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역사 바꾼 ‘신들린 기타’
  • 강헌(음악평론가) ()
  • 승인 1994.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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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현씨, 록.소울 기틀 닦아…‘간절한 여백’ 남는 한국적 록 압권

대중 음악이 대중이라는 상업성과 음악이라는 예술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지금 여기’의 음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대중 음악이 지금처럼 10대의 기호에 굴종하는 한 대중 음악의 본질적 기능은 급속히 퇴화할 것이다. <시사저널>은 음악 평론가 강 헌씨의 정기적인 기고를 통해 우리 대중 음악을 점검해 보고자 한다.<편집자>

 90년대 한국 대중 음악의 패권을 나누어온 서태지와아이들과 신승훈의 신작 앨범이 해를 바꾸어 가며 용호상박의 접전을 펼치는 갈피에서, 최근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신중현과엽전들의 재발매 CD는 우리에게 회한과 숙고의 계기를 준다. 환갑을 눈앞에 두고 기타를 손에서 놓지 않는 이 늙은 전사의 음반이 새삼스러운 것은, 3공화국 이후 한국 현대사의 격랑 속에서 이 땅의 대중 음악이 획득하고 망각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 이 앨범들은 트롯.발라드.댄스뮤직에 밀려 한번도 주류의 패권을 차지하지 못했던 록 음악이 서태지를 필두로 한 일군의 대중음악가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떠오를 조짐을 보이는 현 시점에서, 이 계보학의 원조를 상기케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대중 음악과 권력의 우울한 이중주
 흥청스런 장바락의 장단을 깔고 5음계로 하강하는 <미인>의 전율스런 기타 서주는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신중현의 트레이드 마크로 기억된다. 이 곡과 이 곡이 담긴 앨범은 그를 음지의 사단장에서 양지의 스타덤에 올려놓는 조명탄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독자적인 한국 대중 음악이 가능한가라는 화두에 대한 도전장이었다. 그러나 딴따라라는 비어에 농축된 대중 음악에 대한 이 땅의 완강한 편견은 그를 새로운 분기점을 창출한 대중 음악가로 인지하는 것을 거부했으며, 70년대의 정오에 터진 대마초 파동의 와중에서 그를 철저히 파괴하고 만다. 그의 모든 음반은 화형되었고, 그는 80년 서울의 봄이 오기까지 금치산자로서의 삶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중 음악과 정치 권력과의 우울한 이중주는 비단 신중현 개인과 막 꽃봉오리를 열려던 70년대 전반의 대중 음악가들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대중 음악의 연대기가 시작되는 20년대 초에서부터 있어온 굴곡이다.

 신중현이 미도파 백화점 근처에서 산 기타를 독학으로 배우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을 때 미국에서 용트림하기 시작한 록 음악은 당연히 이 땅에서는 생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왜소한 몸에 견주어 너무나 큰 일렉트릭 기타를 멘 변방의 청년이 미 8군 쇼 무대에 등장한 순간은, 작열하는 리듬과 과격한 증폭을 음향의 특징으로 하는 록이 이 땅에 상륙하는 시점이기도 했다.

 ‘재키’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의 60년대에 관해서는 왕성했다는 표현말고는 달리 묘사할 말이 없다. 이미자와 남 진.나훈아.배 호의 남성 트로이카를 앞세워 트롯이 옛 영광을 수복하던 다른 한 측에서, 그는 에드훠(1964)와 덩키스(1969)를 결성하며 벤드 음악의 기틀을 닦았고, 펄시스터즈와 김추자, 그리고 소울의 효시 박인수.장 현.김정미 등 셀 수 없는 대중 음악가들의 음악적 후견인이 되었다. 그는 70년대 초반까지 <빗속의 여인>과 <커피한잔>에서 <님아>,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님은 먼곳에> 그리고 <봄비>와 <거짓말이야>를 터뜨리며 ‘히트 제조기’로서 아성을 공고히했다.

