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친을 돕자” 서유럽 때늦은 각성
  • 진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2.01.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7일은 율리우스 曆으로 크리스마스였다. 크리스마스 전야인 6일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울긋불긋한 민속의상을 입은 시민들이 즐겁게 춤추는 것을 파리에서도 텔레비전뉴스 화면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작년에 러시아 공화국 등 소련 일분에서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로 선포되었지만 보리스 옐친 등 러시아공화국 지도자들이 크리스마스 미사에 참가한 것은 금년이 처음이다. 70년간의 소련 공산당 통치 역사가 해가 바뀌면서 말끔히 사라져버린 뒤에 크리스마스를 맞는 모스크바 시민들의 표정은 한결 밝게 보였다.

 그러나 요즘 서유럽 사람들은 구소련, 러시아 공화국을 비롯한 독립국가연합(CIS)의 장래에 대해 걱정이 태산이다. 그것은 엉성한 연방체제로 출발한 독립국가연합의 어려운 사정이 무사히 풀려나갈 것이냐에 있다. 공화국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지, 식량난으로 동요가 생기지나 않을지, 옐친이 독재를 하여 반발을 야기하지나 않을지, 핵무기가 제대로 관리될지…. 그중 가장 큰 걱정거리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 악화 가능성이다. 12월 민스크 회담에서 11개 공화국은 전략 무기와 전략 병력은 러시아의 통합 지휘아래 두기로 합의했으나 일반 병력에 대해서는 명확한 합의가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가 구 소련군 장병들에게 우크라이나에 대한 중성 서약을 시켜 러시아로부터 비난을 사더니 또 흑해 함대(군함 3백 척) 을 우크라이나에 소속시키려다가 강력한 항의를 받았다.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경제사정이다. 옐친은 생필품 몇 가지를 제외한 일반 물자의 가격을 지난 2일부터 자유화했다. 생필품 값도 많이 올렸다. 시장경제 체제를 도입하기 위한 이러한 대담한 조처가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 것인지, 식량난은 완화될 것인지 몹시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요즘 유럽공동체(EC) 국가들이 보낸 생필 물자 상자들이 러시아에 도착하기 시작했으나 일부는 창고에서 잠자고 있고 일부는 부정 유출되고 있어 시민들에게 전달되는 부분은 극히 적다는 영국 구호기관 직원의 주장이 크게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걱정 뒤에는 서방 국가들이 좀더 일찍, 좀더 적극적으로 원조 조처를 취했어야 했다는 자책감도 깔려 있다. 유고 내전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데도 유럽공동체 국가들이 보조를 맞추지 못했듯이, 소련에 대한 원조 문제를 놓고 작년 여름 런던에서 G7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부터 시원스러운 공동대책을 강구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에는 원조의 대상이 소련이냐, 공화국이냐를 가지고, 또 경제개혁 방침이 뚜렷하지도 않은데 원조를 해봐야 실효가 있겠느냐는 식으로 차일피일해왔으나, 이제는 그러한 구실이 성립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지적한 영국의 <가디언>지는 옐친의 경제 개혁을 돕는 일은 유럽의 ‘역사적인 도전’이라고 주장했다.

“원조 늦어 고르비 몰락” “불안한 이웃 만들지 말자”
 그러나 이제는 옐친 시대가 열리고 드디어 경제개혁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환영할 만한 일이라고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최근의 유혈사태는 전에도 그러한 사태를 유발했던 아르메니아 · 아제르바이잔 분쟁 때문에 생겼으며, 구르지야의 내전은 최근에 즈비아트 감사후르디아 대통령의 탈주로 일단락되었다.

 한편 독립국가연합이란 체제가 구조상 허술한 것이 사실이며, 옐친의 경제개혁이 응분의 기초 작업을 거치지 않은 대담한 조치인 것도 사실이지만, 74년의 공산정권 역사를 돌이켜본다면 이러한 대담한 출범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봐야 될지 모른다는 주장도 있다. 레닌과 스탈린의 역사는 혁명에서 시작되어, 내란 재산몰수 집단농장화 기근 대량처형 강제이주 강제수용소(굴라그)로 이어지는 역사였던 것이다. 가장 핵심적인 변화는 고르바초프가 절충의 길을 찾아 방황하기만 하던 경제개혁을 옐친이 아무런 망설임 없이 단행했다는 점이다. 선거로 뽑힌 대통령인데다 쿠데타 때 용감히 저항하는 자세를 전 세계에 보임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신임을 얻은 인물이기 때문에 이 같은 용단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도 서유럽 사람들은 불안하다. 옐친의 개혁이 폴란드에서처럼 주효할 것인가. 우크라이나 등과 의견 조절을 잘 해낼 것인가. 이런 시기에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인 행동이 아쉽다는 여론이 높다. 원조체계를 점검하고 원조 규모를 늘리자는 것이다. 또 장기적으로는 2차대전 후 미국이 서유럽에 시장을 열었듯이 이번에는 서유럽이 시장을 동쪽에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서유럽은 때를 놓치지 않고 독립 국가 연합(구소련 공화국들)에게 희망을 안겨줄 것인가.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