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 ‘대학살’에 서민만 ‘깡통’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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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새벽 ‘주식강제매각’ 군사작전 방불…책임 둘러싼 무더기 소송 예상돼

 10일 새벽 0시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공휴일인 한글날 정상 출근한 증권 관계자들은 자정을 넘겨서도 ‘작업’을 계속했다. 장이 열리는 날에도 야근을 찾아볼 수 없는 증권가의 때아닌 공휴일 출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증권가에 진을 친 수백명의 경찰 병력이 그랬고, 증권공동온라인시스템의 가동시간이 어전 8시에서 새벽 2시로 앞당겨진 것도 그랬다.

 25개 증권사들은 자정을 전후해 매몰을 받아줄 증시안정기금에 강제정리대상 계좌를 통보하고 매도주문을 내기 시작했다. 집계가 가장 늦은 대우증권을 끝으로 매도주문이 끝난 시각은 새벽 4시. 증안기금은 이때부터 5시50분까지 모든 매수주문의 압력을 완료했다. 마치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야음을 틈탄 기습작전은 ‘담보부족계좌 일괄 강제매각(반대 매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증안기금은 10일 전장 동시호가(오전장과 오후장의 시초값을 결정할 때 부르는 모든 호가) 시각인 오전 9시40분에서 45분 사이에 일제히 매수주문을 내서 반대매매 매물을 거두어갔다. 증권사들은 8일 종가보다 매도주문 가격을 낮게 내고, 증안기금은 8일 종가보다 1백~2백원 높게 매수주문을 써냈다. 수량도 통보받은 물량보다 훨씬 많은 1천3백50여만주의 주문을 냈다. 당연히 거의 전량이 매매 체결됐다. 증시안정의 장애물로 치부돼온 ‘깡통계좌’(적자계좌)를 싹쓸이한 것이다.

 시장이 열리자 증권 관계자와 투자자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증권 관계자들은 밤샘의 피로에 젖어 눈이 충혈됐고 투자자들은 자신의 계좌가 정리되어 있는지를 알아보느라고 혈안이 된 점이 다르다면 달랐다. “이럴 수가 있느냐.” “큰손들은 다 빠져나가고 시민들만 망하게 하는 대학살 조치다.” 객장은 투자자들의 성토와 원망의 목소리로 뒤엉켰다. 그러나 그동안 화형식·자해행위 등으로 격렬한 데모를 일삼아왔던 투자자들의 항의시위는 지방에서만 산발적으로 있었을 뿐 거의 없었다. 모드 자포자기 상태인 듯했다. 결국 ‘깡통계좌’의 일괄 강제정리는 증권사가 우려했던 ‘불상사는 없이’ 끝났다. ㄱ증권 ㅇ사장은 “이들 악성매몰은 다소의 마찰을 일으키더라도 증시회복을 위해 걸러내야 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그러나 마찰은 ‘다소’에서 끝날 것 같지 않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재무부가 압력을 넣어 강행하기는 했지만 한동안 정리 후유증에 시달릴 공산이 클 것”이라고 내다본 ㅎ증권 ㅇ사장의 예견은 적중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대상 축소과정에서 ‘변칙담보’성행

 우선 스스로 결의한 강제정리 원칙을 어기고 정리대상을 축소하려 했던 흔적을 남겨 엄정성 면에서 흠집이 드러났다. 9일 11시 현재 정리대상은 8백10만8천주,9백6억원이었다. 이것도 가장 물량이 클 것으로 알려진 대우증권 물량이 빠진 규모였다. 다음날 새벽 4시 확정대상은 4천6백계좌(8백73만주), 9백81억원에 그쳤다. 이는 지난달 8일 증권사 사장단이 강제매각을 결의할 당시의 예상액 3천6백억원에 비교하면 27%에 불과하다.

 증권사들은 강제매각 물량이 크게 줄어든 이유로 투자자들이 한달 동안의 유예기간 중 담보부족 금액을 메웠고 종합주가지수 수준도 당시보다는 다소 오른 614선 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담보부족계좌를 정리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10일 전까지 부족한 담보액을 메웠다면 정리대상에서 빠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변칙담보가 성행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증권사는 부동산담보·제3자연대보증·약속어음 공증 등을 인정해주었다. 현행 증권 거래법의 신용공여에 관한 구정은 현금과 유가증권만을 추가설정담보로 인정하고 있으므로 그같은 담보는 명백히 불법인 것이다.

 ㅈ증권의 ㅇ부장은 “증권사 사장단의 결의가 있은 지 한달이 지나 정리대상에서 빠진 계좌의 최소한 30% 이상은 편법 담보”라고 시인한다. 증권업협회는 8일 종가 기준 약 2천4백억원어치의 정리대상 매물 중 30% 정도는 8일과9일 사이에 합법적인 추가담보 설정으로 대상에서 제외됐으며 40%는 반대매매에 부쳐졌다고 분석하고 있다. 나머지 30%는 변칙담보로 구제되었다는 것이다.