진혼과 해학 형상화한 1집 앨범
 이 과정에서 그는 트위스트에서 고고에 이르는 댄스뮤직과 60년대 미국에서 발흥한 흑인의 소울 음악 및 히피즘을 동반하는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섭렵하면서 거의 본능적으로 하나의 문제의식에 조금씩 미끄러져 들어갔다. 트롯도 팝 뮤직도 아닌, 그렇다고 봉건 시대의 민요나 판소리도 아닌 독자적인 한국 대중음악의 가능성은 어떤 양식으로 실현될 것인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룹 이름에서부터 암시하듯이 3인조 그룹 ‘신중현과엽전들’의 결성은 그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남이(베이스기타, <울고 싶어라>의 주인공)와 김호식(드럼, 첫번째 앨범 녹음 뒤 권용남으로 교체됨)을 라인업으로 한 신중현과엽전들의 첫 앨범은 한국에서 록 음악과 그것의 정신이 어떻게 시작되는가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한 장의 앨범이 한두 히트곡을 담고 있는 그릇이 아니라 자신의 음악 정신을 종합적으로 표출하는 작품집이라는 사실을 거의 최초로 증명했다.

 모두 10곡에 이르는 이 앨범의 핵심은 5음계에 입각한 신중현의 기타이다. 그의 독특하고 재기 넘치는 기타 연출은, 60년대 미국의 혼란과 분노를 형상화한 지미 헨드릭스나, 흑인 블루스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시킨 에릭 클랩튼, 제프백 같은 영국의 기타 명인들을 성실하게 추종하는 성질의 것이 아닌, 무엇인가 간절한 여백을 남겨놓는 그만의 것이었다.

 그 뉘앙스는 일렉트릭 기타 고유의 충만한 박력과 도전적인 날카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가냘프게 여운을 남기고 사라져가는 해금의 그것에 닿아 있다.떠들썩한 <미인>의 리듬 안에는 골계적인 처연함이 녹아들어 있고, <설레임> 속에서 조심스럽게 음계를 이어가는 기타는 거의 선(禪)적인 정숙감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앨범에서 가장 다이내믹한 후렴구를 지닌 <생각해!>와 <할 말도 없지만>의 경우에서조차 그의 기타는 가사가 분만하는 허전한 정조를 따라 함부로 언성을 높이지 않는다. 그리고 <떠오르는 태양>이라는 제목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거의 7분에 이르는 연주곡은 이 여백의 뉘앙스가 환각의 몽롱함과 훌륭히 접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앨범의 또 다른 백미는 <나는 너를 사랑해>와 <나는 몰라>에서 상반되게 보여주는 진혼과 해학의 형상화이다. 상여 소리의 어두운 텍스트를 빌려와 ‘해랑사를 너는 나’(제목을 거꾸로 읽은 것)를 처연하게 반복하는 <나는 너를 사랑해>는 진정한 사랑이 박탈된 세계에 대한 조사(弔辭)이며, 천편일률적인 사랑 타령에 대한 조롱인 <나는 몰라>는 탈춤 마당의 골계적 미학을 상기케 하는 신선한 시도이다.

 이 앨범을 통해 우리는 서구의 문법을 생경하게 모사한 치기가 아니라, 그것을 내면에 용해하여 발효시킨 우리의 목소리를 처음 만난다. 물론 ‘이 앨범에는 헤비 메탈의 극단적인 소란과 굉음의 해방감도 없고, 더구나 록 음악정신의 핵심이랄 수도 있는 반항적인 문제의시의 메시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서구 대중 음악사의 기준일 따름이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공륜이나 중앙정보부와 피흘리며 싸우지는 않았지만, ‘가요’는 그저 일회성 소비재이거나 오락과 위안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이 땅의 편견과 싸웠고, ‘유행가’란 다소곳이 슬퍼하고 그리워해야 한다는 한국 대중 음악사의 무의식을 거부했다.

 무엇보다 그는 엔카의 음계와 트위스트나 고고 같은 미국 댄스뮤직의 리듬에 구금되어 있던 한국 대중 음악 언어의 종속성을 극복하기 위해 극복할 수 있는 명제를 제출했다. 이같은 태도야말로 전진을 멈추고 부패해 가는 모든 기존에 대한 전복을 꿈꾸는 진정한 록 정신에 다름 아닌 것이며, 이 정신은 <할 말도 없지만> 같은 노래에서 ‘하고 싶은 그 말은 할 수 없는 그 말뿐이야’ 같은 탁월한 잠언구를 자연스럽게 분만하게 하는 힘이다.

 수십 년이 흘러도 한국의 대중 음악사는 그를 비켜갈 수 없다. 그는 진정한 의미로 최초의 음악감독이자 프로듀서였고 작사가이자 작곡가이면서 기타리스트와 보컬리스트 노릇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리고 수많은 그룹의 리더였다. 그러나 그의 묘비명을 마지막으로 장식할 말은 아마도 ‘그는 한국의 대중 음악가였다’일 것이다.
美 憲(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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