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경쟁시대 살아갈 고독한 개인주의자들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2.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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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우리 사회는 어떤 가치관의 지배를 받을 것인가. 그 변화를 쫓아 밑그림이나마 그려보는 일은 불확실한 미래학의 분야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에 속한다. 가치관은 모든 물질적인 변화의 총체이며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처럼 사회 변화의 속도가 화살처럼 빠르고, 사회변동이 급격한 사회에서 그 변화를 명확히 짚어내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엄청난 의식변화의 싹은 이미 잉태되고 있다. 미래를 주도할 젊은이들의 의식속에서 그 단초를 드러내고 있다.

요즈음 젊은 세대들은 지금의 기성세대들처럼 계산대 앞에서 서로가 점심값을 내기 위해 ‘정겹게’ 싸우지 않는다. 떡볶이를 먹으면서도 ‘칼같이’ 미리 몫을 분담해 지불한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기존의 전통사회의 미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 사람은 무지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아무리 사소한 분야의 사소한 규칙이라도 모르면 손해라는 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젊은이들의 의식변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라든가 어른이라든가 스승이라든가 하는 어떠한 권위도 이들에게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도처에 둘러싸인 현란한 외국글씨의 가게 앞에서 햄버거를 사먹고, 외국 영화를 관람하고, 방학 때면 배낭을 메고 외국여행을 다니면서도 그들은 기성세대보다도 한국적인 것에 집착한다. 탈춤을 추고, 기성세대들이 서양문물인 색소폰과 피아노에 대한 허기증 때문에 밀쳐둔 단소와 가야금까지 복권시켜놓았다. 심지어 미신적 요소까지도 이들 젊은이들에겐 향수의 대상이다.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에 불어닥칠 변화의 바람을 주조음으로, 이런 젊은이들의 의식을 변화음으로 해서 미래에 형성될 우리 사회의 가치관을 읽어낸다.

현재 우리 사회는 전통적 공동체와 그 윤리의식이 무너진 황폐한 자리에 새로운 시민 사회의 윤리의식이 뚜렷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흔들리는 사회’ ‘과도기적 사회’다. 한마디로 아노미 현상이 지배하고 있다. 전통사회의 악덕과 시민사회의 악덕이 혼재하며 겹쳐 있는 상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리는 아버지’ 이웃이 고발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10년 뒤 한국사회 안에서 모든 행위양식은 국제적인 규범과 가치관에 의해, 곧 ‘시민사회 윤리’에 의해 검증되고 판단될 것이라는 데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이것은 정보화사회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정보의 흐름이 둔한 전통사회에서는 산맥 하나를 사이에 놓고 서로 다른 가치관과 생활양식의 존재가 가능했다. 한 국가의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지구촌 전체가 하나의 정보문화로 묶이는 상황에서 어느 한 지역만이 ‘독특한 가치관과 윤리관’을 고집할 수는 없게 된다. 그 보편적인 가치관이 시민 사회의 가치관이다.

국제적으로 통하지 않는, 시민사회에서는 통하지 않는 가치관과 행동양식을 고집하는 이들은 시민사회의 윤리와 정보망에 의해 사회적 제재를 받게 된다. 자식을 때리면서도 “내 자식 내가 때리는데 무슨 상관이냐”하는 가부장적인 논리가 지금은 통하지만, 앞으로 이런 가장은 동네에서 혹은 자식들로부터 고발당하게 될 것이다. 신용이 없는 거래자도 정보망에 추적당해 사회에 발을 붙이기 힘들게 된다. 이것이 익명의 사회를 보완하는 무시무시한 ‘정보’의 견제력이다.

