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우롱하지 말아야 한다
  • 박권상 (주필) ()
  • 승인 1990.10.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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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로부터 덕을 잃은 정부는 가기 마련이고 가야 한다. 威와 勢로 나라를 얻을 수 있고 국민을 다스릴 수 있다. 물리적인 힘이나 權謀로써 천하를 잡고 권세를 누리며 功利를 탐닉할 수 있다. 이른바 ‘覇道’의 길이다. 패도정치는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는 ‘군사통치’와 類를 같이 한다.

 패도와 구분되는 것은 물론 왕도이다. 왕이 다스린다는 뜻에서 왕도정치가 아니라 治者가 힘이나 계교나 권모가 아니라 덕으로 다스린다는 것, 그것이 곧 왕도이다.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까닭에, 그것을 민주정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심을 천심으로 알고 백성을 하늘같이 섬기는 것이 왕도의 본질이요, 그것을 ‘민본정치’라고 말한다. 국민을 섬기고, 따라서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왕도정치와 민주정치는 공통된 영역이 넓다.

 오늘의 6공정부는 출발에서 그 이전의 군사통치와 달랐다. 비록 36%의 지지밖에 얻지 못했으나 그래도 국민이 선출한 정부라는 데서 정권의 정통성에 도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盧泰愚 대통령에게 반대 투표한 사람들조차 민주적 개혁에 “나를 믿어달라”는 그의 호소를 액면 그대로 믿었고 믿고 싶어했다. 다수의 사람들이 점진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군사통치가 막을 내리고 민주주의로 발전할 것을 믿었고 믿고 싶어했다.

 결과는 어찌 되었는가. 실로 실망스럽다는 한마디밖에 별로 할말이 없다. 우선 보안사사건 한가지만 보더라도 얼마나 국민을 우롱하는 짓인가. 군의 중립화란 민주화의 첫걸음일텐데, 6공출범 3년에 아직도 군수사기관이 버젓이 민간요인들을 사찰하고 있었으니.

 

유권자 비웃는 ‘패도정치’가 오늘의 위기 불러

 아직도 ‘군사통치’의 잔재를 청산하기는커녕 연장하고 있는 ‘위장된 민주화’라는 지적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까. 사건 직후 국방부 공식태도는 “전시나 비상시에 대비, 적 또는 불순세력으로부터 보호 및 차단하기 위해서 작성한 신상자료”라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국민을 얕보고 우롱하는 짓인가. 이미 국방장관이 인책됐다. 그러나 그 스스로 보안사를 관장하지 못했고 “청와대에 直報하는 체제”임을 개탄하였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사건에 별 책임도 없는 사람이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임 국방장관은 보안사의 민간인사찰이 ‘월권’임을 시인하고 보안사를 국방장관이 관장하겠다는 정도의 발언을 했을 뿐이지, 3군방첩대로의 환원 등 구조적인 개혁에 전혀 관심을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등병이 국기를 흔들어서 되겠느냐” 등의 적반하장식 논리전개였다.

 한마디로 도덕성이 마비된, 패자의 도가 흐르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정치적 교착상태 역시 유권자를 비웃는 패도정치의 소산임을 지적하여야겠다.

 오늘의 정치위기는 근본적으로 국민에 대한 공약을 저버린 3당합당에서 출발하였다. 국민은 분명히 여소야대를 택했는데, 일부 야당을 끌어들이므로써 국민의 선택을 뒤집은 것이다. 여기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민자당에 대한 따가운 여론의 반발로 나타냈다. 의석 72%를 확보한 정부여당이 10% 내지 20% 정도의지지에 맴돌고 있는 기현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더구나 4당체제시 여야합의로 국민에게 공약한 지자제는 정당여당의 위약으로 실종되고 말았다. 사실인즉 지자제실시는 결코 여야간의 흥정거리일 수 없다.

 

국민의 ‘(지방)정부’ 선택권 찬탈한 정부여당

 88년 3월 국회에서 통과된 이 지자제법은 90년 1월1일부터 발효되어 90년 6월말까지는 지방의회선거를 실시하게 되어 있고, 91년 6월말까지 시장 도지사 군수 구청장 등 지방자채단체의 장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게 되어 있다. 작년 12월에는 ‘청와대 대타협’에서 예정대로 이 법을 실시하기로 약속한 것이고, 이어 12월19일 4당 실무자들간에 정당참여 등 절차가 합의되었다.

 그러나 민자당 출범과 더불어 첫번째 작품이 곧 지자제실시의 포기였다. 그것은 여야간 합의의 파기나 국민에 대한 약속의 불이행일 뿐 아니라, 법을 어기는 불법행위이다. 정부 및 민자당은 국민의 ‘(지방)정부’ 선택권을 찬탈하는 불법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견해도 있다.

 여당내에서는 내각제개헌을 고려하고 있다. 내각제는 권력을 수평적으로 분산하는 제도이고 지자제는 권력을 수직적으로 분산하는 것인데, 왜 내각제를 추진하겠다며 이 핑계 저 핑계로 지자제를 안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특히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관한한 다음 정권이 확보된 이후에 하겠다는 의도가 간간이 흘러나왔다. 대통령이 임명한 시장 도지사 군수 등이 다음 대통령선거만은 치르겠다는 것, ‘행정선거’라는 불법선거수법에 아직도 미련을 못버리고 있는 것 아닐까.

 이렇듯 국민을 얕보고 우롱하는 교만 속에 7·14날치기파동이 일어났고 벌써 3개월 이상 비생산적인 정치적 교착상태가 이어지고 있으며 그 파문이 경제·사회부분에 파급되어 ‘총체적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 야당이 등원을 거부하고, 보안사사건을 계기로 金大中 총재의 단식투쟁이 전개되자, 겨우 원내총무를 교체, 여야협상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33초 동안에 26개 법안이 통과됐다고 선언한 날치기파동에 대한 단 한마디 미안하다는 말조차 없다. 역시 국민을 우롱하고 우습게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시국수습의 실마리는 여권이 패도정치에서 손을 씻고 국민을 우롱한 일련의 사태에 진정으로 반성 사과하는 데서 찾을 수 있으며, 지자제 전면실시 등 법과 국민에 대한 공약을 지체없이 실천하는 데서 열매를 거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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