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의 업보'가 버거운 민자당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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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정계 . 당 고문, 재야 수혈에 번번이 반발… 민주계, '집안 정리'에 곤욕



 "과거에 민주화 운동을 주도한 세력과 안보 책임을 맡아서 국가를 보호한 세력, 그리고 이 나라 경제를 이만큼 발전시킨 세력이 한데 모여…".

 여당 실세이자 서울시지부장인 김덕룡 의원은, 지난 11월11일 전 민중당 대표 이우재씨를 민자당의 새 지구당위원장으로 뽑은 구로 을 지구당 대회 축사에서 현재 민자당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가 3당 합당의 세 주체를 연상시키는 이런 말을 새삼 꺼낸 것은 물론 이우재 위원장의 경력을 소개하는 대목에서였다. 이어서 그는 "이우재 위원장 같은 합리적 진보주의자와 양심적 보수 세력이 힘을 합하면 당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2. 12 사건 처리를 놓고 여. 야가 격돌하는 바람에 국회가 공전을 거듭하던 이 날, 한때 재야의 한 축을 이끈 이우재씨가 3당 합당으로 탄생한 집권 여당의 지구당위원장이 된 것이다. 비록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그는 민중당 시절 민자당에 가장 비판적인 정치 세력을 이끌어 왔었다. 이로써 민주당에는 3당 합당 세력뿐만 아니라, 80년대 재야 운동권 출신들이 작지만 분명하게 한 켠을 차지하게 되었다.

잠들지 않은 '색깔 논쟁'
 아닌 게 아니라 이날 민자당 구로 을 지구당 임시 대회에는 12. 12 군사반란 이후 거리에서, 선거판에서 반대편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인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김종필 민자당 대표, 전 민중당 정책위의장 장기표씨, 민중당 대변인을 거쳐 이우재씨와 함께 입당한 민자당 도봉 을 지구당위원장 정태윤씨, 이재오 전 민중당 사무총장, 남재희 노동부장관, 이명박. 김중위. 강신옥. 손학규 의원, 서울대 안병직 교수 등 당내외 인사들이 단상에 얼굴을 비쳤다. 부천 소사 지구당위원장인 김문수씨는 미국 방문중이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김덕룡 의원의 말을 빌리자면 '안보 책임을 맡아서 국가를 보호한 세력', 그러니까 민자당내 12. 12 주역과 민중계 핵심들만 눈에 띄지 않았다. 하기는 민자당이 지난 4월 김문수씨를 필두로 이우재. 정태윤 씨 등 재야 출신을 영입할 때부터, 안무혁. 곽정출. 노재봉. 허화평 의원 등 민정계 핵심 인사들은 끊임없이 '색깔 논쟁'을 일으키며 서로 감정으로 키워온 터였다.

 그러나 이 날 이우재씨를 위원장에 선출한 일은 12. 12 군사반란 논쟁에 가려졌다. 여.야대표가 장외에서 설전을 벌인 까닭이다. 민주당 이기택 대표는 12.12 군사반란 기소유예 방침 철회를 요구하는 민주당보를 들고 거리에 나섰으며, 민자당 김종필 대표는 구로 을 지구당 대회 격려사에서 "12. 12는 검찰에서 따지니까 국회를 열어서 내년 예산을 심의해야지 공정시키면 국민에게 부담이 된다. 야당이 정 그렇게 나오면 단독 국회라도 열어 처리하겠다"라며 민주당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자칫하면 한국 정치가 또 한번 파행으로 치달을 형국이다. 이기택 대표가 12. 12 사건 기소유예 방침 철회에 정치 생명까지 걸며 공세를 펴는 데 반해, 민자당은 야당을 국회로 끌어들일 묘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노재봉 의원 발언 파문 이후 허화평 의원까지 가세해 당 지도부를 공격하고 나서는 통에 현재 민자당은 집인 단속을 해야 할 판이다. 허화평 의원은 11월8일 "12. 12가 반란이면 반란군 집단이 민정당을 뿌리로 하는 민자당은 무엇인가"라며 민주계의 아킬레스 건을 드러렸다. 물론 허의원 발언에는 재야 입당파의 색깔을 문제삼는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재야 입당한 "12. 12 기소유예는 불가피한 선택"
 이우재씨에 이어 정태윤씨는 11월15일 임시 지구당 대회를 치렀다. 그러나 둘 다 시기가 묘했다. 당 지도부는 애써 발언 파문의 의미를 축소하려고 했지만 민정계의 반발을 다독거리지 못해 당내에 이상 기류가 흐르는 상황이었다. 어찌 보면 재야 출신들을 12. 12 기소유예 정국에 피곤하게 끼여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재야 입당파는 12. 12 군사반란 기소유예 방침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그리고 끊임없이 그들의 과거 경력과, 재야 출신의 입당에 따른 당의 이념 노선을 시비하는 일부 의원들의 저항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들은 민정계로부터 친북 세력, 심지어 빨갱이라는 말까지 들었다. 김문수씨가 입당했을 때 박용만 고문은 "우리 당이 빨갱이를 받아들이고 있다"고 말했다. 고려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84년 민정당사 점거 농성 배후 협의로 징역살이를 한 김영춘씨가 이번에는 박용만 고문의 지역구를 넘겨받았다(인터뷰 참조).

 민자당 도봉을 지구당위워장 정태윤씨는 "군사반란이라고 규정하고도 기소유예 처리한 것은 현 정부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당일각에서 계속 우리의 경력을 문제삼는 것을 이제는 개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우재 위원장은 "역사는 무 자르듯 깨끗이 넘어가는 게 아니다. 지금도 봉건 잔재와 일제 잔재가 남아 있지 않는가. 최근 일련의 발언 파문은 화합으로 가는 민자당의 잔재라고 생각한다. 결국 그들은 부수적 존재로 축소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더 이상 색깔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지만, 민자당내 민정계 핵심들과는 일정하게 선을 긋는 듯한 발언이다.

 결국 '한 지붕 세 가족'이던 민자당을 이끌어 온 민주계는 12. 12 군사반란 사건 기소유예라는 덫에 결려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새식구 영입에 반발하는 민정계를 달래가며 집안을 정리하고, 한편으로는 야당의 공세에 대처해야 한다. 정치권 얘기대로 태생적 한계에 봉착해 있는 것이다,
吳民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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