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노동운동 원천봉쇄 “경찰 뺨치는 수준”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0.11.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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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서 ‘붙잡힌’ 직원 ‘해고자 사찰’일상화 증명

10시-13시, MJ(문제)단체PT(순찰)

13시-14시, 중식

14시-17시, 시내PT, ‘한빛교회’ 거주자 확인

17시-20시, AJ대(아주대) MB(매복)

 

얼핏 보아 보안사 사찰요원의 하루일정표이거나, 아주대학교에 드나드는 정보과 형사의 것처럼 보이는 이 메모는 삼성전자 노무과 직원의 수첩에 적힌 일일 업무계획이다.  이 수첩의 주인인 문종덕(26)씨는 지난 10월18일 수원 아주대학교에서 ‘매복업무’를 수행하다 학생들에게 발각돼 붙잡혔다.  이 학교 총학생회의 도움으로 복사실을 운영하고 있는 수원지역 삼성그룹계열사 해고 노동자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던 중 부주의로 들킨 것이다.

문씨의 수첩은 그동안 소문으로만 전해지던 삼성그룹의 조직적이고도 일상적인 정보감시활동이 실제 그대로 행해지고 있음을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집 노동상담소 재야단체대학가 술집 등 ‘문제사원’과 ‘문제단체’가 있는 곳이면 언제나 삼서의 사찰요원이 따라붙고 있다는 사실을 이 수첩은 증명하고 있다.  ‘노조없는 경영’을 이루기 위해 삼성은 사내에 작은 정보기관을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정보기관은 노무과(인사과)였다.  문씨가 소속한 수원 삼성전자의 노무과 직원 17명은 하루 일과의 거의 대부분을 그림자(미행)와 PT(패트롤ㆍ순찰)로 보낸다.  그 대상은 물론 노조설립 시도 등 노동운동 관련으로 해고된 사원이 첫째이며 해고자와 만나는 사내외 인물, 그밖에 문제가 있다고 ‘찍은’ 요주의 사원들이다.  직원들은 아침에 출근하여 그날의 임무를 간부로부터 지시받고 각자 맡은 위치로 흩어져 정보를 수집, 필요한 내용을 전화 또는 서류로 회사에 보고한다.

 

‘지문재취ㆍ현상수배’ 경찰방식 그대로

삼성전자 삼성전관 삼성전기 삼성코닝 등 수원지역 삼성그룹계열사 종업원 3만5천여명 가운데 매년 해고되는 숫자는 평균 2백여명.  따라서 이들을 감시할 정보원의 수가 얼마나 많아야 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씨의 수첩에는 3년 전에 해고된 사람의 근황까지 추적되고 있음이 나타나 놀라움을 더해주고 있다.  이 수첩에는 또 기대(경기대) 곽(형사), 아대(아주대) 조(형사), CH(시티홀ㆍ시청) 미스 박 등 회사쪽이 지속적인 연락관계를 갖고 잇는 암호명이 보이고 있는데 이것은 삼성의 신속하고도 효율적인 정보망 운영비결이 무엇이었나를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다.

삼성계열사 노무과의 노동운동 원천봉쇄를 위한 주동자 색출능력과 해체능력은 경찰의 그것을 뺨치는 수준이라고 삼성근로자들은 말한다.  회사 통근버스 정류장인 아주대 앞에서 해고자들이 〈삼성노동자소식〉 같은 전단을 뿌리기 시작하면 5분내로 봉고차구사대가 달려와 순식간에 박살내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내에서 유인물이 돌거나 낙서 또는 스티커가 발견될 경우에도 2천명의 사원 중 단시간 내에 용의자를 5명 이내로 압축, 결국 ‘범인’을 골라내고야 말 정도의 놀라운 수사력을 삼성은 보유하고 있다.  필적감정ㆍ지문채취에서부터 사내 현상수배까지 경찰수사방식 그대로다.  현상내용은 대개 2백만원 포상에 2호봉 특진.  수위실 앞에 내거는 현상수배 사진도 일부러 복사해서 붙여 ‘범인’ 같은 인상을 주도록 한다는 얘기이다.

‘불순행동’을 하거나 고충청취 명목으로 벌이는 주당 몇차례의 규칙적인 면담 결과 의식화 성향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순화’를 위한 집중적인 면담에 들어가게 된다.  이 면담은 경찰이 운동권학생을 수사하는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반장에서부터 과장까지 간부들이 차례로 면담실에 들어와 똑같은 내용의 질문과 설득을 반복함으로써 듣는 사람이 몇시간 못버티고 항복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면담을 ‘감금’이라고 표현하는 삼성코닝 해고자 윤건영(30)씨는 입사 초기 면담에 한번 불려갔다가 그것이 “고문고 같아 견딜 수  없어 14시간만에 15장의 자술서를 써주고 풀려난 적이 있다”고 말한다.  윤씨의 말로는 한 해고자의 경우 무려 23시간을 연속적으로 면담한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종업원들은 그래서 면담들어갈 때 “잘못을 범한 학생이 교무실에 불려가는 것”만큼이나 겁이 나게 된다.

