 이것은 돈버는 길이다. 중국이 개방정책을 편 이후 중국사람들도 돈이 중요하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데, 학생사회에도 이 풍조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개방정책으로 부자가 된 사람도 많아졌고, 돈 갖고 해결되는 일이 많으니까 권력 다음으로 돈버는 길을 선호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가장 싫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길인데, 이것은 ‘검은 길’로 표현되고 있다. 검은 길은 자기 지식을 써먹는 것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국가에서 배정하는 직장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북경대학을 비롯한 중국의 명문대 학생들은 최근 이 ‘검은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국가에서 배정한 직장이 마음에 안들면 대학원에 진학하여 다시 직장을 배정받는 기회를 보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경대학의 석사·박사과정 학생들 상당수가 ‘검은 길’중에서도 자기 취향에 맞는 직장을 찾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것이다.

5·4운동 당시 마르크스주의 傳受기지

 중국에서는 ‘큰솥밥이론’과 ‘철밥통이론’이라는 말이 유행되고 있다. 큰솥밥이론은 사회주의 경제의 대표적인 비유로 개인의 능력·노력 여하를 막론하고 일정 보수밖에 주지 않는 제도로, 이것은 생산력의 저하라는 병폐를 낳고 있다. 철밥통이론은 절대로 깨어질 수 없는 밥그릇이라는 뜻으로 개인의 능력이 제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국가·사회는 이 사람을 부양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사회주의 사회보장책을 뜻한다. 그래서 대졸자들이 국가에서 배정하는 직장에 배치되는 것은 ‘철밥통’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철밥통이 거저 생기는 것은 아니다. 국민학교에서 대학교까지 개인 신상카드가 본인 모르게 작성돼 직장에까지 따라간다. 가령, 북경대학의 어느 졸업생이 직장에 배채될 때는 그 직장에서 이 신상카드를 참조하여 배치 여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신상기록이 나쁘면 산간벽지의 직장으로 밀릴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의 개방정책 이후 외국 기업들의 진출과 자영사업 일부 허용으로 ‘철밥통’을 깨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데, 이 현상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 영향을 주고 있는 듯햇다. 국가에서 주는 직장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으므로 학생들의 행동 폭이 그만큼 넓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북경대학은 1898년에 설립됐다.   戊戌新운동태 유신파은 梁啓超 등에 의해 설립됐을 당시의 학교명은 京 大學堂, 이 학교가 신해혁명 후 1912년5월에 북경대학으로 개명됐다. 중국현대사에서 빛나는 반제·반봉건투쟁인 5·4 운동의 발상지는 북경대학인데, 이시기에 北大는 마르크스주의의 傅受기지였다. 그래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중국정부는 ‘5·4혁명 전통을 계승, 빛내기 위해’ 5월4일을 북경대학 개교기념일로 정했다.

 북경대학은 현재 28개 계열 81개 학부과정, 1백25개의 석사과정, 75개의 박사과정이 있다. 학생수는 간부 단기 특수 대학생·연수생을 포함하여 2만여명인데 학부학생은 9천여명, 석사·박사과정은 2천8백여명, 이중 61개 국가에서 온 유학생이 5백여명쯤 된다. 현재 교수는 2천8백80명.

 북경대학은 12억 인구(현재 북경에서는 13억설이 나돌고 있다) 국가에서 제일 가는 명문이므로 입시경쟁도 치열하다. 전형방법은 중국 22개 성에 정원의 3분2정도를 할당하여 성 단위에서 뽑고 나머지는 북경에서 뽑는다. 시험과목은 정치(마르크스주의 철학·시사) 수학 외국어(영어 일어 러시아어 중 택일) 중국어문 역사 지리(이과는 역사 지리 대신 화학 물리 생물) 등으로 6백40점 만점이다.

 북경대학의 또다른 특성은 학생·교수 모두 대학 구내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전원 기숙사(학부생은 6인실, 석사과정 4인실, 박사과정 2인실), 교수는 교직원 숙소에서 거주하고 있다. 대학인구 전원이 캠퍼스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구내에는 유료영화관 목욕탕 등 생활 편의시설을 모두 갖추고 있다. 또한 구내에 파출소가 있으며, 보안요원 30여명이 수시로 캠퍼스 내를 순찰한다.

 천안문사태 이후 북경대학은 외부인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특히 6·4사태 1주년인 지난 6월을 전후하여 이 통제는 엄격했고, 아시안게임 중에도 역시 외부인의 대학출입이 통제되었다.

