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화산’민자당, 용암 꿈틀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4.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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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봉 발언으로 민정계 불안감 표면화…지방자치 선거 전후해 대폭발 가능성



 중환자가 의사를 찾아왔다. 의사는 그의 배를 갈라보고 그가 불치병에 걸렸음을 확인한다. 의사는 그의 환부에 메스를 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꿰매어 버린다.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으로 돌아가 의사가 준 진통제를 먹으며 주변을 정리하는 것뿐이다.

 노재봉 의원의 국회 질의 파문으로 뒤숭숭했던 민자당이 평온을 되찾았다. 2일 민자당 당무회의는 노재봉 의원 문제를 더 이상 논의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김종필 대표는 4일 김영삼 대통령과의 주례회동에서 노의원의 발언을 막지 못한 데 대해 사과하고 문제를 확대하기 보다는 “나를 질책해 달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지면 커질세라 당 지도부는 노의원 문제를 조심스럽게 다뤘다. 당 차원에서 노의원 문제는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인다.

 노재봉 의원 파문이 조용히 수습되자 민자당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병원에 가서 자기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돌아온 환자의 모습 그대로이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병이 얼마나 위중한지 분명히 확인했을 뿐이다. 민자당 지도부는 당황한 의사처럼 배를 짼 자리만 얼기설기 꿰매버렸다.
 
파문 수습했지만 불화의 상처는 그대로
 노의원 질의 파문에서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내부의 갈등과 불만이 이제 당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누적됐다는 사실이다. 이번 노의원 파문은 민자당이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20개월 동안 3당 합당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조금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질적인 집단이 화학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김대통령은 지난 11월3일 성수대교 붕괴 책임자의 한사람으로 지목돼 사표를 낸 우명규 서울시장의 후임으로 최병렬 의원을 발탁했다.

 최의원은 민정계와 민주계의 경계선상에 있는 인물이다. 그는 5공 때 민자당에 들어와 노태우 정권 창출의 공신이 된 후 요직을 두루 거친 전형적인 구 여권 인사이다. 하지만 그는 정치부기자 시절부터 김대통령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고 지난 대선 때는 김대통령을 적극 도왔다. 대선 승리의 공신이면서도 김대통령 취임 후 이렇다 할 보직을 맡지 못했던 그를 발탁한 것은 김대통령 인사 스타일의 변화를 뜻한다. 최시장 발탁에는 구 여권 인사라도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등용하겠다는 김대통령의 뜻이 담겨 있는 듯 하다. 민자당 내에서는 최시장 발탁이 연말 당정개편의 성격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많다. 구 여권 인사들이 정부와 당내 요직에 대거 발탁되리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의 이 런 변화가 민자당 병의 근본적인 처방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민정계 중에서는 최시장 발탁을, 구 여권 세력을 선별적으로 포용해 각개 격파하려는 상도동계의 정치 술수로 보는 사람도 많다. 잠깐 동안의 진통 효과는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구 여권 인사들의 마음을 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는 힘들다는 얘기이다.

 노재봉 의원처럼 공석에서 자기 생각을 거침 없이 얘기 하지는 않지만, 민정계의원들은 요즘들어 당과 대통령을 비판하는 데 별로 부담을 느끼는 기색이 아니다. 민정계가 이렇게 당 지도부에 대해 공세를 퍼붓는 것은 그동안 쌓였던 감정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다.

 정치인에게 다음 선거에서의 당선만큼 절박한 문제는 아마 없을 것이다. 민정계는 요즘 과연 민자당 간판을 내걸고 선거에 나가는 것이 보탬이 되느냐 하는 문제에 부쩍 회의를 느끼는 듯하다. 과거 김대통령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듯하던 때는 불만이 있더라도 속으로 삭일 수 밖에 없었다. 민자당 울타리 밖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동안 상황이 많이 변했다. 특히 지난번 대구·경북 지역 의원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치러진 세 차례 보궐선거 결과는 대구·경북 지역에서 치러진 세 차례 보궐 선거에서 민자당은 한 자리도 건지지 못했다. 인천 북구청 세금 비리, 성수대교 붕괴로 서울·경기 지역 의원들의 불안감도 커졌다.

“약효 떨어진 여당 간판은 오히려 짐”
 정치관계법 개정으로 여당 프리미엄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중앙당의 자금 지원이 끊기자 대구·경주 보궐선거 때는 민자당 공조직이 거의 마비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선거가 끝난 뒤 민자당 내에서는 ‘여당 간판은 감표 요인만 됐다’는 자탄이 나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인기 프리미엄과 여당 프리미엄이 동시에 사라져버린 것이다.

 다가오는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전망도 불투명하기만 한다. 서울시장과 부산·대구·광주·대전·인천 5개 직할시장 선거 중 민자당이 당선을 장담할 수 있는 곳은 부산뿐이다. 민정계가 심각하게 거취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실제로 민자당 하부 조직의 동요는 벌써 심각한 지경이다. 지방자치 선거에 출마할 뜻을 갖고 있는 민정계 중·하위 당직자들은 상당수 보따리 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계 중진 의원의 보좌관으로서 경남에서 출마할 생각을 갖고 있는 ㄱ씨는 최근 그가 모시고 있던 의원에게 당에서 나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는 “지역 지지자들이 전에는 죽어도 민자당 공천을 받아 오라고 하더니 이제는 그냥 내려오라고 한다. 민자당 간판 값이 형편없이 떨어졌다는 얘기이다 민자당 공천을 기다리며 서울에서 시간을 죽이느니 지역에서 유권자들과 접촉을 하는게 훨씬 실속 있다고 현지 지지자들이 충고했다”고 말한다.

