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국공동체 생명 짧을 듯”
  • 모스크바 · 김창진 통신원 ()
  • 승인 1992.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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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간 경제마찰 · 무력충돌 가능성

  옛 소연방을 대체할 독립국공동체가 지난 1월1일 정식 출범했으나 벌써부터 장래에 대해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다.

옛 연방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치 · 경제적 난제들은 각 공화국의 이해와 맞물려 독립국공동체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이같은 징후는 경제난과 각 공화국에 배치된 핵무기의 처리문제, 나아가 3백70만명에 이르는 병력통제문제 등에 대해 벌써부터 11개 회원국간의 불협화음이 증폭되는 데서 발견된다.

신생 독립국공동체는 미국을 비롯해 서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음으로써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정작 미국 등 서방측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11개 독립국으로 구성된 연방체제가 현재와 같은 무질서 상태에서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 여부이다. 제임스 베이커 미국 국무장관이 “독립국공동체가 오래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견해를 표명한 것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신생체제의 복합적인 사정 때문이다.

회원국간에 핵심 현안으로 떠오른 전술핵통제와 3백70만 연방군의 장래에 대해 옐친은 자신의 ‘단일통제권’을 주장하지만 카자흐 · 우크라이나 등 일부 힘있는 회원국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또한 연방 해군의 주력인 흑해함대를 통괄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이를 양보할 기미는 없다. 이같은 몇가지 난제는 작년 12월30일 민스크에서 열린 회원국 정상회담에서 심도있게 논의됐으나 군문제가 각 공화국의 경제 및 민족분규 등 제반 요소와 함수관계를 갖고 있어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91년 12월25일 저녁 7시, 소련의 3억 인구가 지켜보는 가운데 고르바초프는 고별방송을 했다. 85년 이래 7년 동안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깃발을 내걸고 소련을 이끌어온 그는 소련 최초이자 최후의 대통령으로서 마지막 연설을 했다. 그의 퇴임과 더불어 세계지도에서 소련(CCCP)이란 나라도 사라졌다. 붉은 권력의 상징으로 불렸던 크렘린의 지붕에도 3색의 러시아 깃발만이 펄럭이게 됐다. 고르바초프의 퇴임 다음날 저녁 텔레비전 뉴스의 진행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은 새로운 역사, 새로운 정부와의 첫날이었습니다.”

과연 무엇이 그리고 누가 고르바초프를 정치무대에서 밀어내고 70년 동안 유지돼온 세계 초강대국 소련을 좌초시켰는가. 옐친이었는가, 빵이었는가, 미국의 음모였는가. 이 모두가 소연방체제의 해체와 새로운 독립공화국 공동체를 탄생시킨 원인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 소연방체제가 성립되고 유지돼온 그동안의 과정에서 각 공화국의 입장과 소련이라는 국가가 국민에게 어떤 존재였는가 하는 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르바초프의 퇴임 직후 만난 올가 라두가씨(46 · 출판사 근무)는 “러시아와 카자흐공화국 사이에 도대체 무슨 공통점이 있는가.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나라들이 단일한 정치체제 아래 산다는 것 자체가 무리 아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물론 그의 말에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대다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한다.

소연방해체에 대한 파델씨(34 · 외국 상사 근무)의 반응은 이렇다. “지난 70년 동안 우리 역사에서 국가는 모든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정당한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이나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사라져야 할 것이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모스크바에 사는 러시아 공화국 국민, 모스크바 시민들은 소련해체를 애도하지 않는다. 다만 고르바초프를 동정할 뿐이다.

옛 연방을 버리고 새로운 연방을 추진한 각 공화국에는 다른 민족을 먹여살려야 했던 데서 생긴 불만이 오랫동안 축적돼왔다. 이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은 연방해체의 배후에 깔린 사회심리적 요인이다. 다시 말해 침해받을 수 없는 최소한의 인격적 자유를 보장받는 개인의 자율적인 집합으로써 구성되는 것이 국가라는 틀에서 볼 때 지난 70년 동안의 소련 사회는 앞의 요소가 버려진, 즉 ‘모태없는 국가의 절대화’로 규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사회를 조립했고 개인의 모든 것을 책임졌다. 국가가 책임지는 모든 것이란 ‘빵과 사상’이었다. 그곳에서 인민들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그들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 빵과 자유는 유럽에, 미국에 있었던 것이다. 소련 또는 공산당의 이름으로 행해진 모든 권위는 부정되기 시작했다. 옐친은 그것을 간파했고 고르바초프를 그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적절히 이용했다.

러시아공화국뿐만 아니라 11개 공화국 주민 대다수가 이번에 성립된 새로운 공동체에 긍정적 반응을 보인다. 각 공화국의 정치적 주권이 보장되는 가운데 경제협력을 모색한다면 좀더 풍요로운 나라를 건설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최선의 형태일지 어떨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국민의 기대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빈사상태인 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돼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으로는 2~3년 후 - 경제 · 사회적 격차가 드러날 -부터 표출될 듯한 각 공화국간의 경제 및 무력적 충돌을 어떻게 막을 것이냐도 문제다.

오늘 그들은 소련을 거부했지만 몇년 후 “그때가 좋았다”라고 푸념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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