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경그룹 ‘쪼개려고 늘린다’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2.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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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 자녀와 분할 앞두고 방계회사 늘려 … ‘사돈 특혜’ 구설수

국내 5위 재벌인 선경그룹이 숙원이던 증권업에 진출해 ‘선경증권(가칭)’을 갖게 됐다. 지난해 12월10일 증권사 서열 11위의 태평양증권을 인수한 것이다. 이 사실은 재벌들의 증권사 인수 및 합병 추진 움직임이 수면 위로 드러나는 신호탄이 됐다. 이는 또한 선경그룹의 2000년대 구상의 중대 사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선경의 증권업 참여는 崔鍾賢 회장과 태평양그룹 徐成煥 회장의 전격합의에 따른 것으로 알려진다. 그룹 경영기획실의 한 관계자는 “구름 위에서 이루어진 일이라 누구도 몰랐다”면서 孫吉丞 경영기획실 사장의 지시로 실무작업에 들어간 것이 11월 4일경이었다고 말한다. 이 날은 (주)선경이 끈질기게 나돌던 증권업 참여설에 대해 증권거래소에 “검토한 바 없다”는 부인공시를 낸 4일 후였다.

증권사 인수에 ‘특혜’ 의혹도
선경의 증권업 진출은 최회장이 6공화국과 특수한 관계라는 점에서 곱지 않은 눈길을 받았다. 그로부터 9일 후 동방유량은 홍콩계 증권사 ‘펠레그린’과의 합작을 발표해 특혜의혹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대통령 사돈들이 왜 증권사를 하려고 하느냐”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에서부터 “뭔가 있다”는 구설수가 꼬리를 물고 있다.

재계는 몇가지 점에서 석연치 않다고 본다. 우선 최종현씨의 개인 명의를 빌린 점을 두고 여신관리규정, 출자한도 규제, 복잡한 인허가 절차를 피하기 위한 편법이라고 말한다. 선경측은 “너무 경황없이 전격 인수하게 돼 법인명으로 할 때의 복잡한 절차를 밟을 시간이 없었다”고 해명한다.

또 너무 헐값에 팔렸다는 점에서 “숨은 계약조건이 있는 게 아니냐”하는 추측도 있다. 일반적으로 증권사의 영업권 가치를 인정하는 프리미엄은 5백억~1천억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선경은 겨우 주당 2천원 꼴인 56억6천만원에 사들였다. 선경측은 “인수 당시 태평양증권의 주가는 1만6천원 정도였으며, 우리의 매입가격은 2만2백원이었다. 사실상 4천원의 프리미엄이 보장된 것이며 무엇보다 상품으로 갖고 있는 주식(2천억원)이 주가하락으로 결손금이 5백여억원이나 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헐값이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계약조건에 기업실사를 하지 않기로 되어 있어 이를 떠넘겨받는 불이익을 감안하면 파격적 조건이 못된다는 주장이다.

‘숨은 계약’ 의혹에 대해서도 거대한 이권이 걸린 제2이동통신 사업 참여가 확실한 선경이 컨소시엄 구성에 태평양그룹 참여를 보장한다는 소문이 무성했으나, 선경측은 “컨소시엄 구성 절차를 모르는 사람들이나 할 억측”이라고 일축한다.

선경그룹은 장외거래를 통해 1차로 2백83만주를 5백71억6천6백만원에 사들였으며 이중 1백83억원은 계약금으로 현급 지급된 상태이다. 나머지 중도금과 잔금의 지급방법과 시기는 추후 결정사항으로 “1월중에 낸다”는 것만 잠정 결정돼 있다. 1차 거래로 태평양증권의 대주주는 태평양화학에서 최종현씨(지분율 19.27%)로 바뀌었다. 선경측은 2월경에 2백70만주를 추가로 사들일 계획인데 이 매입이 끝나는 시점에서 명의를 최회장에서 각계열사로 옮길 예정이다. 이들은 출자여력이 3천억원이나 된다. 1,2차 매입대금은 1천억원 남짓이다.

선경은 1~2월중 주주총회를 거쳐 상호를 바꾸고 임직원은 그대로 두되 그룹에서 10명 남짓만 증권쪽으로 보낼 예정이다. 기획실을 만들어 부사장으로 朴道根씨를 파견하고 기획 인사 재무 영업 4개팀의 팀장(부장급) 등을 보내 전문경영인인 유철호 사장을 보좌하게 한다는 것이다.

선경은 지분을 갖고 있던 한국투자증권 신영증권과 동서증권 등의 인수를 시도하기도 했다. 증권사 인수가 선경측으로서 숙원사업이 돼온 것은 그룹의 자금줄을 확보한다는 차원과, 자본자유화 등 금융혁신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여유자금 운영’이 제조업에서 돈버는 것만큼 중요해졌다는 판단때문이다.