 변칙담보 인정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담보를 끌어들일 수 있는 계층은 구제받은 셈이다. 몇몇 ‘오떼’(큰손)가 좌지우지하고 있는 소형 사들은 골프회원권이나 콘도회원권까지 담보로 인정해주었으며 아예 추가담보 설정 없이 정리대상에서 빼주었다는 소문도 무성하다. 이는 “깡통계좌를 모두 정리한다”는 원칙을 어긴 것이어서 ‘개미군단’의 희생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했다는 시비거리를 남기고 있다. 서울 점포보다 지방 점포의 정리매물이 많았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투자자 ㅈ씨는 “큰손들마저 외면한 증시를 지켜온 일반 투자자들에게 돌을 던진 행위”라며 이는 정리의 목적이 장세회복·거래질서 확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증권사들의 채권 확보에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앞으로 투자자와 증권사간에 책임 소재를 둘러싼 무더기 법정소송도 예상돼 많은 뒤탈을 남겨놓고 있다. 잘잘못을 따지기가 애매하고 어디까지가 위법인지를 가려내기가 어려운 계좌가 많다 보니 분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소지가 많다.

 

신용거래 관행 대수술 필요

 증권거래법상 증권회사는 미수금은 3일후에, 미상환융자금은 1백50일이 지나도록 고객이 갚지 않을 경우 최고통지를 하도록 규정돼 있다. 최고통지 후에도 투자자가 주식대금은 넣지 않거나 추가담보를 제공하지 않으면 4일 후에 반대매매에 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증권사 당신들이 최고를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반대매매를 하지 않았고 그 사이 주가는 더 떨어져 내 계좌가 결국 깡통이 됐다”고 투자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증권사로서는 할말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다.

 이번에 정리된 계좌는 정리를 하더라도 투자자들이 증권사에 빚을 갚아야 하는 저자계좌들이다. 증권사들은 반대매매로 예상되는 2백억원의 결손금을 해당고객에게 갚도록 요구할 것이다. 고객이 이를 거부할 경우 증권사들은 재산가압류에 들어가고 미수금반환소송을 법원에 제출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정면으로 거부할 투자자들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증권사 직원의 잘못으로 손해를 본 계좌도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ㅎ증권의 한 직원은 “증권사가 송사에서 이겨 압류한 재산을 처분해 미수채권을 회수할 수 있다면 문제없지만 증권사 직원의 과실, 일임매매 등의 불법행위가 인정돼 패소할 경우가 우려된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 경우 아직 공시적인 방침이 세워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증권사 경영인들이 해당계좌 관리직원에게 갚도록 하게 할지도 모른다. 증권사 노조협의회가 “대책없는 반대매매를 반대한다”고 거세게 들고나온 것도 따지고 보면 자신들에게 떨어질지 모를 부담을 피하려는 의도라는 시각이 많다. 증권사 경영층과 직원간의 내부마찰 소지마저 높은 형국이다. 깡통계좌의 강제매매는 이래저래 환멸을 느낀 투자자와 증권사 직원의 대량 이탈을 불러와 증시 분위기를 더욱 흉흉하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주가의 향방도 두통거리다. 올라도 그렇고 내려도 문제다. 주가가 조금만 올라도 1백%에 약간 못미치는 계좌들은 일시에 구제를 받을 수 있는 만큼 강제매각대상 투자자들의 반발이 거셀 것이다. 내릴 경우, 정리는 모면했지만 담보유지비율이 1백30% 미만인 계좌가 다시 속출하게 된다. 이번 정리 후 깡통계좌는 더 이상 증안기금이 떠맡지 않고 증권사가 자율적으로 처리토록 되어 있으므로 증시는 최소한 연말까지 깡통계좌 파문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깡통계좌 강제매각조치는 세계증시 사상 유례가 전무한 사건이다. 우리 증시가 ‘야바위판’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말이 없게 돼있다. 이는 증시의 후진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한다. 증권에 ‘멋모르고’손댔다가 피해를 본 서민들의 한을 달랜〈내가 바보지〉(정풍송 작사·작곡)하는 대중가요가 유행하고 있는 판이다.

 많은 증시 전문가들은 이같은 자충수를 더 이상 두지 않기 위해서는 깡통계좌가 대거 출현하게 된 원인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결국 그 원인은 “증권거래의 관행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자들은 대부분 외상매입이 불러올 엄청난 위험을 간과했다. 약정고 경쟁 등으로 이를 방조했거나 부추긴 책임은 증권사에 있으므로 이들 역시 이 “깡통계좌‘의 원인제공자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은 정부에 있다. 가수요를 일으키기 위해 신용융자를 늘리고 심지어 주식으로 주식을 더 살 수 있는 대용증권제도를 허용한 단견이 문제였다.

 서울대 尹桂燮 교수(경영학)는 “신용거래 전반을 뜯어고치는 대수술이 절실하다. 증권관계자·투자자 모두의 인식전환이 시급하다. 초보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투자신탁 등에 간접투자를 하도록 해야한다”고 진단한다. 깡통계좌의 강제정리는 이런 교훈을 남겼으나 대가는 엄청났고 그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 것인지 예단키 어려운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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