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의, 남성에 의한 '섹스'는 끝났다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4.11.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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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나를…〉 정선경, 〈서른 잔치는…〉 최영미, 〈자기만의방〉이영란을 통해 본 '한국의 성 담론'



일찍이 존 레논은 노래했다. '여자는 세상의 깜둥이지'라고, '깜둥이'에는 어떠한 의미가 담겨 있을까. 억압. 굴종. 천시. 열등….

 69년 서울 출신이고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온 한정님의 시집 〈키 작은 악사와 시 쓰는 작부와〉(서울기획)에는 〈월경에 대하여〉라는 시가 있다. '옛날엔 월경을 사랑앓이의/징후라고 시도 쓰고 그랬는데/요새들언 그날이 지겹다/알맞게 예쁜 아이도 낳을 게 아니면서/일없이 쏟아내는/내 감정의 오물들/내 성욕의 찌끼들/그건 애주머니라고/꽃씨의 강보라고/어머닌 누누이 이르셨지만/그늘진 자궁에서도 싹이 나냐고/대들었더니 몹쓸년이 책을 헛봤다고/방을 훔치며/서가를 공연히 흘겨보던 어머니…'.

 성(性) 담론이 변하고 있다. 성에 관한 이야기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닌 것으로 변하고 있다, 여성들은 더 이상 깜둥이가 아니다.

 프로이트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여성학자들 사이에서는 처단해야 마땅할 공적 제 1호이다. 왜 그런가. 여성들을 '거세 콤플렉스' 속으로, 즉 '페니스가 없는 장애자, 태어날 때부터 숙명적인 불구'로 만들어버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주장을 단적으로 말하면, 남자 꼬마들은 '있고' 계집아이들은 '없기' 때문에, 남자는 제대로 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초자아를 형성할 계기를 갖지만, 여자는 거세 콤플렉스 속에서 불완전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때부터 남성의 카니발이 시작되었다. 여성은 '없음' 그 자체가 여성으로서 자리매김되는 근본적 특성이 되었고, 바로 이러한 과학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미신이 인류를 통제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래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세계의 재현은 세계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남성의 업적이다. 그들은 그것을 절대적 진리와 혼동한 그들의 관점으로 묘사한다'라고 강조했다. 마거릿 미드 역시 '한 사회가 남성과 여성이라는 배타적 질서에 길들어 있는 것과 여성과 남성의 생물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문화적 특성에 의한 것'이라고 파악하고, 자크 라캉 또한 남녀 차별을 언어 습득과정의 체화에 의한 혼동으로 보았다.

그럼에서 문제는 여전히 관습이고, 지배 이데올로기이다. 세상에는 여전히 '몹쓸 년 책 헛봤다'고 책하는 어머니와 '그늘진 자궁에서도 싹이 나냐'고 대드는 딸의 대비, 그 배타적 관계가 주류를 형성한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딸들〉이라는 책의 라디오 광고에서는 '나는 결코 엄마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라고 외침이 터져나오고, 그 외침은 전파를 통해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급속도로 전염된다.

 94년 한국 사회는 기존 관습에 대한 항거, 엄마처럼 살지 않으려는 딸들의 몸짓을 몇 차례 보았다.〈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영화 배우 정선경(23)이 그랬고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시인 최영미(34), 혹은 한정임(26)이 그랬다. 〈자기만의 방〉의 연극배우 이영란(41)도 그랬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엉덩이가 예쁘다는 이유로 발탁된 '바지 입은 여자' 정선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성담론의 역전 현상을 보여준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분명 포르노그라피를 선언한 영화이고, 많은 관객이 그 영화를 포르노라고 생각하고 보았다(거기에 속임수가 있다). 문제는 장선우 감독이나 정선경이 그 영화를 포르노로 찍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장선우 감독은 이 영화를 성 담론을 통한 시대상. 사회상의 반영, 즉 포르노는커녕 통렬한 리얼리즘 영화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가 "포르노로 찍지는 않았지만 대중이 포르노로 여긴다고 해도 무방하다"라고 말한 것이나, 정선경이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나를 포르노 배우로 생각하지 않지만, 포르노 배우로 여겨도 상관 없다"라고 똑같은 문법으로 말한 것이 한 증거이다.

