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로” 내세워 탈세 조사 늑장
  • 마산 · 부산 .소성민 기자 ()
  • 승인 1994.1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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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무서, 검찰의 세금 포탈자 고발 요청 거부… 추징에 285일 걸려



부부정부패 근절에는 수많은 외부 감사보다도 한 건의 내부 고발이 중요하다는 인식은 대통령도 공언한 것이지만, 비리를 고발한 내부 고발자의 신원이 드러나 고발자는 여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전직 제약회사 영업소장 河一淸씨(44)는 부산지방국세청과 부산금정세무서장을 상대로 탈세 제보 보상금 및 피해 보상금 청구 소송을 부산고등법원에 제출했다.

하씨는 우진제약 경남영업소장으로 근무하던 91년 4월11일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에 회사의 탈세 사실을 제보했다. 조사 결과 하씨의 제보는 사실로 밝혀져 국세청은 9천8백여만원을 회사로부터 추징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하씨는 신원이 노출돼 불이익을 당했다고 호소한다. 국세청이나 세무서 같은 해당 관청이 아닌 검찰에 제보했다는 이유만으로 제보자에게 지급하는 보상금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세무 공무원들은 이 사건과 관련해 자기들의 처사가 정당한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은 점 또한 보상금 지급 규정에 의거한 것이므로 문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검찰→3개 세무서→국세청 등 ‘돌고 돌아’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제보를 받은 부산지검 울산지청은 울산세무서에 조사를 지시했다. 그 결과 탈세가 확인되면 검찰에 고발해 달라고 의뢰했다. 그러나 91년 4월 울산세무서(11일)로 넘어간 제보 서류는 관할이 아니라는 이유로 부산동부세무서(15일)→부산등래세무서(18일)→부산지방국세청(20일)→울산세무서(23일)를 거쳐 13일 만에 원점으로 돌아왔다.

하씨가 부산지방국세청을 찾아가 그같은 처리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자 담당 직원은 “국세청은 검찰의 하부 기관이 아니므로 조사 지시에 응해야 할 의무가 없다”라는 입장을 내세우며 “왜 처음부터 국세청이나 세무서에 제보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하더라는 것이다. 하씨는 이 점에 대해 지금까지 기가 막히다는 반응으로 보이고 있다. 하씨는 국세청 직원이 검찰의 탈세 조사 요청을 거부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고 ㅇ한다.

부산지방국세청이 4월23일 울산세무서로 제보 서류를 반송하면서 제보를 원점으로 돌릴 때 내세운 근거는 당시 공문ㄴ에 따르면 ‘부산지검 울산지청이 탈세 제보에 대해 울산세무서에 조사를 지시한 뒤 고발할 것을 의뢰한 사실은 세무행정에 대한 이해 부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검찰은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해당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세무서장의 고발 없이 탈세 제보를 검찰이 직접 수사할 수 없다는 법적 근거가 이 문서에 제시돼 있었다. 검찰이 직접 조사하기를 원하는 경우에는 세무 공무원 지원을 요청하면 파견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산지방국세청은 ‘세무’의 영역은 사법권이 좌우할 수 없음을 관계법령을 들어가며 설득하고 있었다.

하씨는 울산세무서로 제보 서류가 되돌아간 사실을 알고 최초에 울산세무서에 조사를 지시한 울산지청 담당 검사를 찾았다. 담당 검사에게 문의해본 결과 ‘탈세 제보가 들어와도 추징 예상 세금액이 1억원 이하일 경우 담당 세무서 직원의 고발이 없으면 검찰이 직접 조사해 처벌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에 수사가 중단되었다는 사실만 전해 들었다. 결국 부산지검 울산지청은 6월3일 하씨에게 통보한 공문에서 ‘공소권 없음’이라고 백기를 들었다. 세무서장 또는 세무에 종사하는 공무원의 고발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보 서류를 이송받은 울산 세무서는 부산지검 울산지청의 명을 받아 제보 서류를 하씨의 회사 세무를 관할하는 동래세무서와 같은 지역 관할인 부산지검 동부지청으로 넘겼다. 이곳에서 제보 서류는 반년간 묵었다. 그해 11월 8일에야 관할인 동래세무서는 조사에 착수했고 12월27일 처리 결과를 하씨에게 통보했다. 제보한 지 8개월 15일 만이었다.

