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고유미술’朝鮮畵
  • 고명희 기자 ()
  • 승인 1992.01.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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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사상을 형상화 … 추상화 배격, 남한 왜곡 많아

지난 17일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개막되었던‘세계수채화대전’전시장은 불이 꺼진 채‘관람 보류’라는 해괴한 안내판이 2층 복도를 가로막고 있다. 이유는, 전시된 3백50여점에 포함된 북한미술품 54점의 이적성이 문제시된다는 것이다.

국제수채화연맹측이 남북미술의 만남을 위해 어렵게 국내에 유치한 이 전시회는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을 이유로 북한 및 조총련계 작가들이 출품을 거부하자 주최측이 이미 공개된 북한 작품들을 국내에서 컴퓨터로 복제해‘대리참석’시켰었다. 부산 광주에 이어 대구에서는 대구시의 후원을 얻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던 전시회지만 서울에선 예술의 전당측이 이들 복제품에 대한 문화부의 이적성 심의를 거치자고 요구해 현재 2층이 암흑 속에 파묻혀 있는 것이다.

국제수채화연맹 李康柱 총재는“남북교류합의서의 잉크도 채 마르기 전에 이럴 수가 있느냐”라며 허탈해 했다. 남북한 화해분위기가 한창 조성되는 시점에서 벌어진 이 일은 어쩌면 분단의 장벽에 벽돌을 하나 더 얹은 셈이다. 남북교류를 외치면서 우리가 우리의 이데올로기만으로 무장할 경우 북한은 영원한 타인일 수밖에 없다. 북한을 이해하려면 저들을 일단 접수해야 가능할 것이다.

최근 조총련에서 전향하여 한국국적을 취득한 화가 金在日씨(가명 · 37)는 83년 북한에 가서 조선화를 두 달 동안 배웠다. 김씨의 조선화 유학은 1966년 제 9차 국가미술전람회 때에 김일성이 미술가들에게“미술 분야에서도 우리의 고유한 형식(조선화)을 바탕으로 우리의 미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다”라고 한 교시에 따라 조총련계에 불어 닥친 조선화 유학 바람 덕택에 이뤄졌다. 김씨는 사군자와 인물화를 집중 공부했는데, 사군자의 경우 월북작가 리석호의 〈소나무〉를 기본으로 운필연습을 하는 동시에 원산 소나무 숲에 가서 직접 현장스케치를 했다고 한다.

현재 북한 미술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조선화는 먹선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전통적 조선화는 아니다. 철저하게 주체시장의 형상화를 위해 개혁되어“조선화의 선명하고 간결한 전통적 화법을 연구하여 그것을 우리시대의 요구에 맞게 더욱 발전시킨” 현대조선화이다.

조선화개혁은 50년대 후반 이후‘조선화 논쟁’에 의해 급격히 진행됐는데 초기 이념정립에는 월북작가들이 상당히 참여한 듯하다. 특히 미술사가였던 金瑢俊이 자신의 작품 〈춤〉(1957)에서 나타냈듯이 조선시대 수묵화 전통을 기반으로 조선화 개혁을 주장했으나, 1960년대 李如星(《조선미술사개요》의 저자)이 사실주의적 채색화를 강조하면서부터 전통적 수묵화는 사라지고 채색우위의 조선화로 변모하였다.

김용준의 몰락이 월북작가들의 상징적인 자리매김인가에 대해서 국내 학자들은 평가를 유보한다. 한국 근대미술연구소 李龜烈 소장은“김주경 길진섭 김용준 리석호 정현웅 배운성 임군흥 이쾌대 등 월북작가들은 초기에 주도적 역할을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도태된 것으로 보인다”면서 예외적 인물로‘인민예술가’호칭을 받은 鄭鍾汝를 꼽았다. 그가 고전적 수묵화법으로 그린〈고성인민들의 전선 원호〉(l961)는 북한의〈문학예술사전〉에 별도 항목으로 다뤄질 정도로 높게 평가받는다는 설명이다.

