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의미는 관객이 재창조해야”
  • 고명희기자 ()
  • 승인 1992.0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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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설 꾸짖음보다 관객 외면 더 걱정”/‘경마장 가는 길’ 감독한 장선우씨

 소설로 이미 화제를 모았던 ‘경마장 가는 길’이 영화관에서 한창 상영중이다. 감독은 그동안 리얼리즘계열의 영화만은 고집해온 張善宇씨(40). 그가 자신의 작품에 대한 관객의 반응을 영화관에서 확인한 바로는 ‘코끼리 다리 더듬는 듯 다양하더라’는 것이다. “포르노 같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그는 달리 할말이 없다고 한다. 장감독은 오히려 그 비난이 성공의 축가로 들린다는 표정이다. 오염된 사회를 재해석하기 위해 관객의 시각을 ‘자율성에 근거한 독창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열어주려는 것이 작품의도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메라는 본질을, 관객은 의미를 캐내야”
 영화‘경마…’는 원작자 하일지씨가 각색을 맡은 탓에 그 기본 줄거리는 소설과 같다. 프랑스에서 5년반 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한 주인공 R(文盛瑾 역)이 프랑스에서 동거했을 당시 논문을 대신 써준 J(姜受延 역)에게 섹스를 집요하게 요구하는데, J는 “서울에선 조심해야 해요”라며 번번이 거절한다. 또 그동안 급변한 서울의 모습에서 R은 문화적 충격을 느끼면서 점점 더 절망에 빠지게 된다는 줄거리다.

 영화가 외설적이라는 비난이 들릴 정도로 지루하고도 집요하게 펼쳐지는 성적 묘사에 대해 장감독은 “단순한 에로티시즘 영화가 아니다”라고 반박한다. 본질적인 삶과 무관하게 허구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사실성과 이중성의 관계’를 명확히 드러내고 싶었다는 것인데, 각 장면의 드러난 화면 밑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숨겨 놓았다고 한다. “‘섹스 거부’는 여러 껍질로 쌓여진 우리 사회 모순의 상징이다”라고 장감독은 말한다. “저도 이따금씩은 결혼하고 싶어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하는 J의 같은 말 반복사용은 일상생활 자체가 반복의 연속임을 뜻한다. 5년새 부쩍 늘어난 자동차 홍수는 R의 답답한 심정을 얘기하기 위함이고, 십자가가 즐비한 서울의 야경에서 R가 거대한 공동묘지를 연상하는 것은 R가 점차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간다는 것 등을 문화적 충격과 함께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다.

 장감독은 86년 첫 연출을 맡았던 ‘서울예수’가 외압에 의해 개봉 직전 불발한 후 그가 추구하는 리얼리즘을 민초들의 이야기를 통해 접근해왔다. ‘성공시대(88년)’ ‘우묵배미의 사랑(90년)’이 이런 것들이다. 특히 그의 영화의 특징으로 꼽히는 코믹터치는 “비극속의 희극이라는 이중성 속에서 삶의 진실이보다 잘 드러난다”는 장감독의 영화언어이기도 하다.

 매번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강한 실험정신을 내보였던 장감독은 이번 영화에서는 롱테이크 기법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롱테이크 기법은 카메라가 연속적으로 있는 그대로를 찍는 것이다. 편집과정이 생략되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우의 연기에 의존해야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장면과 장면을 편집하는 것보다는 사실성이 월등하게 뛰어나다. 이 기법을 도입한 덕택에 이 영화는 2시간 30분 상영이 불과 3백여 컷으로 마무리되었다(대부분의 영화가 1천여 컷으로 구성된다).

 하지만 이런 실험적 성과가 이 영화에 쏟아지는 비판을 덮을 만큼 위력적이지는 않다. 영화평론가 유지나씨는 “원작 소설이 우리사회에 던졌던 누보로망소설로서의 신선함을 영화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낸다. 또 李世龍씨(감독 겸 영화평론가)는 “리얼하다고 해서 다 용서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터럭 사타구니 등 비속한 표현은 대단히 위함한 솔직함이다”라고까지 비판한다.

“비속한 표현은 위험한 솔직함” 비판도
 이러한 반응에 대해 장감독은 크게 우려하지 않는다. 영화적 해석이란 ‘본질적인 것’을 카메라가 바라보도록 하는 것이라는 신념이 있기 때문이다. 잘된 코미디를 보았을 때 터짐직한 시원한 ‘배설’같은 웃음뿐만 아니라, 짜증과 어이없음이 뒤섞인 나머지 분통으로 내지른 외침도 환영한다는 장감독은 단지 보기 전에 아예 외면하는 관객이 염려스러울 뿐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영화를 선택한 관객이 자신의 세계 안에서 그 의미를 창조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장감독은 말한다. 마치 R가 절망의 끝에 다달았을 때 탈출구로 ‘경마장 가는길’이라고 쓰듯이 오염된 사회를 재해석하기 위해 닫힌 시각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라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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