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제 쐐기에 궁지 몰린 대권야망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0.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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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양김 공존론’통해 대통령제 고수 시도… 민정ㆍ공화계 반격에 위기 맞아

민자당의 金泳三 대표가 위기를 맞고 있다.  “연내에는 내각제 개헌 문제를 일체 거론하지 않는다”는 민자당의 방침에 따라 일단 시간을 버는 데 성공하는듯했던 김대표가 최근 ‘내각제 합의각서’공개라는 복병을 만나 여권에로의 변신 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내각제 개헌 합의각서설이 유포될 때마다 합의각서의 존재 유무에 대해  “있어서도 안되고 있을 수도 없다”고 강력히 부인해왔던 김대표는 이제 각서 서명의 진위에 대해 명백한 태도를 보여야 할 입장에 처해 있다.  합의각서 서명 여부는 비단 한 정치인의 도덕성 여부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3당통합의 명분 그 자체가 결국 허위였다는 결론으로까지 치닫는 중차대한 사항이다.

“국민을 배신하고 우롱한 김영삼씨는 즉각 민자당의 대표직에서 물러남으로써 국민에게 사죄하라”는 민주당의 성명은 이번 합의각서 공개가 어떤 파문을 몰고 올지 예고하고 있다.  가뜩이나 위축돼 있는 민주계 의원들의 집단탈당을 촉발시킬 요인도 다분히 있다.  민주계의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벌써부터 민주당측과 접촉하면서 진로 모색에 부심하고 있다.  이들의 움직임은 자칫 개헌선을 깰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폭풍의 눈’이 될 조짐이다.

김대표와 민주계를 급습한 이 위기는 따지고 보면 지난 11일 김대표가 단식 4일째인 평민당 金大中총재를 전격적으로 방문할 당시부터 이미 예고돼 왔다.  김대표의 김총재 방문(11일)→민정계의 조직적 반발 (22일)→청와대 4자회동에서 내년초 내각제 공론화 확정(24일)이라는 수순 역시 차기 대권구도를 향한 당내 투쟁이 이제 본격적인 단계에 들어섰음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민주계로서는 민정ㆍ공화계의 공세에 대비한 자구책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영삼 대표가 생각한 자구책의 첫 수순(단식중인 평민당 김총재 방문)을 전후해서 김대표가 느껴온 절박한 심경은 최근 그의 어록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93년 재대결 노려 김대중씨와 ‘화해’

“평민당 김총재와 한시간 가량 많은 논의를 했다.  이제부터는 더욱 야당을 동반자라고 생각하고 공존의 기반 위에서 같이 행동하겠다.” (10월16일 신임 원내총무 인준을 위한 민자당 의원총회)

“김총재와 30여년간 같은 야당의 길을 걸어왔다.  그 때문에 과거의 동지적 입장에 서서 앞으로 김총재와 얘기 못할 것 없다.  정치를 복원시키자는 데 합의했다…정치복원을 위해 결단을 내릴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다. ‘야당을 동반자라 생각하고 공존’하는 바탕 위에 서겠다.” (10월19일 부산 동구 지구당 창당대회)

이 어록을 일별해 보면, 김대표와 김총재의 사이는 합당 이전의 관계로 복원될 뿐 아니라 과거의 ‘우정’과 ‘신뢰’가 회복되고 있다는 느낌마저 갖게 한다.

이 가운데 특히 김대표가 말하는 ‘야당과의 공존의 길’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현상황에서 김대중씨와의 대결은 결국 두 사람 모두 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뜻일까.  그래서 김총재를 찾아가 한편에게는 ‘무릎을 꿇는 일’로, 또 다른편에게는 ‘구국의 결단’으로 보이는 처신까지 감내해가며 자신과 김대중씨가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일까.

여기서 “야당과 국민이 반대하면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지난 6월 盧泰愚 대통령의 약속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표현은 내각제 개헌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마다 김대표 역시 즐겨 사용해온 인용구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개헌하는 데에는 평민당, 즉 김총재의 동의가 필요충분조건이라는 내용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김대중 총재가 내각제에 반대하기만 하면 김영삼 대표는 지금까지 보여왔던 내각제 개헌에 대한 소극적 태도(민정계와 공화계가 김대표에 갖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불만의 원인이다)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입장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내각제 개헌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상을 심어 타 계파의 불만을 무마하고 시간을 버는가 하면, 결국은 김총재의 반대 때문에 내각제가 불가능하다는 양동작전을 구상하고, 이 작전 전개를 위해 김총재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는 논리가 선다.

지난 20일 부산 기자회견에서 김대표가 가장 강조했던 것도 사실은 이 부분이었다.  이날 김대표는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느낀점인데 내각제가 오히려 매력적인 것 같다.  선거를 같이 치러본 입장이니 알겠지만 이런 대선을 또 치를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김총재는 절대 안된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국민과 야당이 반대하면 안된다는 점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고 전에 없이 상세하게 평민당 김총재와의 회동 내용을 밝혔다.

최근 김대표를 비롯한 민주계는 내각제 개헌에 대해 전보다 훨씬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김대표가 “내각제가 매력적이다”고 말한 것도 그렇고 黃秉泰 의원 등 민주계 핵심 의원들이 “내년 적당한 시기에 내각제 개헌을 공론화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던 것도 그렇다.  이같은 민주계의 중대 변화는 결국 ‘야당만 반대하면 된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두 김씨의 ‘단식회동’직후부터 김영삼씨의 언행에 자신감이 돋보였고, 또 이때를 기점으로 ‘야당과의 동반자론’과 ‘공존론’이 나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결국 두 김씨는 대통령제 고수를 위해 한시적인 ‘평화협정’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대표가 말하는 ‘야당과의 공존의 길’이야말로 두 사람이 합심해서 현재의 대통령직선제를 고수, 93년에 다시 한번 대결하자는 말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정국이 다시 두 김씨의 구도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민정ㆍ공화계의 반격은 즉각 나타났다.  24일 청와대 4자회동에서 노대통령은 “내각제는 공론화 시기만 남겨놓고 있다”고 쐐기를 박았고 “개헌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경선에 의한 차기대권 후보자 결정을 말릴 수 없다”는 충고까지 했다.  형식적으로는 내년초에 공론화작업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지만 이미 여권은 각종 채널을 통해 개헌에 필요한 각종 여론조성작업에 착수했다. “평민당이 반대할 경우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국민 설득을 벌일 것” 이라는 청와대 관계자의 말은 최근 여권의 기류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김영삼의 위기’를 당사자인 김대표는 ‘결국 올 것이 왔다’고 가볍게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지 모른다.  문제는 이웃나라 일본의 나카소네나 프랑스 자크 시라크류의 ‘정치적 변신’을 우리의 정치풍토가 좀처럼 용납치 않는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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