현재 조선화는 평양에서 교육받고 당으로부터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로 불리는 작가들을 비롯, 모든 작가가 제작한다.〈강선의 저녁노을〉은 해방후 당의 품속에서 자라난 50대 신진미술가 鄭永萬(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 민수대창작사 창작부사장)이 그렸다. 북한 최고 화가인 그는 78년 인민예술가 호칭에 이어 89년 김일성상을 받기도 했다. 〈강선의…〉는 북한에서 발간된 대부분의 미술책마다 중공업현실이 미술에 반영되었다는 점에서‘최초의 주체미술 성과’로 소개되는데 사실적인 묘사력이 금속성 같은 느낌을 갖게 할 정도로 치밀하다.

그러나 표현기법은 북한미술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북한의 모든 문학예술들이 그렇듯 주체사상 형상화가 모든 잣대인 것이다. 鄭寬徹의 〈보천보의 홰불〉(1948)은 최초로 수령 형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북한미술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북한 주체미술의 골격은 주체사상 원리를 기반으로 3대 문예이념인 당성 · 노동계급성 · 인민성으로 보완된다. 당성은 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노동계급성은 노동계급에의 봉사를, 인민성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이 인민대중임을 뜻한다. 영남대 兪弘濬 교수(미술사)는“당성 계급성 인민성이라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민족적 형식론을 일관되게 지켜 온 것이 그들 문예이론의 뿌리가 되었다는 이해 없이는 북한미술을 설명할 수 없다”면서 이 이념들은 사회주의적 문학예술의 혁명적 본질과 계급적 성격을 특징짓는 중요한 징표라고 설명한다.

주체미술을 표현한 조선화
70년대 이후 북한미술에는 일제 강점 때 김일성의 항일투쟁 내용 못지 않게 소년소녀의 천진한 모습이나 금강산 묘향산 등 자연 산수를 담은 풍경화가 의외로 많다. 자연풍경을 묘사하는 이유에 대해 전남대 李泰浩 교수(한국미술사)는“인민대중이 이 땅에서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그렸다“ 면서 사회주의국가의 우월성을 묘사했다고 분석한다.

북한미술 창작의 주제는 크게 넷으로 나뉜다. 수령형상 창조 · 사회주의제도의 우월성 · 남한 실상(굉주사태 해외입양아 학생운동 재야인사 탄압) · 조국통일 등이다. 특히 남한 실상은 북한예술가들의 단골주제로, 김포공항을 배경으로 해외입양아를 그린〈앙, 난 안 갈래요〉(1978),〈싸우는 광주〉(최하택 · 1983) 등이 역사의 파노라마처럼 낱낱이 그려지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조국통일이란 주제도 부쩍 늘어났다. 89년 평양에서 열린‘세계청년학생축전 제13차 대회’ 때 백두산~판문점 종단 대행진(7월22일~27일)을 그린 연작 조선화〈국제평화 대행진〉은 각각 3~10m짜리 화면 4개에〈백두산에의 출정〉〈평양에서의 대환호〉〈판문점에서의 절규〉〈통일의 꽃 임수경을 맞이하자!〉를 나누어 담았다. 무려 2천 2백여 인물군상이 그려져 있는데 임수경양의 얼굴이나 깃발에 이르기까지 사진을 연상시킬 정도로 꼼꼼한 묘사력을 지녔다.

집체작은, 독자적인 창작보다 여러 사람의 창조적 지혜를 모은 공동작업이 더욱 효과있다는 논리에서 공동으로 종자(주제)를 잡고 현장검증과 토론을 거친 후 제작된다.〈국제 평화 …〉는 이러한 방식으로 만수대창작사에서 제작된 것이다.

