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년은 통일조국 元年”
  • 이흥환 기자 ()
  • 승인 1992.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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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국경회담’ 신경전

독일 통일 후 옛 동독지역에서 가장 인기있는 직업으로 부상한 것 중의 하나가 변호사이다. 부동산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변호사를 찾는 시민들이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다. 통일조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일이다.

통일조국은 통일을 기념하기 위해 새 국경일을 정했고, 서울과 북경에서 열리는 ‘한 · 중 국경회담’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백두산을 비롯해 옛 북한과 중국 사이의 국경 문제를 법적으로 매듭짓기 위해서이다. 남북으로 나뉘어 있을 당시 북한이 외국에 진 빚을 갚기 위한 채권 · 채무국간의 회담 소식이 연일 끊이지 않고, 옛 남한의 모기업이 평양의 위성 신도시 건설사업에 눈독을 들인다는 뉴스가 경제면을 장식하기도 한다. 옛 남북한의 경제 관료들은 단일화폐 유통과 태환율 문제가 2대 핵심이 된 통화통합 논의를 위해 머리를 맞댄 지 꽤 오래됐다. ‘새집’을 짓기 위한 대역사가 한창 진행중인 것이다.

배고픈 북한 주민 집단 이주 가능성
그러나 1992년 1월초 현재, 남한의 통일문제 전문가들은 “아직은 새집 지을 엄두를 못낸다. 옛집을 헐어버리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낭비해야 할 입장이다”라고 지적하다. 다른 한편에서는 ‘통일비용’ 논의가 한창이다. 독일식의 단기 흡수통일이 되지 않고 단계적인 통일을 이룰 경우 약 4천억달러가 소요될 것이라는 주장이 제시되기도 한다. 서로 모순되는 듯이 보이는 이 두 갈래 현상은 ‘통일 전 통합’과 ‘통일 후 통합’이라는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됨을 뜻한다.

남북한이 각각 가동했던 비밀 정보조직이나 해외공관의 통일, 교과서나 교육과정의 재편, 우편 · 통신제도의 일원화 등은 통일 후 통합과정에서 다루어질 일들이다. 남북한이 각각 외국과 체결한 각종 조약이나 계약을 재조정해야 하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통일을 염두에 둔 경제통합 사회통합 통화통합이라는 단어가 스스럼없이 쓰이기 시작한 것도 불과 최근 1~2년 사이의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통일로 가기까지의 과정과 방법, 그리고 그 시기다. 게다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감안할 때 통일조국의 탄생과정에 대한 궁금증이 첫손가락에 꼽히는 것은 당연하다.

독일의 통일은 ‘정책이 사건을 뒤따라간 경우’로 평가된다. 물론 통일독일을 있게끔 한 배경에는 서독의 성공적인 민주주의 실현과 경제력, 서독 내 사회 · 문화단체들의 활약 등 정책적 측면이 깔려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동독 시민의 집단 이주와 그에 따른 공산정권의 붕괴라는 ‘사건’이 통일을 앞당긴 요소였던 것도 사실이다. “통일은 과정”이라고 규정한 한 학자는 “통일과정에는 정부 주도의 통일정책 등 통제 가능한 과정과, 동독시민 집단 이주 같은 통제 불가능한 과정이 있다”고 구분한다.

통제 불가능한 과정 중의 하나로 배고픔을 견디다 못한 북한 주민이 대거 남한으로 밀려내려올 경우도 상정해볼 수 있다. 북한 체제를 거부한 김만철씨 일가나 유학생 한두명이 개별적으로 남한 땅을 밟은 경우는 크게 사회문제화되지 않았지만, 북한 주민이 집단으로 이주해올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국내 경제사정을 감안한 남한 정부가 국경(휴전선이나 해안)을 통제하거나, 난민이 돼버린 북한 주민 일부가 보트피플이 되어 일본 해안에 상륙할 가능성도 있다. 국내의 한 미래학 전문가는 “일본의 ‘노무라연구소’에서는 일본 서해안 지역에 이들 보트피플을 수용할 수 있는 난민촌 설치 계획까지 수립해놓고 있다”고 말한다.

남북한과 주변 정세로 보아 북한 주민의 집단 이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견해도 있다. 현재 중국은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논리로 북한의 존속을 원하기 때문에, 점진적인 경제발전 단계에 돌입했을 뿐만 아니라(중국이 경제발전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분석도 있다) 식량 수출국이기도 한 중국이 북한의 식량난을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동독이 서독에 흡수통합된 것은 동독의 배후인 소련이 무너졌기 때문이지만, 중국은 출혈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북한을 끝까지 완충지로 활용하려 들 것이므로 독일과는 사정이 다르다는 것이다. 다만 중국이 식량난에 허덕이는 사태가 오지 않았을 경우를 전제로 한다.

