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망 분노 한숨…배곯는 수재민들
  • 김당· 김방희· 박성준 기자 ()
  • 승인 1990.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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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연금품 쌓여도 넉넉히 지급되는 건 라면뿐

 10월 첫주 나라 안은 ‘사상최대의 황금연휴’로 들썩거리고 나라 밖 또한 아시안게임 막바지 금메달 경쟁으로 술렁거렸다. 그러나 온 국민이 들뜬 분위기에 휩쓸렸던 것은 아니었다. 서울·중부지역을 휩쓴 9월의 물난리통에 피해를 입은 수재민들은 남다른 비애와 소외감으로 마음속까지 적셔야 했다.

 한강 일산둑 붕괴로 논과 밭이며 소와 돼지 그리고 삶의 터전까지 유실당한 경기도 고양군 송포면·일산읍·지도읍 일대는 아직도 복구의 손길이 채 닿지 않은 곳이 많이 눈에 띄었다. 폐허가 돼버린 가옥의 잔해, 비닐은 간데없고 앙상한 ‘뼈’만 남은 ‘하우스’, 병들어 죽어가는 가축과 텅빈 축사, 개흙으로 가득찬 논과 이제는 전혀 쓸모가 없어진 허수아비 잔해 등.

 특히 일산둑 바로 옆에서 물벼락을 맞은 지도읍 신평리 주민의 피해는 더욱 컸다. 이장 이상화(31)씨에 따르면 신평리 전체 89가구 중에서 50호가 ‘완파’되었으며 나머지도 개량 가옥 몇채말고는 입주해서 살 만큼 성한 구석이라고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민 대부분은 지도읍에 있는 능곡국민학교에서 기거했는데 부락으로 돌아와서도 텐트에서 때아닌 ‘야영’을 하면서 끼니를 때우고 있는 실정이다.

 

비싼 약품은 지급되지도 않아

  게다가 부락 전체의 전답이 유실되는 통에 한해 농사를 망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요행히 일부 ‘건진’ 벼도 기름냄새가 나 먹지 못하게 되었다. 개흙과 뒤엉겨버렸기 때문에 그 벼를 베어 도정을 하려면 농기계마저 고장나기 십상이다. 그래서 이장 말로는 “어차피 부락 일대의 전답 수백만평을 송두리째 불질러 버려야 할 판”이라는 것이다.

 가축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난리를 겪기 전에는 신평리 전체 농가에 소 2백마리, 돼지 3백15마리가 있었는데 현재는 합쳐서 40마리쯤 남았을 뿐이다. 그나마 죄다 폐사 지경에 있다. 조병진(30)씨는 물난리통에 두눈 뻔히 뜨고 소 20마리 중 절반을 ‘수장’했는데 남은 거솓 흙탕물이 된 강물을 잔뜩 먹어 각종 질병을 앓느라 언제 죽을지 모른다. 고양군 축협에서 가축용 약품을 준다고 하나 기껏 소화제나 소독제 따위일 뿐 피부병약 같은 것은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지급되지 않고 있다.

 사실 고양군 일대 농민들 중에는 당장 ‘호구책’이 막연한 사람이 많다. 9월17일쯤 주민들의 집을 찾았을 때 대부분은 ‘맨몸뚱아리’뿐이었다. 그때는 전국에서 모은 수재의연금과 구호물자가 이곳 고양군에도 배급되었다. 라면 담요 이불 속내의 헌옷가지 야외용 가스버너 냄비 따위가 지급되었으나 ‘만만한 라면’빼고는 대개 부족했다. 일산읍 장항리의 장영수(46)씨는 “라면은 잔뜩 쌓였지만 라면만 먹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 쌀은 지난달 20일 일률적으로 가구당 20㎏씩 지급되었을 뿐이다”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수해지역도 사정은 엇비슷했다. “서울시민들을 살리려고 우리들이 희생되었다”고 굳게 믿고 있는 충북 단양군 매포읍 일대의 주민이 받은 의연금품은 라면 10상자, 쌀 4㎏쯤과 부식, 모포2장, 야외용 가스버너 2개, 헌옷가지 30여점, 의약품 몇가지뿐이었다. 여기서도 라면이 대종이고 옷은 입던 것인 데다 읍사무소가 잡히는 대로 나눠주는 통에 ‘별로 반가울 게 없는’ 형편이다. 매포읍매포1리에서 가전제품 대리점을 하다 가전제품이 모두 침수된 윤기현(46)씨는 ‘라면만 떠안기는 것은 라면이 돈 적게 들고 폼잡는 사진 찍기가 편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면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소송 제기하여 피해보상 받아내겠다”