세계적 보편가치로의 편입은 동시에 ‘한국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현상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될 것이다. 바깥으로부터의 흡수력이 강해질수록 자기를 지키려는 원심력도 강해지는 것이 생명체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미 전통적인 생활도구가 먼지를 털고 나오고 끊겨졌던 우리 가락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양의에 밀렸던 한방과 서양 의학서적 때문에 먼지가 앉았던 《동의보감》이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지 오래다. 그것을 주도하며 서양 댄스 대신 孔玉振의 ‘병신춤’에 박수를 보내고 사물놀이 장단을 대중무대로 되돌려놓은 세력은 70년대 후반, 80년대의 이념적으로 무장된 젊은 의식세대들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특수한 한 집단이 아닌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한국적인 것을 높이 평가하고 추구하게 될 것이다. 외국으로 이민간 한국교포들의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갈망을 연상하면 이런 미래의 가치관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주변환경과 규범이 국제적이 되면 될수록 자기 正體性을 지키기 위한 ‘정신의 자기탐색’은 심화된다. 남북 화해 기운도 민족 정체성 탐구를 강화하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시민윤리의 정착은 필연적으로 개인주의적 가치관으로 귀결된다. 시민사회의 기본이 주체적이며 ‘책임지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사회세력의 변화도 개인화를 재촉하는 한 요소다. 국가주의, 집단적 가치관의 몰락이 그것이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를 주도해온 우익적 군사독재는 87년 6·29 이후 정당성과 힘을 현격히 상실했다.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로 출발해 또다른 집단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학생 · 재야운동도 사회주의 진영의 몰락과 변화, 지나친 편향성으로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개인은 의식면에서 자유로워진 대신 극심한 직업적 경쟁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평생 직장은 보장되지만 끝없는 무한경쟁을 겪으며 국제적 기준의 노동력을 갖춰야만 살아남게 될 것이다. 대학교수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직업경쟁과 함께 소득의 균질화가 이뤄짐으로써 한 사람의 봉급-특히 고학력자일수록-만으로 부양가족을 먹여살리기는 힘들어진다. 이런 현상은 자연히 전문인이라는 직업윤리의 정착, 남녀간 · 가족간의 동등한 발언권과 주체성을 보장하게 된다. 직업윤리의 변화는 조직의 성격도 변화시킬 것이다. 수직적 · 권위적인 조직보다는 창조성이 보장되는 수평적 조직이 많이 나타나게 된다. 젊은이들이 공동 출자한 컴퓨터회사 같은 경우는 벌써 그러한 조직 성격을 띠고 있다.

그러나 10년 뒤의 한국인이 ‘책임지는 개인’이 될 것인가는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리는 대목이다. 현재의 젊은이들은 어떤 측면의, 어떤 내용의 권위주의도 인정하지 않는다. 국가도 스승도 더 이상 권위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냉소의 대상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개인이 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러나 91년 겨울 한 대학의 기말 리포트로 제출된 신입생들의 답안지의 상당수는 “다시 고교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털어놓고 있다. 사회와 부모들에 의해 과보호와 응석으로 자라난 나머지 독립심이 부족하고 책임의식이 부족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젊은이들이 무너진 권위의 자리에 뚜렷한 개인철학을 세우지 않는다면 ‘책임지는 개인’ 대신 ‘이기적인 응석받이 개인’이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집단적 의식과 비뚤어진 개인주의인 이기주의가 혼재하던 90년대의 얼굴은 10년 뒤 확실한 개인주의의 얼굴로 바뀌리라는 게 지배적인 분석이다.

다원화에 따른 갈등, 조정기술 개발
개인화는 필연적으로 가치의 다원화로 이어진다. 개인과 개인, 지역과 지역, 집단과 집단이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주장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다원적 가치관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이 단초는 80년대 후반 90년대초에 이미 싹텄다. 안면도 핵처리장 시설 계획과 제주도 개발특별법 제정에서 드러난 주민시위는 지역 이기주의의 측면도 있지만 개발을 둘러싼 다른 가치관이 존재함을 보여준 것이다.

최소한의 물질적인 욕구가 해결된 사회에서 가치의 다원화는 필연적인 추세다. 지방자치 실시 10년째인 2002년의 사회에서는 이해관계와 시각차를 둘러싼 이런 갈등이 더욱 자주, 왕성하게 일어날 것이다. 그런 만큼 존재하는 갈등과 다른 집단의 다른 이해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다원적 타협과 조정을 통해 해결하는 기술도 개발될 것이다. 2002년의 한국인들은 직업이나 혈연이 아닌 지역간 · 계층간 이해관계로 묶인 다양한 조직의 출현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92년초 우리 사회의 가치관으로 돌아가보자. 한마디로 집단주의와 이기주의의 혼재, 정치적 냉소주의, 도덕적 허무주의로 집약된다. 의식의 회색지대인 것이다. 6 · 29 전후 사회 전반에서 터져나온 민주화와 개혁요구가 정치권에 의해 좌절되고 배반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중의 가치관이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는 향후 어떤 정치권력이 어떤 비전을 갖고 사회변화를 주도하는가에 달려 있다. 중심 권력의 변화는 사회변동의 성격을 결정짓고 대중의 의식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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