김정일 체제 유지 기간도 통일의 큰 변수
남북한의 통일과정에 돌발변수로 등장할 만한 요소는 수두룩하다. 나름대로 통일의 방법론을 펴는 국내외의 정치학자나 국제문제 전문가들의 이론이 중단기적 상황분석에 바탕한 통일정책과 시나리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른바 통일 시나리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핵심요소는 金日成 주석 사망 여부와 金正日 승계체제의 지탱 가능성 및 북한 내의 돌발사태다. 올해는 김주석이 80세가 되는 해다. 중국의 등소평은 88세의 고령임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지만 “노인 건강은 아무도 모른다”는 속담도 있다. 김주석의 사망을 전제로 한 김정일의 체제 구축을 예측하는 시각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김정일의 리더십은 창군 · 창당 · 항일 빨치산 투쟁 등 40년의 경력을 지닌 김주석과는 비교가 안되기 때문에 3일도 못되어 붕괴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김정일이 10년 이상 조직을 관리해왔고 자기 세력을 요소요소에 박아놓은 만큼 최소한 2~3년은 지탱하리라고 보기도 한다. 남한처럼 60년대식 개발독재형 지도자의 출현을 점치는 사람도 있다. 주민봉기나 식량폭동 등 돌발사태는 김주석이 집권하는 한 가능성이 없어 보였으나 최근 들어서는 여러 경로를 통해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사태의 재판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한다.

앞으로 10년 내의 통일 여부를 가늠할 때 냉전과 데탕트의 ‘10년 주기설’도 통일로 가는 길목에 도사리고 있는 변수 중의 하나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전면에 등장한 86년을 기점으로 5년 후가 되는 91년까지를 데탕트의 전반기로 보면 96년까지의 5년간이 데탕트의 후반기에 해당한다. 만일 이 10년 주기가 되풀이된다면 96년 안에 느슨하나마 남북한이 연방체제라도 구축해놓지 않으면 그 이후 통일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국제질서에 큰 변화가 없는 고정기에는 미 · 소 · 중 · 일 4대 강국이 남북한의 통일을 원하지 않지만, 현재와 같은 국제정세의 유동기에는 산재한 여러 조건이 얽혀 있기 때문에 통일체제를 구축하기가 좀더 쉽다는 분석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권역국가 개념의 21세기적 통일 생각해야”
김주석은 “90년대 한반도 통일”과, 좀더 구체적으로는 “95년 통일”을 장담한다. 외국의 연구기관이나 국제정치학자들도 1995년을 통일조국의 元年으로 관측한다. 미국의 전략 및 국제문제연구소(CSIS) 윌리엄 테일러 부소장은 91년 4월 “김일성의 생존과 관계없이 남북한은 5년 내에 통일될 것”이라고 발언해 주목받기도 했다. 95년에 통일 잔치를 벌일지, 아니면 분단 50년을 돌아다보고 통일 전망을 주제로 세미나만 열고 말 것인지를 “서로 등을 긁어주어야 할 입장”인 남북한은 이제부터 선택해야 한다. ‘남북 합의서’가 채택된 91년의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이 그 선택의 신호탄으로 평가되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수도 있다.

한 미래학자는 최근 들어 무성해진 통일 시나리오를 “단순한 국토 통합의 개념”이라고 반박하면서 20세기적 통일과 21세기적인 통일은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토 주권 국민의 통일이 20세기적인 통일이었다면, 이제는 민족을 한 요소로 보고 여러 민족이 같이 참여한다는 의미의 권역국가 개념이 도입된 21세기적인 통일을 생각해야 한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한반도가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통일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독일은 통일되자마자 유럽합중국 태동 기류에 휩쓸렸고, 통일독일은 이제 유럽권에서 ‘독일’이라는 요소에 불과하듯이 한반도도 아시아 · 태평양권이라는 권역별 국가 개념에 바탕해서 통일조국을 내다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마다 통일의 과정과 방법을 진단하는 견해는 다르지만 1992년 이후 10년 동안이 통일조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최대의 고비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독일이 통일되었을 때 통일독일을 있게끔 한 주체, 즉 ‘운전자’로 첫손가락에 꼽힌 것이 서독의 성공적인 민주주의 체제와 경제력에 바탕을 둔 자신감 넘친 동독과의 교류였다. 정당이나 사회단체간의 통일에 관한 국내 의사 결정과정도 치열했다. 통일조국을 실현하기 위해 남한이 가장 먼저 착수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자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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