하씨를 분노케 한 것은 탈세 제보에 대한 관계기관의 일 떠넘기기만이 아니다. 탈세를 제보하면 신속하고 은밀하게 조사가 진행리라 생각했으나 조사는 행해지지 않은 채 자신이 제보했다는 사실만 회사측에 알려진 것이다. 하씨는 제보한 지 한달 뒤쯤인 5월 초 영업회의에서 ‘이러저러한 제보가 세무서에 들어갔으니 각 지역 영업소장들은 장부를 잘 관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사실을 알게 됐다. 하씨는 이같은 내부 제보자의 신원 노출에 대해 당시 자신의 제보 서류를 취급한 세무 공무원들을 의심한다.

하씨에 따르면, 4월 울산지청에 소속 회사의 탈세 사실을 제보할 때 제출한 비밀 영업자료는 3백쪽이 넘는다. 이 자료의 범위는 마산과 경남 일대 등 대부분 자신의 관할 지역에 국한되지만 다른 지역에도 똑같이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한다.

하씨가 세금과 관련한 회사의 비리를 깊숙이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5년간 이 회사에 근무하면서 한달에 한번씩 영업소장들이 모이는 월차회의에 참석해 이곳에서 전개되는 영업 비밀을 숙지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는 약품 판매 대금의 할인 수금 같은 변태적 거래 보고나, 세금계산서를 발행하지 않는 무자료 거래를 기록한 장부 대조 등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하씨는 탈세제보 자료에 누구나 영업 비밀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그 방법까지 자세히 설명해 놓았다고 한다. 하씨의 설명에 따르면 장부에 금액을 정리할 때는 한 단위 줄여서 기록했다는 것이다. 가령 천만원이면 끝의 ‘0’을 지워 백만원을 만드는 식이다.

따라서 회사 전체를 대상으로 정확히 조사했다면 최소한 5억~6억원의 탈세액은 밝혀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하씨는 주장했다. 그는 관할 동래세무서가 91년 12월 추징세액 8천5백여만원으로 수사를 종결하자 93년과 94년 두 차례에 걸쳐 이의를 제기한 끝에 1천3백여만원을 추가 징수케 한 점을 탈세 조사가 정확히 수행되지 않았다는 근거로 내세웠다. 조사가 처음부터 온전히 수행되었더라면 탈세액이 더 드러났을 리 없다는 것이다.

명확한 부정 놓고 관할 다툼만
하씨는 탈세를 제보할 당시 회사측과 심각하게 대립중이었다. 90년 초 새로 취임한 사장이 자신을 본사 사무직으로 대기발령하자 이를 부당 발령으로 노동위원회에 진정하여 91년 5월 합의에 이르기까지 싸움을 치렀다. 대기발령을 낸 이후 1년 가까이 영업을 못했지만 90년 12월 퇴직한 것으로 해 퇴직금과 임금을 받기로 한 것이다. 또 사장은 하씨를 업무상 횡령 혐의로 경찰에 고소해 놓은 상태였다.

하씨에 의해 탈세 사실이 밝혀지고 세금 9천8백여만원을 추징당한 우진제약은 계속되는 경영난을 견디지 못하고 94년 3월 부도를 내고 폐업했다. 91년 당시 사장이던 金千瑞씨는 취임한 뒤 회사 규율을 바로잡으려고 내부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도가 지ㅌ나친 하씨의 변태 영업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몇 차례 경고해도 고쳐지지 않아 하씨에게 대기발령을 명했는데, 하씨가 계속 불응해 결국 4천만원에 달하는 업무상 횡령 혐의로 그를 고발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하씨의 주장과는 달리 하씨의 제보 사실을 하씨를 통해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그가 직접 수차례 전화를 걸어 마치 협박이라도 하듯 자기가 탈세 사실을 제보했다고 직접 밝혔다”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 사건의 발단은 회사 내부의 갈등에 있었다. 하씨는, 탈세는 어디서나 하는 것이지만 내부 화합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인데 자기와 회사는 모두 이 점에 실패했고 결국 제보에까지 이르게 됐노라고 말했다. 화합은 비리를 묵인하고, 불화는 비리를 제보하게 한다. 그리고 제보자의 신원이 드러나는 과정과, 부정이 확연한데도 관할 다툼만 벌이는 공직 사회는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패 구조를 낳는 한 단면인 셈이다.
- 마산 · 부산 ● 蘇成玟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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