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당, 동유럽보다 수준 낮다”
  • 김상현 기자 ()
  • 승인 1994.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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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생가몬 대학 신도철 교수 국제정치학회 눈문서 지적 …“민주주의 체제 허약”

한국의 정당 수준은 동유럽 정당들보다 못하다. 한국의 정당들은 국민 대중이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상대적으로 제한할 뿐 아니라 국민의 이기보다는 소수 정당 지도자들의 이익에 더 급급하고,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데에도 게으르다.

 정치인들에게는 달가울 리 없는 이 주장은 지난 8월 21~25일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6차 국제정치학회 세계 총회에 제출된 논문 <한국의 정당과 민주화- 정당의 민주적 기반 강화와 대중>에 실려있다. 이 논문을 발표한 신도철 교수(미 일리노이주 생가몬 주립대·국제정치)는 “조사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한국 정당의 민주화 진척도가 민주주의 이념을 수혈받은 지 1~2년 밖에 안된 동유럽 국가들보다 뒤떨어질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동유럽 9개국과 한국 구민 설문 조사
 신교수는 미국 국립과학재단의 기금을 받아 지난해 11월 한국 국민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벌였다. 한국의 경우 서울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등 주요 도시 거주자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20세 이상 성인 남녀 1천 1백98명이 조사에 응했다. 신교수는 여기서 나온 결과를, 동유럽 9개 국민에 대한 91년 조사 자료와 비교·분석했다.

 한국의 정당은 대중의 정치 참여를 보장하는 데 기여했는가. 응답자의 57%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는 10명중 8~9명 꼴로 긍정적 반응을 보인 동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다.(위 표 참조) ‘정당이 국민의 이익을 잘 대변하는가’라는 항목에 이르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10명중 7명꼴로 정당들이 국민 대중의 이익보다 정당 지도자들의 이익에 봉사한다고 응답한 것이다. 정당이 다수의 이익에 봉사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대답한 사람이 전체의 46~64%에 이르는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와 뚜렷한 명암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당의 운영 행태에 대한 시각도 매우 부정적이다. 정당의 비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본 사람(65%)이 반대 경우보다 더 많았다. 특히 ‘완전히 비민주적’이라고 응답한 사람(26%)은 ‘완전히 민주적’이라고 본 사람(9%) 보다 3배 가까이 높았다. 신교수는 이에 대해 “정당이 대중의 정치 참여를 유도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대의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데에는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 논문은, 한국은 권위주의 체제로부터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체제를 강화하는 데에는 아직 성공적이지 못하다고 결론짓는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번째 이유는, 앞에서 드러난 여론 조사 결과가 잘 말해준다. 민주주의 체제에 걸맞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정당에 책임이 있다는 얘기다.

 신교수는 한국 민주주의가 ‘절반의 실패’를 경험하게 된 또 다른 이유로 유교 문화를 꼽는다. 유교적 정치 세계에서 정당 같은 기구나 기관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시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지도자들의 개인적 품성이나 윤리적 공정성이다. 제도화한 메커니즘이나 특정한 공공 목표보다 개인의 행위가 우선시된다. “요즘같은 정보화 사회에도 한국인들은 여전히 유교적 전통에 더 강하게 이끌리는 것 같다”는 것이 신교수의 분석이다.

 그의 분석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자료는 지난 40년간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타난 유권자의 성향이다. 54년~92년 실시된 아홉 차례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유권자가 소속 정당 보다 후보자 개인의 품성을 보고 투표권을 행사했다. 정당의 영향력은 5~22% 수준으로 미미했는데, 그에 반해 개인적 심성에 기대는 유권자의 유교정치적 성향은 92년 선거에도 위력을 발휘했다(33~50%)

유교 문화에 발목…튼튼한 시민 사회에 기대
 신교수는 논문에서, 전체주의나 권위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것과, 그 전환된 민주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라고 강조한다. 명실상부한 민주주의 체제로 발전하는 데에는 경쟁적 다당제가 긴요하다. 물론 대중의 자발적 지지 기반을 확고히 갖춘 ‘정책 정당’ 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아직 어렵다는 진단이다. 조사 결과에서 보듯 우리 나라 정당은 운영이나 활동 면에서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으며, 오랫동안 국민 속에 뿌리박아온 유교적 정치 문화의 위세 또한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논문은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비관적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다. ‘민주주의를 꽃 피울 수 있는 시민 사회 기반은 비교적 튼튼하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한국 사람들의 남다른 동아리 의식이다. 한국 사람 10명중 8명 이상은 적어도 한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5명 이상은 두개나 그 이상의 단체에 소속되어 있다. 한국과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고 평가되는 스페인의 경우 10명 중 단지 4명꼴로 한 단체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렇게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단체들은 현대적 의미의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시민 사회의 지배적 권력으로 자리 잡으려는 중앙 집권 기구의 견제 세력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신교수는 이 논문이 한국 정치인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한다. “아무리 민주정당임을 표방해도 운영이 비민주적이고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생존할 수가 없다. 공산주의가 몰락한 후에도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받아 여전히 권력을 행사하는 동유럽 옛 공산당의 후신 정당들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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