그러나 증권업 진출의 의미는 증권사를 계열사로 거느리게 됐다는 단순한 차원이 아니라 2000년대 세계일류의 정보통신기업으로 변신한다는 좀더 큰 그릇에 담긴다는 평가가 많다. 선경측은 이를 최종현 최장의 ‘10년 구상’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다.

지난 53년 선경직물로 출범한 선경그룹은 60년대까지의 섬유전문기업에서 그동안 종합에너지·종합화학기업을 일구어왔다. 이른바 ‘석유에서 섬유까지’라는 일관된 수직계열화 작업이 올 연초에 마무리됨에 따라 선경은 새로운 도약을 위한 비전이 필요해졌다. 이 비전은 이미 84년 최회장의 ‘2000년대 세계 일류의 종합정보통신사업’이라는 구상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92년을 도약의 원년으로 보는 선경그룹은 정지작업만큼은 지난 87년부터 착실히 해왔다. 뉴크로닉스, 선경유통, 선경정보시스템, YC&C 등 7개의 정보통신회사를 만든 것이 그 예이다. 10년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금융업 진출이 절실한데 그 길은 현실적으로 증권사 인수밖에 없다. 보험업의 경우 15대 재벌은 어떤 식으로든 진출이 금지돼 있는 탓이다.

제2 이동통신에 눈독
증권업 진출에 성공한 선경이 현재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제2이동통신이다. 위성통신사업, 국제 광케이블사업 등을 포함한 정보통신사업 고도화의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선경은 이동통신 사업에 다른 경쟁자보다 준비를 많이 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1백27명의 전담요원이 구성돼 있으며 지난해 5월에는 정보통신연구소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아직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특별팀은 3월에 있을 사업계획서 작성을 위한 도상훈련에 들어가 있다. 선경의 한 관계자는 “제2이동통신사업은 우리 것”이라면서 서슴없이 따놓은 당상이라는 표현을 한다.

증권업 진출, 제2이동통신 사업 등 선경의 10년 구상에 포함될 수 있는 일련의 변신작업에 대해 재계에서는 그룹의 분할작업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본다. 이는 최종현 회장이 창업자가 아니라는 데서 기인한다. 선경그룹의 창업자인 故 崔鍾建 회장이 지난 73년 급서하면서 그룹의 경영권은 동생인 최회장에 승계됐다. 미국 위스콘신대학과 시카고 대학원을 졸업한 수재 최회장이 이미 형과 쌍두마차로 선경의 경영에 깊이 참여하고 있었던데다 당시에는 고인의 자제들이 아직 경영권을 받기에 어렸던 탓이다. 현재 선경그룹의 핵분열이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나도는 것은 고인의 큰아들인 胤源(42)씨와 차남인 信源(40)씨가 이미 중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현재 선경그룹은 26개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매출액이 큰 회사는 (주) 선경(90년 매출액 2조원), 유공(3조2천억원), 흥국상사(5천6백억원), 선경인더스트리(3천9백억원), SKC (3천6백억원) 등 11개사이고 나머지 15개사는 이들 큰 기업의 투자회사 성격이 짙다. 재계에서는 73년 승계 당시 고인이 이뤄놓은 회사들이 아들들의 몫으로 쪼개질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현재 두사람이 각각 선경인더스트리 대표이사 부사장, 상무이사로 재직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는 않다는 말이다.

최회장은 이미 지난해 鍾?씨와 鍾旭씨등 두 동생에게 선경매그네틱을 주어 분가시킨 바 있다. 선경측은, 선경매그네틱은 종욱씨가 일궈놓다시피 했으며 선경그룹이라는 우산 속에 있기 보다 독자경영을 하는 것이 여신관리 등 유리한 점이 많아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이라면서 분가보다 ‘분리’라는 표현이 적합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이를 선경그룹의 1차 그룹 쪼개기 작업으로 이해하면서 고인의 자식들 몫으로 2차 쪼개기도 멀지 않으리라 관측한다.

어차피 이런 결정이 불가피하다면 최회장으로서는 정보통신사업 등으로 자기 몫 부풀리기에 나설 수밖에 없으며 증권업 진출도 이 큰 구상 속에 녹아든다는 것이다. ㅅ그룹의 한 관계자는 “최회장이 자신이 이미 일궈놓은 유공과 관련 기업, 그리고 정보통신사업 중심으로 자기몫 구도를 짤 것”이라고 예측한다. 선경 내부에서도 최회장이 정보통신사업을 직계의 몫으로 배려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선경그룹은 91년에 매출액이 10조원을 넘어서 5위 자리를 확고히 다졌다. “오늘의 선경보다 내일의 선경이 더 무섭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주목을 받는 선경그룹이지만 핵분열이 불가피하다면 이것은 선경의 행로에 중대한 고비로 작용할 수 있다. 최종현회장은 “오너의 가족이라 해도 경영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면 기업을 할 수 없다. 전문경영자를 중용한다”는 경영관을 강조해왔다. 집안의 몫을 나눠야 한다는 불가피성과 이같은 경영관은 상충될 수도 있어 어떤 절충점을 찾아낼지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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