 그렇지 않아도 우울한 추석을 보내는 매포리 사람들이 불만스러워하는 것은 당국이 이번 수재를 인재라고 안정하지 않는 점이다. 주민들은 인재의 근거로 당국이 홍수수위 이상으로 담수한 점과 마리 대피하라고 통고하지 않은 점을 들고 잇다. 이번 물난리가 인재였다는 점을 인정, 수해복구에 최선을 다하고 이주대책을 세우겠다고 각서를 쓴 주병덕 전충북지사가 전격적으로 경질된 것도 주민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한 동네청년은 “그런 솔직한 자세가 표창을 받으면 받을 일이지, 어째서 대통령의 ‘진노’를 살 일인지 모르겠다”고 비아냥거렸다. 현재 매포리 주민들의 가장 큰 바람은, 우선 피해를 보상받는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다시는 물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다른 곳으로 이주를 하는 것이다. 이번 수해가 지방 경시풍조와 행정관료들의 비뚤어진 발상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이곳 주민들은 보상을 못받을 경우 “소송을 제기하여 끝까지 투쟁할 각오”라고 밝혔다.

 지난11일부터 사흘 동안 물바다가 된 서울시 강동구 성내동 일대의 주민들이 겪는 설움도 ‘지방’과 별반 다르지 않다. 9월 14일부터 5만원을 내고 양수기를 빌려서 집안의 물을 빼냈다는 이수환(38·성내2동277-6)씨는 “난리통에도 돈벌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가 막혔다”고 말했다.

 자신이 받은 구호물품을 꼼꼼하게 헤아려 놓은 이씨의 셈을 보면 △ 17일 라면 20개와 쌀 1공기, 연탄 3장과 번개탄 1장△19일 라면 4개와 쌀 2공기, 된장 2백g, 휴지 반통, 세탁비누와 락스 1개씩△20일 치약 2개와 수건과 비누1장씩, 남녀 팬티1장씩△21일 밀가루 10㎏, 된장 1공기와 고추장 2백g, 퐁퐁 반통과 슈퍼타이 7백g △23일 20만원짜리 돈표 △24일 연탄 7장.

 

라면 몇 개 받으려고 구차한 줄서기

 십시일반 치고는 누구 코에 붙여야 될지 모를 만큼 부실하고, 그나마 그것을 받으려고 동사무소나 통장집 앞에서 날마다 줄을 서야 하니 구차하고 비합리적이라는 게 주민들의 지적이다. 이씨가 수령한 ‘의연’의 내역만 보아도 비합리성을 쉽게 알 수 있다. 구호물품 대로라면, 이씨의 생활은 라면을 주식으로 하되 가끔 쌀을 섞어 먹고, 세탁은 수해 1주일 뒤부터, 세수는 8일 뒤부터, 수해 10일째 되는 날에는 수제비도 쑤어 먹고…대충 이런 형편에 놓이게 된다. 물론 구호비 20만원이 나왔다지만 그것은 열이틀 뒤의 일이다. 그동안은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동사무소측의 견해는 이와 다르다. 성내2동 사무차장 탁승식씨는 ‘구호물품을 한꺼번에 빨리 보내주면 좋겠지만 사정이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고 조금씩이나마 전달하지 않으면 ’빼돌릴지 모른다‘는 의심을 살 수도 있다. 구호품 내용이 부실하고 주민들의 다리품이 드는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또 나름대로 생필품 및 복구지원을 효율적으로 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피해를 입은 주민이 워낙 많아 동직원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우선 당장 먹고 살 일이 갑갑한 수재민들로서는 그런 고충이 귀에 들어올리 없을 것이다. 성내동 주민들이 구청앞에 몰려가 농성을 벌인 데 이어 고양 수재민들도 10월5일 ‘우리도 사람이다.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국도를 가득 메운 채 시위를 벌였다.

 고양과 단양 그리고 성내동 등의 수재민은 정부 당국에 원망과 분노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앞으로의 살길이 막막한 데서 오는 두려움은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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