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정계, 여차하면 DJ와 손잡는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4.11.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핵 회담 · 성수대교 참사 계기로 ‘脫地浮動’

박태준씨 귀국 후 신당 창당 · 동교동 연합설 무성

최근 민자당에서는 보기 드문 일들이 자주 벌어지고 있다. 과거 여당에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던 일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의 현장에는 항상 민정계가 버티고 있다. 그들은 이제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내내 죽어 지내온 모습이 아니다.

10월18일 옛 여권에서 고위직을 거친 원로들의 모임인 민자당 고문회의에서는 미 · 북한 제네바 협상과 관련한 정부측 대응에 봇물처럼 비판이 쏟아졌다. ‘최소한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 ‘외교 안보팀 모두가 책임지고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가 스스럼없이 나왔다. 발언 수위가 얼마나 높았던지 문정수 총장이 회의가 끝난 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고문단 운영 방안ㅇ을 재검토해야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여당에서 ‘대통령 사과’ 얘기가 공식 석상에서 나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25일 국회 대정부 질의를 앞두고 민자당에서는 미 · 북한 협상과 관련해 노재봉 · 안무혁 · 곽정출 의원이 정부를 거세게 몰아붙일 것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안무혁 · 곽정출 두 의원은 지난번 이우재 · 정태윤 씨 등 재야인사를 영입할 때 당 지도부에 공개 해명 요구서를 보낸 ‘전과’가 있다.

이들의 대정부 질의가 사전에 흥미를 끈 것은 이들 자신이 미리 발언 내용을 언론에 조금씩 흘렸기 때문이다. 여당 의원이 국회에서 정면으로 정부를 비판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마나 그 내용을 미리 홍보하는 것은 더더욱 희귀한 일이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20일 민주당 강수림 의원의 출판기념회에서 묘한 발언을 했다. 그는 “공명 선거 정착을 위해서는 여당이 안정 의석을 확보하겠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수를 못얻어도 선진국처럼 연립 내각으로 얼마든지 민주주의를 잘할 수 있다”고도 했다.

“공천 못받더라도 할말 하고 살겠다”
민정계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진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이들은 김대통령이 국정 운영에서 분명히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그동안 내내 국정 운영에서 소외돼왔던 이들은 김대통령에 대해 ‘비판적 지지’ 입장을 보여왔다. 그러다 정부가 미 · 북한 협상에서 뒷북마나 치다가 실리를 얻지 못하고, 내치에 있어서도 성수대교 붕괴 등 악재를 만나 허둥대자 일제히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민정계의 돌격대 노릇을 하고 있는 곽정출 의원은 성수대교가 무너진 날 이런 말을 했다.

“김대통령은 이영덕 총리가 대독하나 국회 연설에서 사회 각 분야가 활기를 되찾고있다고 얘기했다. 도대체 대통령에게 이 따위 보고를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총리건 장관이건 지금까지 대통령에게 바른 말을 한 사람이 있는가. 책임 질 사람은 책임지고 내각은 총사퇴해야 한다. 앞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국정을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 친일파도 등용했듯이 각계에서 인재를 고루 뽑아 써야 한다.” 그는 또 “지금 내 지역구(부산 서구)에 내려가 곽정출이는 이제 공천 받기 틀렸다며 운동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지만, 공천을 못받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는 얘기도 했다.

박태준 전 민자당 최고위원의 귀국은 구여권 인사들에게 심기일전할 계기가 된 것 같다. 이들은 박씨의 상가에 모여 모처럼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들은 상가에서 돌아가 전두환 · 노태우 전 대통령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본래 직접 문상할 계획이 없었다고 발표했던 두 전직 대통령은 이들의 권유에 따라 잇달아 상가를 방문했다.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은 상가를 방문해 주변 사람을 물리치고 박씨와 잠시 밀담을 나누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동안 정가에서는 5 · 6공 세력 신당설이 끊임없이 불거져나왔다. 하지만 신당 출현이 정말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왜냐하면 5 · 6공 세력을 한데 묶을 구심점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씨의 귀국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민정계로서는 비빌 언덕이 생긴 것이다. 박씨는 민정계가 구심점으로 삼기에 매력적인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그는 국민에게 과거 행적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구 여권 인사 중의 한 사람이다. 만약 그가 앞장선다면 5 · 6공 세력에 대한 국민적 거부감은 상당 부분 희석될 것이다. 구여권 인사들은 결정적인 약점을 보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재계 · 관계 · 정계에 발이 넓다는 것도 그의 장점이다. 그가 움직이면 달려올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민정계 탈당 멀지 않았다”
실제로 최근에는 5공 출신 인사들이 신당 창당을 준비하는 예비 모임을 만들었다는 말도 들린다. 이들은 일단 내년 지방자치 선거에 대비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인데, 구체적으로 누가 어느 자리에 출마할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김대중 아 · 태재단 이사장의 움직임도 구여권 인사들에게 고무적이다. 김이사장은 최근 박정희 대통령 15주기 추도회 고문직을 수락한 것을 비롯해 구여권 인사들에게 귾임없이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고 있다. 특히 김이사장의 동교동계 측근들은 박태준 전 최고위원과의 연대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인다. 현재 아 · 태재단 후원회장을 맡고 있는 이동진 전 의원이 박태준씨 상가를 찾아가 김이사장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얘기는 동교동계 측근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박태준씨 상가에서 벌어진 문상 정치, 김대중 이사장의 심상찮은 움직임과 관련해 정가에서는 성급한 예측도 나온다. 멀지 않아 민정계가 민자당을 뛰쳐나갈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김이사장과 손잡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실제로 민정계의 한 의원은 “이대로 가면 앞으로 우리 당을 뛰쳐나갈 사람이 많다. 그들이 김대중 이사장과 손잡지 말라는 법은 없다”라고 말한다.

여권 핵심부는 민정계의 이같은 움직임에 대해 곤혹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김대통령은 박씨 상가에서 문상 정치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인 지난 10일 대구와 포항제철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에 앞서 7일에는 구여권 인사들이 대부분인 민자당 국책 자문위원 3백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다과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같은 응급 처방은 별로 효과가 없었다. 전반적으로 여권 수뇌부는 수세에 몰려 허둥대는 인상이다.

물론 정계에는 아직 구여권 인사들이 신당을 만들거나, 김이사장과 손을 잡으리라고 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이 권력과 등지기에는 너무 많은 약점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마나 민정계가 힘을 내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이상 사정이니 물갈이니 하는 말 앞에서 주눅드는 기색이 아니다.
- 文正宇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