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뒤에 묻힌 인물 기자들이 ‘발’로 복원
  •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사학) ()
  • 승인 1992.01.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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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한국현대사인물》한겨레신문사 펴냄

 어느 나라에서나 근현대사가 중요시되고 있지만, 한국의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한국의 근현대사는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복합적으로 전재되어왔고 분단이라는 특수한 체제에 따른 억압과 대립, 혼란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대사는 더욱 깊이 연구되고 국민대중한테 교육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위와 같은 근현대사의 성격이 이데올로기의 제약과 권력의 억압을 야기한탓에 해방 이후 40여년 동안 권력과 지배층의 일방적인 이데올로기 선전을 제외하고는 80년대 중반까지 우리 근현대사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고 사실대로 교육되지도 못했다.

 소수의 젊은 연구자들은 70년대말부터 해방전후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대한 이해가 대중화된 것은 87년 6월항쟁 이후부터이고, 그것도 주로 소설과 넌픽션등을 통해서였다. 특히 이태의《남부군》이 출현한 이후 현대사에 대한 대중화가 진전되어 조정래의《태백산맥》에서 하나의 절정을 이룬 감을 주기도 했다. 이와 같이 대중의 당대사에 대한 탐구가 열기를 띠어갈 때, 여기에 또 하나의 봇물을 터준 것이 격동의 80년대를 마감하는 80년대말(89년 10월)부터〈한겨레신문〉에 연재된 ‘발국 한국현대사인물’이었다.

근현대사 거의 모든 부문 시야에 넣어
〈한겨레신문〉에서 신문 한면을 할애해 싣기 시작한 ‘발굴 한국현대사인물’은 수십만명이 동시에 보는 신문에 게재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지만, 다른 검으로도 근현대사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앞서 언급한 소설이나 넌픽션은 학문적인 성격이 약했던 데 비해 ‘발굴 한국현대사인물’은 연구의 성과를 담고 있어서 한국근대사에 대한 대중의 학문적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소설이나 넌픽션이 특수한 부문에 제한 될 수 밖에 없는 데 비해 이 연재는 근현대사의 거의 보든 부문을 그 시야에 넣음으로써 폭넓게 우리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가 될 수 있었다.

 이번에 한겨레신문사에서 펴낸《발굴 한국현대사인물》은 그간 독자들이 애독했던 연재 가운데 우선 34명을 선정하여 한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한번 본 다음에는 폐기하게 되는 신문의 여건상 때로는 듬성듬성 읽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도 차분히 생각하며 다시 읽을 수 있도록 엮은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34인은 대체로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민족해방투쟁 또는 근대 민족주의운동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거나 어떤 한 부문에서 뛰어난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봉건의 끝, 최초의 근대인’인 정약용, ‘민족주의 정진의 넓은 그릇’ 신채호, ‘한글시대를 연 첫 국어학자’ 주시경, 냉전과 독재의 그늘에서 활동한 조봉암 장준하 등과 같이 잘 알려진 사람들과 만주에서 항일 투쟁을 벌인 남자현(여), 과학 대중화운동을 편 김용관, 증산교의 한 파를 이은 고판례(여) 등 생소한 인물들도 있고, 해방 직후 경찰계에 몸담았던 최능진이나, 자유당 때 신념에 따라 판결을 했던 법조인 유병진처럼 비교적 덜 알려진 인물들도 있다.

 이 책에는 대체로 각 분야의 인물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다. 늑 사회주의운동을 한 정종명(여), 민족기업가의 전형 안희제, 조선인 비행사 안창남, 문화재 보존자 전형필, 진보적 언론인 조용수, 군인 이종찬, 영화인 나운규, 판소리계의 정응민, 과학자 우장춘 등 각 부문에서 중요한 활동을 한 사람들이 들어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가장 돋보이는 대목은, 다시 말해 왜곡된 한국근현대사를 바로잡는 일에 기여한 것은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 있거나 부당하게 평가받은 인물들을 발굴하여 복원한 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물로는 당대에는 잘 알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잊혀져 가고 있는 이명래고약의 이명래 같은 사람도 있지만, 민족문제와 관련해서 볼 때 민족해방 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사회주의 계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현상은 《남부군》이 나온 이래 ‘명망가’가 되었지만 음악가 김순남이나 만담가 신불출은 한동안 거의 잊혀졌던 인물들이다. 공사주의운동의 김철수 이재유, 농업경제학자 인정식, 형평운동가 장지필, 농민운동가 서태석, 노동운동가 차금봉 등은 전문연구자들에게는 알려져 있었으나 대중에게는 역시 잊혀진 사람들이었다.

 이 책에는 문학방면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거의 수록돼 있지 않고 학술계·언론계 인사들도 적은 편이다. 종교계 인사로는 경봉스님 김교신 박중빈 등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기자들의 기호가 작용한 점도 있을 것이다

왜곡된 역사인식 바로잡는 데 기여
 《발굴 한국현대사인물》은 편파적이고 왜곡된 근현대사에 대한 인식을 바로잡는 데 기여하고, 잊혀진 인물을 되살려내고 감춰졌던 사실을 추적하여 민족사를 복원해 당대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높여준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 반면 ‘한국현대사인물’이라고 이름 붙었는 데도 몇몇 인물은 일제시기의 행적까지는 밝혀졌으나 정작 해방 이후의 것이 공백으로 남아 있어 아직도 해방 이후사는 베일에 싸인 부분이 많다는 것을 실감케 했다. 이극로 인정식 장지필 등의 경우 조금 더 노력했으면 해방 이후의 활동이 드러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책은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썼기 때문에 장점과 단점이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을 보여준다. 증언자들이 점차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기자들이 발로 뛰어 증언을 채취하고 새 자료를 발굴해낸 것은 학문적인 업적으로도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대중적인 문체와 구성도 돋보인다. 그러나 시일이 촉박한 채 쓴 것들도 있고, ‘모든 여성들의 근원적 해방’(고판례) 등 과장적인 묘사도 보이며, 인물 주변 이야기를 모아놓은 부분도 있다. 한 인물에 대한 총체적 파악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장준하도 냉전시대의 성격과 민주투사로서의 발전적인 면이 함께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인물평전에서는 긍정적인 면을 주로 부각하기 쉬운데 이 책에서는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이와 함께 일제때에는 친일활동을 하고 해방 직후에는 단정운동에 가담하였으며, 50년대에는 이승만독재의 일익을 맡았던 김활란 백낙준 모윤숙등 사회 저명인사들도 등장시켜야 할 것이다. 이같은 객관적인 접근을 통해 대중들로 하여금 균형잡힌 역사감각을 지니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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