만수대창작사는‘혁명미술의 산실’이라 불린다. 평양 중심가 7만㎡ 대지에 4만㎡ 규모 건물로 세워진 이곳에서는 조선화 조각 유화 벽화 출판화 장식도안 공예 수예 도자기 수인화 등 창작분야별로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를 비롯, 북한의 1급 미술가에 해당하는 창작미술인 1천여명과 종사원1천여 명이 일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화뿐 아니라‘대기념비미술’이라 불리는 집체조각의 메카이다. 만수대창작사 조각창작단이 제작한 집체작〈삼지연대기념비〉(83년 제작)는 가로 4백m, 세로 2백 50m 짜리 타원형 마당에 김일성 동상을 중심으로‘조국편’‘흠모편’‘진군편’등 7개의 조각 군상들로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외화벌이 수단으로도
이렇듯 북한 전체를 혁명 박물관화하는 작업을 진두지휘한 사람은 김정일이다. 이구열씨는 대기념비미술품들을 북한의 권력구조 맥락에서 풀이한다. 70년대까지는 미술분야의 모든 혁명적 주체적 인민적 성과를 전적으로 김일성 수령의‘현명한 지도’로 귀결시켰던 반면, 80년대에 접어들면서는 김정일을 김일성의‘독창적 지도’에 결부시킴으로써 북한 통치 권력의 부자세습구조를 기정사실화 정당화시키는 데 이용했다는 것이다.

내외통신 91년 6월 14일자에 따르면 만수대창작사에는 최근 김일성부자의 형상물 제작을 전담하는‘1호 작품과’가 특별히 운용되고 있다고 한다. 1호작품이란 북한의 각 가정에 건 김부자 초상화를 비롯해 모든 출판물의 김부자 형상, 김부자의 동상과 석고상 그리고 김일성 배지 등을 말한다. 이 작품들은 당성 및 기량을 평가받아 선발된 5백여명의 1호작품미술가들에 의해서만 제작된다.

북한에서는 우리의 경우 다소 변두리로 취급하는 포스터 삽화 판화가 발달했는가 하면, 수예 인형공예 등도 미술의 당당한 장르로 분류된다. 모사품 역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 듯이 보인다. 지난해 북한에 다녀온 재미교포 安貞淑(60 ?·뉴욕 거주)씨는“유명작가의 그 림이 분명한데 사인은 저마다 다른 모사품을 여러 개 보았다”고 놀라워한다. 우리미술문화연구소 尹凡牟 소장은“모사품은 우리의 상품화논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면서“아마도 미술작품이 대중을 만나는 방식 차이에서 오는 것 같다”며 미술품을 외화벌이 수단으로 이용한 탓이라 진단한다.

이구열씨는 지난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평양식당’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테이블 뒤쪽에 묵으로 그려진 꽃그림병풍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화개혁 이후 사라진 묵화의 등장을 북한 미술계의 변화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식의 단초가 곳곳에서 발견된다는 게 북한 미술을 접한 사람들의 지적이다. 개인 우상화로 철저히 금기시했던 개인전이 비록 2인형태이긴 하나〈정관철 ?·정종여 2인 미술 전람회〉(86년 12월30일부터 1개월간 평양 조선 미술관),〈이석호미술전람회〉(89년 12월 평양국제문화회관)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미술평론가 崔錫泰씨는“경공업혁명을 주창하는 산업미술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림 및 도자기가 관광상품으로 개발되는가 하면 상업디자인의 발달도 눈에 띈다는 지적이다. 실지로 평양 조선미술 출판사에서 1986년에 펴낸〈조국해방 조선로동당 창립 40주년기념도록〉에도 가정장식용으로 천무늬도안, 타일비닐레자도안 등이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주체사상과 주체미술로 획일화된 북한미술은 체제긍정적인 현실주의며 또 다른 의미의 제도권미술일는지 모른다. 유흥준교수(영남대)는“원작을 보지 못한 상황에서 그 평가는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도판을 통해 북한미술 이해의 시발점 역할은 가능하다”고 한다.

29일까지 열릴 예정인 수채화대전 전시장은 여전히 암흑에 파묻혀 있다. 남북동질성을 위해 이해의 틀을 마련해야 하는 시점에서 관람 유보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여전히‘분단’ 이란 사고가 계속되는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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