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 나는 ‘청소년 관람가’
  • 이성남 문화부차장대우 ()
  • 승인 1990.10.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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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홍콩 폭격영화 홍수 물렁한 심의·파렴치 상혼에 중·고생들은 멍들어

 “꽉막힌 너의 가슴을 뚫어주러 왔다”<탱고와 캐쉬>,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망각의 피바람은 거대한 복수를 예고한다”<루안살성>, “피로 뒤엉킨 의리를 믿고 우리는 지옥으로 간다”<첩혈가두>, “돈, 돈, 돈 …돈만 주면 염라대왕도 잡아오지!”<미드나이트 런>.

 섬찟한 살의가 깃들어 있는 이 글귀들은 모두 올 추석을 겨냥하여 개봉된 수입 영화의 광고 문안이다. 이 영화들은 엄연히 ‘중학생 관람가’ 또는 ‘고등학생 관람가’로 명시되어 있다. 청소년을 위한 문화 향수 시설이 전무하다시피 한 만큼 그들의 관람을 허용한 이런 극장에는 청소년들이 모여들게 마련이다.

 

性에는 엄격하지만 폭력에는 관대

 갖가지 폭력 영화가 ‘청소년 관람용’으로 상영되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해마다 방학이나 추석, 설날이면 어김없이 청소년의 우상인 액션 스타가 출연하여 한바탕 ‘활극’을 벌이는 폭력 영화가 밀물처럼 극장가를 휩쓸곤 한다. “性에는 엄격하지만 폭력에는 관대” 우리 현실에서 청소년들이 폭력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전자 오락실에 가는 것처럼 일상화되어 있는 셈이다.

 서울 YMCA가 지난 9월 서울 남자고등학생 2백7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남학생들의 폭력영화 선호도를 파악 할 수 있다. 5편의 청소년용 영화에 대한 관람 여부를 조사한 결과, 가장 많은 77%가 <로보캅1>을 보았으며 이어 10명중에 7명꼴로 <람보2>와 <영웅본색2>를 관람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절반을 훨씬 웃도는 학생이 <람보1> <람보3> <영웅본색 1> <첩혈쌍웅>을 보았다고 답했다.

 청소년들에게 이처럼 인기를 모으고 있는 영화의 내용을 살펴보자, 월남전 패망 이후 미국민의 감정을 무마시키려는 의도에서 제작된 <람보2>에는 람보역의 실베스터 스탤론이 월맹군의 가슴에 폭탄화살을 쏘아 몸을 산산조각으로 분해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또 거머리가 있는 진흙 속에 사람을 처박아 놓았다가 나중에 사람을 들어올려 칼로 거머리를 떼어 내는 구역질나는 장면도 나온다. 전체 상영시간 90분 가운데 이같은 참혹한 장면이 26분을 차지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로보캅 1>에는 범은 4명이 경찰 한명의 손바닥에 총을 쏴 완전히 부서진 피투성이 손을 클로즈업하는 등 잔인한 폭력장면이 1백3분의 상영시간 중에 30분을 차지하고 있다.

 잔혹성으로 치자면 홍콩영화도 미국영화에 뒤지지 않는다. 최근 2,3년 동안 우리 청소년의 마음을 앗아가고 있는 홍콩영화에는 하이틴 우상인 주윤발, 장국영 등이 출연하여 가공할 혈전을 벌인다. 국내 광고 모델로까지 진출한 주윤발이 나오는 <영웅본색 2>에서는 그가 쌍권총으로 수십발의 총알을 난사해서 상대방을 잔혹하게 죽이는 장면을 위시해서 폭력장면이 상연시간 1백5분중에 23분이 넘게 나온다. 또 <첩혈쌍웅>에서는 한사람에게 총격을 15번이나 가하는가 하면 등에 식칼을 곶아 죽이는 잔인무도한 장면이 상영시간 1백48분 중에 36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스마담 3>에서는 전동 드릴로 사람을 갈아서 피가 튀는 장면, 쇠꼬챙이 갈고리고 허벅지, 팔을 찌르고 잡아당기는 장면 등이 총 90분 상영시간 중에 28분이 넘게 나온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요즈음 영화의 포악성은 고전 서부활극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정해진 룰에 의해 총이나 칼로 결투를 하는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을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들 영화는 물론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것이다. 따라서 부모들은 입시공부에 지친 자녀들을 위로해 주겠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별 의심없이 영화관람을 방임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영화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자녀들이 “피가 튀기고 살이 찟기는 인간 살육의 장면”을 즐기고 있음을 아는 부모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같은 영화를 본 청소년의 뇌리에는 살상과 폭력 장면이 가장 강하게 남아 있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시리즈물 후면으로 갈수록 잔혹

 이와 같은 영화들은 거개가 시리즈로 나오고 있다. 1편이 흥행에 성공하면 2편, 3편, 4편을 잇따라 제작하는데 전편보다는 후편이 더욱 잔혹한 장면을 담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폭력성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국내에서의 심의 기준은 후편으로 갈수록 도리어 관대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86년에 심의한 <예스마담 1>은 ‘미성년자 불가’였던 데 반해 2편은 ‘고등학생가’로, 3편과 4편은 ‘중학생 가’로 규제가 느슨했졌다. 또 1983년에 심의한 <람보 1>은 ‘중학생 관람가’였으나 2편과 3편이 ‘연소자 관람가’로 되어 있다.