 

아시안게임중에도 외부인 출입 통제

 기자가 아시안게임 개막식 이틀 전에 이 통제를 뚫고 북경대학 캠퍼스에 들어갔을 때 교정에서 만난 학생들의 첫 질문은 “외부인은 못들어오는데 어떻게 들어왔느냐”는 것이었다. 이 물음에 기자가 “대학 출입통제는 이전에 한국에서도 자주 있었다. 대학이 군대병영이 아닌 이상 통제한다고 못들어가지는 않는다”고 대답하자 학생들은 호쾌하게 웃어댔다. 그들의 한국에 대한 인상은 한국이 ‘아시아의 4마리 용 중의 하나’이고, 최근 민주화가 잘되고 있다는 것 등 두가지 정도였다. 그중에는 “왜 통일을 못하느냐”고 질문하는 학생도 있었고 “민주화에 문제가 없느냐”고 묻는 학생도 있었다. 그들의 태도는 개방적이었으나 이름을 물으면, 이름을 대면서 활자화는 하지 말라는 부탁을 잊지 않았다.

 기자는 학생들에게 삼권분립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어보았는데, 그들의 대답은 모두 잘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과서에는 없을 텐데 어디서 알았느냐고 물었더니 작년 민주화운동때 토론이나 책을 통해 알았다고 대답했다. 참하게 생긴 화학전공의 한 여학생은 “당이 하나만 있으면 민주주의가 아니다”라고 간접적으로 중국체제를 비난했다.

 KBS의 중국어 방송을 열심히 듣고 있다는 한 남학생은 텔레비전에서 한국 학생데모 장면을 자주 보았다며 한국 학생운동이 민주화를 이끈 배경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기자가 6월항쟁의 승리는 중산층 가세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말하자, 그는 큰 소리로 “우리는 중산층이 적은 게 문제다!”하며 낙담하는 표정을 지었다. 군사훈련을 받고 온 작년 신입생에게 훈련소감을 물었더니 상을 찡그리며 “못 참을 뻔했다”며 이를 악물었다. 캠퍼스에는 군복입은 학생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벽보판에 무도회 알리는 광고 

 북경대학 학생들의 캠퍼스 생활은 그들대로의 낭만이 있었다. 아침 첫 시간은 8시에 시작되는데, 강의가 시작될 무렵에는 기숙사에서 강의실까지 자전거 행렬이 줄을 잇는다. 핸들에서 손을 놓고 타고 가는 학생도 있고, 친구 자전거 뒤에 타고 담론을 즐기며 강의실로 가는 학생도 있다. 그들은 대개 밥그릇을 옆에 차고 있다. 그리고 9시50분에 첫 강의가 끝나면 구내방송의 음악에 맞춰 체조를 한다. 그리고 체조가 끝나면 다시 강의실에 들어가 강의를 받는다. 두 번째 강으는 11시50분에 끝나게 되어 있으나 점심시간에 늦을까봐 학생들이 교수들에게 강의를 좀 일찍 끝나게 해달라고 졸라대 대개 11시30분경에 끝난다. 그러면 학생들이 우루루 식당으로 몰려가 점심을 먹고, 오후 강의가 시작되는 2시까지 기숙사에 들어가 낮잠을 즐긴다. 중국인 특유의 낮잠 습관은 대학이라고 예외는 아닌 것이다. 이때는 캠퍼스가 정적에 잠긴다. 학내 모든 활동이 중단되는 것이다.

 오후 강의는 6시에 끝나는데, 강의가 끝난 뒤에는 11시 소등 때까지 자유시간이다.

이 밤시간이 되면 캠퍼스에 있는 未名湖주변은 남녀 대학생들의 데이트로 장관을 이룬다. 북경대생 최대의 즐거움인 ‘이성교제’의 무대가 펼쳐지는 것이다. 미명호 주변과 그 일대 숲속은 짝을 지은 쌍쌍으로 빈 공간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북경시민은 “북경대는 연애소굴이다”라고까지 말한다는데 미명호 주변의 연애장면은 북경시민에게까지 유명할 정도인 것이다. 그리고 기숙사 문을 닫을 시간이며 아쉬운 쌍쌍끼리 헤어지는 모습도 볼 만하다고 한다.

 또 북경대학 풍속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무도회이다. 대개 토요일 오후나 일요일 밤에 열리는데, 이 무도회는 북경대생들의 영원한 추억이 된다. 이 무도회에서 이성간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또 춤 그 자체가 즐거움이기 때문에 대학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추억거리가 되는 것이다.

 작년 민주화 시위 때 북경대생들의 학내 집회장소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북경대 삼각지’는 학부생 기숙사에서 도서관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데, 대자보로 유명한 벽보판도 삼각지 옆에 있었다. 그 현장에 왔다는 감격을 안고 벽보판에 가보았더니 벽보판에는 무도회를 알리는 광고와 잃어버린 안경을 찾는 소자보만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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