 경남 지역 출마 희망자가 이 지경이니 다른 지역 출마 희망자들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민자당 민정계는 대거 당에서 이탈할 수도 있다. 민정계의 한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상식으로 판단하면 간단한 일이다. 민주계와 민정계의 결별은 시간 문제이다. 대통령과 민주계가 다음 정권을 민정계에게 넘겨주려고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민정계는 궁극적으로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다. 민정계 중 선택된 사람을 빼놓고는 모두 자기 살 궁리를 해야 할 것이다.”

 민정계 다수는 기본적으로 당을 떠나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얘기이다. 언젠가는 떼밀려 나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는 마당에 여당 프리미엄마저 사라졌으니 민정계와 민주계의 결별은 기정 사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명분이 문제인데, 정가에서는 이번에 노재봉 의원이 본인의 뜻과는 상관없이 구 여권 인사들의 명분을 훌륭하게 정리해 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노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의에서 정부의 대북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뒤 “이제 정치권은 환상주의와 현실주의로 분명하고도 새롭게 정체성을 갈라잡아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어느 정당도 대북정책에 대한 명백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국가의 안전이 확보될 수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만약 구 여권 인사들이 결집한다면 대북 강경정책의 깃발을 들고 나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은 이런 ‘선명성’이 상당수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런점에서 본다면 민자당은 앞으로 큰 내부 분열을 두 번 겪을 가능성이 있다. 첫번째 위기는 지방자치 선거 전에 찾아올 것이다. 이 때 지방자치 선거 출마를 원하는 원외 인사들이 대거 이탈할 수 있다. 그리고 지방자치 선거가 끝난 뒤 96년 총선 전에 민자당은 또 한 바탕 소동을 겪을지 모른다. 그 때는 민정계 의원들이 대거 짐을 쌀 가능성이 있다.

지방자치 선거에 지면 ‘내각제 카드’ 내밀 수도
 민정계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김대통령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당장 지방자치 선거 전까지는 민자당내 구 여권 인사들을 최대한 싸안으며 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김종필 대표 체제를 유지하면서 민정계 중진들을 선별 중용하는 방향이 되기 쉽다. 당내 구 여권 인사들과 당외 구여권 인사간의 연결을 차단하는 조처를 내릴 수도 있다. 실제로 정가에서는 멀지 않아 정부가 5 · 6공 세력의 돈줄을 차단하기 위한 특단 조처를 내리지 않겠는가 하는 관측도 많이 나오고 있다. 정부가 금융 실사를 통해 전두환·노태우 씨의 호주머니를 말려버릴 것이라는 얘기이다.

 지방자치 선거 실시에 대해 재검토하고 있는 듯한 인상도 풍긴다. 지난 국정감사에 이어 이번 대정부 질의에서도 민주계 의원들은 서울시 분할론과 기초단체장 선거 연기를 주장하고 나섰다. 민주계 전국구 강인섭 의원은 4일 대정부 질의에서 기초단체장 선거는 아직 시기상조라고 강조한 데 이어 “인구 천만명이 넘는 서울 같은 대도시를 시장 한사람이 다스리는 나라는 없으므로 서울을 동서남북 4개 구역으로 분할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고 주문했다. 연초에 이미 김영삼 대통령이 선거 연기나 서울시 분할은 불가하다고 언급했는데도 이들의 이같은 ‘항명성’ 주장은 여권 지도부로 부터 어떤 제재도 받지 않았다. 야당 에서는 여권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대해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지방자치 선거를 앞두고 여권 수뇌부는 상당히 고심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하다. 지방자치 선거에서 민자당이 패할 경우 민정계 의원들의 이탈은 걷잡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가뜩이나 푸대접 받고 있는 마당에 민자당에 남아 있는 것이 오히려 당선에 방해가 된다면 뒤돌아볼 이유가 없다. 그렇게 되면 김영삼 대통령과 민주계는 다음정권 창출을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야당이나 구 여권 세력과 손을 잡거나, 적어도 야당과 구 여권 세력이 손잡는 것은 막아야 한다. 아니면 두 세력이 모두 만족할 만한 타협안을 내놓아야 한다. 김대중 아·태 평화재단 이사장측은 꾸준히 구 여권 인사들과 관계 개선을 해나가면서 대통령과 민주계에 압박을 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가 하면 김이사장 측에서는 김대통령에게도 관계를 개선해보자는 듯한 제스처를 여러번 보냈다. 아·태 평화재단은 최근 김대통령에게 오는 12월로 예정돼 있는 아·태지역 지도자 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두 세력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방안으로는 내각제 개헌을 꼽을 수 있다. 구 여권 인사들은 벌써 오래 전부터 내각제 개헌을 희망해 왔다. 그리고 정계를 은퇴한 김대중 이사장이 자연스럽게 복귀할 수 있는 길은 내각제 개헌뿐이라는 것이 정가의 공통적인 견해다. 내각제 개헌이 됐든 무엇이 됐든 만약 민자당이 지방자치 단체장선거에서 패한다면 정가에는 한바탕 큰 회오리 바람이 불 것이다.

 노재봉 의원의 발언을 계기로 아마도 여야 정치인 모두는 앞으로의 정국과 관련해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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