 또한 “선을 위해서는 어떠한 폭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폭력의 정당화를 청소년의 무의식속에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영화의 폐해가 크게 우려되고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의 원칙을 적용하여 ‘악당이나 영웅이나’똑같이 마구잡이로 비인간적인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로보캅이 여자를 추행하려는 건달을 잡아 국부에 총격을 가하는 식이다.

 대신고등학교 1학년 변용득군의 말에 따르면 학교생활에서 청소년들이 폭력영화의 부정적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생들 사이에 의견이 서로 다르면 주먹부터 나간다고 전하는 변군은 “영화 속에서 주윤발이 악당에게 총을 쏘고 씩 웃는 것처럼 학우를 때리고 씩 웃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으며, 이소룡 흉내를 내면서 칼싸움을 하다가 상대방의 손가락이 잘린 경우도 봤다”고 전한다.

 앞으로도 획기적인 조처가 없는 한 폭력영화의 이같은 폐해는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해마다 폭력영화의 수입량이 가파른 상승선을 그리고 있으며 게다가 3가구당 1대꼴로 보급되어 있는 비디오 기기를 통한 관람 또한 더욱더 빠르게 확산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YMCA 조사에 따르면 청소년들이 극장보다는 비디오로 관람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람보 1>을 본 학생의 87%는 비디오로 관람했으며 또다른 폭력영화의 경우도 4분의 3쯤이 비디오로 관람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더욱이 청소년의 비디오 관람에서의 문제점은 극장 관람보다도 훨씬 심각하다. '고등학생 이상가' '중학생 이상가'라는 최소한의 형식적 규제마저 없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라는 표지가 있는 폭력비디오일지라도 그것을 대여할 때 한번도 신분증 제시를 요구당해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시민 자구운동 전개해야 할 때


 미국에서도 영화, 텔레비전 등의 미디어 폭력이 사람들의 공격행동과 어떤 인과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을 놓고 논란이 계속되어왔다. 폭력영화 유해론자들은 '청소년 가치관 왜곡' '인명경시 풍조 확산' '무의식중 모방심리'를 경고하는가 하면 폭력영화 제작자들은 '카타르시스와 간접 경험 제공' '폭력 현실 앞에 자신감 고취' 등을 내세워 옹호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논란과는 상관없이 '미디어 폭력 시청과 공격행동 사이의 인과관계‘에 대한 연구 및 조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그 결과를 정책 차원에서 논의하고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와는 크게 다르다. 예컨대 ’TV폭력에 대처하는 연맹' 같은 단체는 영화 속의 폭력행위를 시간당 빈도수로 조사하여여 폭력영화의 등급을 매긴다. 이 단체에 따르면 이번 추석에 우리나라에서 청소년 영화로 개봉, 상영중인 <탱고와 캐쉬>를 한시간에 1백번 이상의 폭력이 등장한다고 검증, '89년도의 가장 사회파괴적인 영화'로 선정한 바 있다.   이렇게 볼 때 <로보캅 2>를 위시한 청소년 영화 5편의 심의 기준을 놓고 최근 YMCA와 공륜간에 벌어졌던 공방전은 영화 정책 입안자들이 주목할 필요가 있다. YMCA는 미국에서 '제한 관람~17세 이하는 부모나 보호자를 동반할 것'으로 등급이 매겨진 <로보캅 2>가 국내에서 '중학생 관람가'로 둔갑하는 등 청소년 대상의 영화의 심의기준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했다. 이에 공륜은 해명서를 통해 "5분20초에 해당하는 문제장면을 수입사에서 자진 삭제했고 스토리 자체가 초인적인 로봇의 황당무계한 내용이므로 청소년에게 범죄 또는 폭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충동을 줄 요소는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등급이 하향조정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각계는 영화는 문화 환경인 만큼 폭력영화에 대한 감시·검열체제를 강화하고, 이들 여와로부터 자녀들을 보호하는 시민 자구운동을 전개해나가야 한다는 데에 뜻을 모으고 있다.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최창섭 교수는 "제약회사의 약이 99명을 살리고 1명을 죽였다고 해도 그 약은 문제"라면서 폭력영화의 잠재적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는 범죄 청소년 집단, 비범죄 직업 청소년, 학생의 세 집단에 폭력 미디어를 시청시킬 경우, 집단에 따라 '선택적 인식'을 한다고 주장하고 "범죄 청소년은 자신의 폭력을 합리화시켜 자위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이제는 우리 청소년의 정서를 해치고 있는 폭력영화의 실상을 바로보는 일에 어른들이 모두 팔을 걷어붙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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