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택 대표 부인 이경의씨
  • 김훈 부장 ()
  • 승인 1994.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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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일 곳 찾아간 내 콩팥”

 민주당 이기택 대표의 부인 이경의(李?義 . 49) 여사가 생명부지인 만성 신부전증 환자에게 자기 콩팥을 기증했다. 그 콩팥의 생명력으로 환자는 지금 놀라운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이여사의 장기 기증 소식이 알려지자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는 장기기증 서약서를 보내오는 사람이 3배 가까이 늘었다. 하루에 10통 정도가 접수되던 ‘기증’이 25~30건으로 늘어난 것이다.
 이여사는 자신의 선행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결과로 장기기증운동이 활력을 얻게 된 것은 좋은 일이라고 말한다. 이여사를 만나 그의 마음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았다.

수술 후 요양중이신데 지금 느끼시기에 몸 상태는 어떻습니까?
수술 부위에 약간 통증이 남아 있지만 몸 전체의 컨디션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느낄수  있을 정도로 신선합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만성위염이 있었는데 그것도 좋아진 것 같습니다. 요즘엔 가끔 산책을 하고 가족들하고 잠깐씩 외식도 할 수 있습니다.

신체 장기의 중요한 부분을 떼어 낼 결심을 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에서 두려움은 없었습니까?
오래 전부터 생각해온 일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니까 제가 그동안 누려온 그 엄청난 축복과 행운이 누릴 만해서 누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잘 교육받고 또 매우 특별한 남편에게 시집와서 좋은 혜택을 누리며 살아왔다는 것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럽게 느껴지더군요. 전 젊었을 때는 가난이라는 것이 소설책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인줄 알고 살았지요. 세상의 가난이나 불우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지요. 부끄러움 속에서 이번 일을 결행했던 것인데,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니까 더욱 부끄럽습니다.

장기 기증이란 대개 사후 기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80년대 안구를 기증키로 했습니다. 그리고 90년에 장기 기증 서약을 했지요. 모두가 사후 기증이라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너무 오래살아서, 오래오래 고통 속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 낡아서 쓸모없는 늙은 장기를 주고 간다는 것이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더군요. 그래서 건강하게 살아 있는 동안에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막상 결행할 때는 어떤 결정적 계기가 있었을 것 아니겠습니까.
지난 초가을 미국을 여행하다가 국민학교 때 친구를 18년 만에 만났습니다. 뇌암 말기로, 살 날이 두달 정도밖에 안남은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를 만나서 끌어안고 울면서 ‘먼저 가, 우리들 다 따라갈께’ 라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내 자신의 육신이 멀지 않아 내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괴로운 것이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했지요.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서둘러 결행했지요.

부군께는 왜 미리 알리지 않으셨습니까?
지금도 그 점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알리면 반대하실 것 같았어요. 어느 남편이 제 아내가 장기 떼내는 걸 적극 권장하겠습니까. 또 그분이 나라의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떠맡아서 늘 애쓰는데 이런 문제로 새로운 고통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수술 직전에 편지를 서서 딸 편에 전했습니다. 그 편지로 제 결심을 알린 것이지요.

편지에 뭐라고 쓰셨습니까?
당신이 늘 내 삶을 보살펴 주셨고, 나를 가장 잘 이해하시는 분이니까 내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이번에도 도와달라고 했어요.

신장을 받으신 분(이건자 . 47)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전혀 모르는 분이예요.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와 병원측이 맺어준 사람이지요. 다만 저의 장기 조직과 맞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들으니 가난하고 불우하지만 열심히 살아온 분이라고 하더군요. 내 신장이 바르게 쓰일 곳을 찾아 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수술이 잘 되었지만, 그분도 수술이 잘 되어서 제가 드린 신장의 기능으로 7년 만에 처음으로 편안히 소변을 보았다는 예기를 전해 듣고 저는 행복했습니다. 그분 가족들이 마치 어린아이 오줌 누이듯이 그분의 소변을 거들어 드리면서 기뻐했다고 들었습니다.

장기를 받으신 분이 기증자 신분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까?
처음에는 전혀 몰랐지요. 서로 조직검사를 하기 위해 1주일간 입원해 있을 때도, 그분이 저의 병실에 놀러오기는 했지만 저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 편했습니다. 의사들도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분이 저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간직하게 된다는 것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수술 후에 어찌어찌해서 제 신분이 밝혀지고, 그래서 그것이 그분에게 더 큰 무거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지금도 염려하고 있습니다.

장기를 받으신 분과는 앞으로 어떻게 지내실 생각이십니까?
 그분이 원하실 때만 그분 앞에 나타날것입니다. 그분이 혹시라도 저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든가 무슨 고마움을 표시하는 일이 없도록 저 자신을 단속해 나가겠습니다. 저는 그분이 건강을 회복해 고통받는 다른 사람들을 도와드릴 수 있는 위치로 발돋움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서석재 당무위원, 최형우 장관 그리고 박관용 대통령 비서실장들이 모두 이기택 대표가 초선일 무렵의 4 . 19세대 정치 동지들인데, 그분들 부인하고 매우 친밀한 사이겠군요.
그렇습니다. 그 세분이 모두 제가 시집 갈 때 함을 지고온 함진아비들이었어요. 아마 최형우 장관이 마부를 했던 것 같아요. 함 들어오던 날 그 세 분이 저의 친정아버지 많이 괴롭혀드리고 함값도 두둑히 얻어갔지요. 남편들을 통해서 그분들의 부인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지요.

그분들이 지금은 이기택 대표와 정치적 입장과 지향점이 전혀 다르게 되어 버렸는데도 부인들끼리 친하게 지내십니까?
그럼요, 의도적으로 모임을 갖지는 않지만 어쩌다 만나면 서로 끌어안고 반가워하고 그래요. 정치 얘기는 하지 않아요. 다만 정치하는 남편에게 시집온 여자들의 공통된 고생스러움 같은 걸 서로 얘기하기는 하지요. 남편도 젊은 시절의 정치 동지들이 제가끔 갈라져서 때로는 적대하기도 하는 관계가 된 것을, 그런 운명에 대한 고통을 드러내놓고 말씀하신 적은 없었어요. 아내인 저에게도 그런 얘기는 일절 안했습니다. 다만 때때로 정치 상황이 아주 어려울 때, 그가 옛 벗들 사이에서 엄청나게 외로워하고 있구나 하는 걸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가서 할 일이 많으시겠군요.
우선 김장 준비를 해야지요. 우리집은 김장을 3백포기씩 합니다. 몇년 전에는 5백포기를 했어요. 고추가 3백근도 더 있어야 합니다. 쌀은 한달에 두 가마니 반도 모자라지요. 새벽 5시부터 사람들이 밀어닥치는데 밤늦게까지도 찾아옵니다. 아줌마 두 분이 부엌일을 거들어 주십니다. 출퇴근하는 파출부도 1명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직접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집안에 일거리가 많이 밀려 있을 거예요.

이기택 대표께서는 차기 대권 도전을 공언하신 적이 있는데, 부부간에 그런 문제를 논의하신 적이 있었습니가?
집안에서는 그런 말씀 하지 않으십니다. 야당 정치인의 안사람으로서 지켜볼 대 제 남편은 그날그날 처한 정치적 입장이 가장 어려운 것 같습니다. 언제나 ‘오늘’이 가장 어려운 것 같아요. 그분이 기어코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정치를 해온 것은 아닙니다. 그의 아내로서 그가 정치인으로 펴보지 못한 정치 역량을 좀더 크게 발휘할 환경과 여건이 되기를, 뒷전에서 바라보면서 기대하고 있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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