면담에 자주 들어가는 등 종업원들 말로 ‘찍힌’ 사람에게는 모니터가 여럿 배치된다.  망원이라고도 하는 모니터는 감시요원이란 뜻인데 작업장에서는 동료나 사수(고참)로 같이 일하면서 감시대상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간부에게 보고한다.  작업장뿐만 아니라 집 술집 등 감시대상자가 출입하는 곳과 만나는 사람 주변에는 언제나 모니터가 뒤를 따르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관에서 해고된 유재현(29)씨는 “거머리 같은” 모니터망에 대해 이렇게 주장한다. 

“동료들에게 술을 사주면서 그 자리에서 나오는 얘기로 동향을 파악하는 모니터수법은 이제 초보적인 것이 됐다.  모니터활동을 내놓고 벌이는 데다, 그 모니터를 또 감시하는 모니터가 뒤에 있는 2중ㆍ3중의 감시체계로 종업원들을 묶어놓아 동료간에 할 수 있는 얘기라고는 술과 여자얘기밖에 없다.”


“감시 때문에 여자얘기만 한다”

이러한 복수 감시체계를 운영하는 데 따른 경비지출은 상상을 불허할 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조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피해액의 20%만 사전에 쓰면 노조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 삼성의 공공연한 경영철학이고 보면 정보수집과 회유활동에 돈을 얼마나 쏟아붓고 있는지 대강 추측해볼 수 있다.  회유대상자들 중 고급 룸살롱이나 횟집에 데려가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만큼 삼성은 노조저지를 위한 일이라면 아낌없이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A급으로 분류된 문제인물에 대해서는 회시측이 ‘매수’에 가까운 회유를 벌인 사례도 있다.  지난해 3월 삼성전자에서 해고된 노동자의 경우 인사과 간부에 의해 ‘납치’돼 두달 동안 제주도 설악산 등 전국을 안가본 데 없이 돌았는데, 그 경비가 자그마치 2천만원 가까이 됐다고 한다.  최고급 호텔에 묵으면서 “다 벗고 인간적으로 얘기하자” 며 터키탕도 수차례 들어가는 등 초호화시설만 골라서 다녔으니 그만한 돈은 충분히 들었을 것이라는 계산이다.  이 노동자는 간부로부터 2백만원 한도의 신용카드도 그저 받았으나 결국 “겁이 나서 못썼다”는 것이다.

회사측이 이처럼 큰 돈을 물쓰듯한 것은 이 노동자가 노조결성을 주동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거물급’으로 판단됐기 때문이다.  그는 근로기준법의 관련조항을 구체적으로 대면서 유해작업장 근무에 대한 수당적용을 요구하는가 하면 재야노동상담소를 빈번히 출입,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마음을 돌려놓든지 아니면 쫓아내야 할 사람”으로 회사에서 판단한 것이다.

쫓아내는 방법으로 회사는 해고보다 권고사직 형식을 더 좋아한다.  삼성코닝 해고자 윤건영씨에 따르면 당시 회사측은 사표쓰기를 거부하는 윤씨를 노무과장 옆자리에 앉혀놓고 15일 동안 볼펜 한자루와 종이 한장만을 들이대면서 퇴사를 종용했다고 한다.  그래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회사측은 근태불량 등 갖가지 이유를 들어 윤씨를 해고했다.

해고가 되면 사찰이 휠씬 강화된다.  해고자들은 대부분 복직투쟁을 벌이며 사원들을 “부추기고”, 시내 곳곳에 삼성그룹을 “비방하는” 전단을 뿌리거나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기 때문이다.  “해고자 집앞에는 4명의 노무과 직원이 승용차를 대기시킨 채 상주, 해고자가 나가면 같이 따라나가고 들어오면 또 매복하면서 집안의 동정을 살핀다.  해고자가 만나는 사람은 물론 집안에서 통화하는 사람들까지도 전화국 온라인기록을 입수하여 알아낸다.” 이런 내용 역시 문종덕씨의 수첩에서 알려진 것이다.  법적으로 통화기록은 가입자의 허락없이는 아무나 열람할 수 없도록 돼 있다.

이처럼 갖은 수단을 다해 위험인물을 철저히 감시하면서도 혹시 모를 기습적인 노조설립신고를 봉쇄하기 위해 삼성은 해당관청에 직원을 조합원으로 구성하여 미리 작성한 이른 바 ‘유령노조’ 설립신고서를 상비해놓고 있다가 낌새만 나타나면 재빨리 그것을 제출, 선수를 치는 것이다.

신고서 제출을 봉쇄할 수 있는 방법은 또 있다.  접수관청에서 미비서류 등의 이유를 들어 신고서를 일단 반려하게 되면 그 틈을 이용해 유령노조 신고서를 들이미는 작전이다.  지난 88년말 거제 삼성중공업의 유령노조 설립 사례가 그런 경우였다.  당시 노조를 준비하던 노동자들은 신고된 노조에 8백명의 가입원서를 내용증명으로 보낸 뒤 그것이 수령되지 않은 사실을 확인, 어용노조와는 또다른 유령노조의 실체를 증명한 바 있다.

중앙일보사 외에는 노조가 전무한 삼성그룹의 ‘무노조’ 비결은 어쩌면 비결이 아닐지 모른다.  ‘업계 최고의 대우’보다는 비인간적인 ‘정보경영’이 더 직접적인 노조불모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동료들끼리 술과 여자얘기 말고 근무환경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말할 수 있을 때, ‘노조가 필요없는 기업’이란 삼성의 모토는 설득력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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