 공무원 아버지의 딸로 1남3녀의 막내이고, 대학에서 현대 무용을 전공한 정선경은, 이 영화를 촬영하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진짜 포르노 영화 두 편과, 국내에서 상영 불가 처분이 내려진 프랑스 영화〈데미지〉를 보았다고 한다. 영화 출연 제의를 받고 두 달 동안 도망다닌 이 처녀가 난생 처음 포르노 비디오를 보고, 뭇 사람에게 자기 알몸을 드러내기까지의 과정은 분명 이 시대의 지배적인 성 담론을 반영한다. 그러나 정선경이 당당하게 카메라의 눈과 맞서기 시작하면서 역전이 시작된다. 만약 정선경이 수줍어하거나 억지 몸짓, 예전의 문법대로 '하기 싫었는데 감독님이 하도 권해서 어쩔 수 없이 벗었어요'라는 말을 되풀이했다면 이 영화는 포르노로 보였을 것이다. 카메라의 눈을 속일 수 없다. 그러나 정선경은 "〈데미지〉를 통해 인간의 나신이 얼마나 예술적이 될 수 있는지 깨달았다. 내 자신이 스타가 되기 위한 승부수로 옷을 벗은 것도 아니다. 다만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다. 카메라 렌즈와 스태프의 시선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새로운 생산 양식을 가진 사회 도래한다.
 이 영화가 결혼에 장애가 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물론 많이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어머니들, 혹은 사회의 어디에선가 일방으로 강요한 것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딸들에게 더 이상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영미는 최근 시집〈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40만부의 인세를 받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마지막 섹스의 추억〉같은 시 제목이라든가, 〈컴퓨터와 x할 수 있다면〉과 같은, 여성에 의한 '대담한'성적 담론으로 시를 썼다는 사실이 시집이 많이 팔린 중요한 이유인 것도 분명하다. 그는 독자 반응에 대해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이 있었다. 성적 언술이 남자의 전유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위협감을 갖고 내게 공격적인 태도를 가진 것이고, 그게 아니면 남성들에 대한 유혹으로 받아들였다. 두 가지 모두 곤혹스러웠다"라고 말한다.

 "믿지 않겠지만 대학교(서울대) 4학년 때야 비로소 아이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았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아무도 그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과에 여학생은 나 혼자여서 남학생 얼굴이 모두 똑같이 보였다"는 이 시인은, 정선경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섹스 어쩌고 하는 시를 쓰면서도 전혀 사회 통념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는 "더 세련된 도덕에 대한 더 조잡한 도덕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한다. 조잡한 도덕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가도, 세련된 도덕이 나타나면 조금 전까지 주류였던 조잡한 도덕을 부도덕으로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최영미는 "오늘날 문명의 위기를 느낀다"라고 말한다. 그는 "성의 공식적 부분은 아주 엄격하다. 그러나 비공식적 부분은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긴장 관계가 아주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서 있다. 조금 지나면 크게 폭발할 것이다. 새로운 체제를 찾아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배타적인 남녀의 만남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이 모순이 자기 무게를 감당 못해 깨지고 다른 식의 생산 양식을 가진 사회가 도래 할 것이다. 그런 징후를 느낀다"라고 예언자적인 입장에 서 있다.

 이영란이 지난해 보여준 모노 드라마 〈나만의 방〉에는 남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허위의식과 편견과 모순에 대한 일방적 질타만이 있었다. 그것은 연극〈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가 보여준 여성들의 한풀이, 대리 만족의 배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연작이〈자기만의 방〉은 배타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서로 공존할 수밖에 없는 남녀 문제를 결혼 제도를 통해 들여다보고 있다

 극중에서 이영란은 말한다. "남녀 한쌍 사이의 전면적인 관계란 허상에 불과하다"라고. 그런 허상에 기초한 결혼이야말로 얼마나 허망한 것이냐고. 이영란이 이 극을 통해 강조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업악이 결혼이라는 제도에 의해 계속 연장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현 단계의 결혼이란 "부추겨진 남자의 성과 억눌려진 여자의 성이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시초부터 차별적"인 것이다.

"성은 결코 햄버거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구호나 이즘에 기대하지 않는다. 인간이 인간 아닌 것으로 너무 오랫동안 살았다. 그래서 지혜의 냄새가 무엇인지 잊고 있다"라고 말한다.

 정선경이나 최영미 나 이영란 이나 오늘날 성의 범람이, 배고프면 밥 먹고 간지러우면 긁듯이 하는 섹스가 결코 진정한 성 해방이 아니라는 데 동의하고 있다 '성은 경쾌하고 건강하고 성스러운 것, 결코 싸구려 인스턴트 식품이나 햄버거가 아닌 것'(이영란)이고 '조화로운 충만된 쾌락'(최영미)이다.

 그러나 본능적 욕구와 사회 제도 사의의 괴리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대부분의 여성, 혹은 남성들은 갈등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비공식 부문이 공식 부문을 압도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거리를 메우는 배꼽티의 도도한 행렬은 기존의 성 담론이 이제 다음과 같이 마셜 맥루한의 말로 대체될 수밖에 없게끔 만들어 간다. "섹스를 성기관에 국한시키는 종래의 성 우상주의자가 실망할 정도로 미래의 성은 훨씬 다양하고 또 인간의 생활 전체와 감각 전부를 동원할 것이 될 것이다. 새로운 성을 추구하는 것은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노력은 현재 진행중이며. 멀지 않아 우리가 놀랄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趙溶俊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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