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성화에 빛바랜 작은 정성
  • 정기수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0.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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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재민을 도웁시다. 본사 임직원 일동 1천만원.” 큰 물난리가 날 때마다 신문의 1면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社告다.

 사고가 나가면서부터 각 신문사는 의연금품 유치를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는데, 매일 그렇게 끌어모은 기탁자의 명단을 1개 지면 또는 2개면에 걸쳐 도배질하듯 나열하여 독자들에게 ‘선전’하기 시작한다. 기탁한 의연금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활자의 크기가 달라지고 사진의 모양이 네모가 되거나 동그라미가 되기도 한다.

 작은 정성을 이처럼 순서 매기거나 큰돈을 서로 유치하기 위해 벌이는 언론사들의 아귀다툼이 이번 모금 과정에서는 극에 달했던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최근 증면경쟁으로 ‘혈투’를 벌여온 서울의 신문사들이 그 싸움의 연장선상에서 의연금 유치경쟁을 주도했다는 것이 해당사 기자들의 얘기이다. 사세 과시를 위한 것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언론사들의 의연금 모집경쟁은 과열정도를 넘어 ‘뜻있는 돈’을 거두는 방법에 이제는 개선되지 않으면 안될 시점에 다다랐음을 보여주고 있다.

 직접 모금에 뛰어들었던 몇몇 신문사 소속 기자들에 따르면 편집국 간부회의에서 모금방침이 정해지면 정부기관·단체·업계 등을 출입하는 기자들에게 유치 건수가 할당됐다고 한다. 이들은 하루아침에 ‘수금사원’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에 불만을 터뜨렸다.

 회사쪽으로부터의 압박은 간부들에게 더 심하게 가해졌다. 편집국장이 직접 명단을 만들어 굵직굵직한 기업체마다 전화로 의연금 기탁협조요청을 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실적이 좋지 않은 간부들은 사주에게 불려가 면박당한 사례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출입처 기자들이 한꺼번에 “우리 신문에 내달라”며 달라붙는 바람에 정부부처나 기업에서는 ‘좋은 일’에 때아닌 곤욕을 치러야 했다. 대개의 정부부처는 각료회의 결정에 따라 서울신문사로 기탁청구를 일원화, ‘위기’를 모면했으나 대기업들은 “경쟁사에 의연금을 내면 귀사에 불이익(기사로)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본사의 입장”이라는 식의 협박까지 받으면서 어느 신문사에 내야 탈이 적을지 선택에 여간 괴로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우그룹의 경우는 궁여지책으로 의연금을 두 군데로 나눠 냈다. 이도저도 싫어서 아예 수해지역에 직접 전달하는 업체도 있었다. 대우그룹은 이 결과 현대그룹(5억3천만원)보다 많은 6억원을 내놓고도 3억원씩 쪼개 기탁하다보니 “홍보효과는 오히려 떨어졌다”며 억울해 하고 있다.

 ‘언론사의 성화가 올해처럼 막무가내인 적은 없었다“고 말하는 한 그룹회사의 홍보실 관계자는 ”내가 이 자리만 벗어나면 의연금 모집에 얽힌 언론의 비리를 낱낱이 폭로해버리겠다“며 그동안 당한 ’압박‘이 적지 않았음을 숨기지 않았다.

 과열경쟁을 시작한 신문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신문들도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체면때문에”할 수 없이 모금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선수’들이 이미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뒤따라간 신문이 건질 만한 것은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자제한 쪽이 오히려 피해를 보았다”며 같이 경쟁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예 손놓고 있을 수도 없는 고충을 호소하고 있다.

 독자수나 영향력 양쪽에서 다른 신문에 결코 뒤지지 않는 일부 석간신문과 <한겨레신문>은 비교적 ‘조용한 접수’를 하여 눈길을 끌었다. 특히 <한겨레신문>은 액수에 관계없이 기탁자 이름을 똑같은 크기의 활자로 게재하여 다른 신문들과 대조를 이루었다.

 ‘추태’가 올해 유난히 만발한 만큼 자성의 목소리도 많이 나오고 있다.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언노련)은 9월18일 각 언론사에 보낸 공문을 통해 수재의연금 모금과정에서 빚어지고 있는 사세 과시 차원의 싸움을 자제해주도록 요청했다.

언론계 안에서는 앞으로 과열경쟁을 막기 위한 개선책의 하나로 접수창구를 한국방송공사 또는 대한적십자사와 같은 공신력 있는 기관으로 일원화할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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